소설 / 수면빚 / 2화

2화_ 예견된 일

by 박선향

# 새로운 이야기 … 꿈속에서 만난 두 남자



강렬한 태양 빛이 도로를 달구자, 버스가 뜨거움을 피하려는 듯 차선을 바꿔가며 질주한다. 수은이 넘어질 듯 말 듯 도리질을 치며 버스 맨 뒷좌석에서 졸고 있다. 여름이면 수은의 불면증은 한층 더 심해졌다. 수면 적정 온도인 18~20℃를 훌쩍 넘는 기온 때문이었다. 잠드는 시간은 줄어들고 대신 꾸벅꾸벅 조는 시간이 길어졌다. 불면증 따위는 어찌 견뎌보겠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조는 건 정말이지 볼썽사나웠다. 더군다나 조는 건 가능한데 잠들 수 없다는 게 그녀는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지나치게 밝은 귀를 가진 수은이 무사히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에 도착한다. 문 앞에서 각오라도 하듯 한숨을 몰아쉬는 수은을 익숙한 인사말이 반긴다. 반기는 게 맞는 걸까 싶은…


“오늘은 눈동자가 빨갛다 못해 누런데? 황달 아니에요?”

“진 작가님이 잠만 제대로 자도 우리 회사 완전 대박일 텐데…”


매번 듣는 말이지만, 농담인지 진담인지, 지나가는 말인지 새겨들어야 하는 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수은이 두리번거린다. 역시 삼촌 현노는 보이지 않는다. 묻지도 않았는데, 신참인지 못 보던 얼굴이 수은에게 귀띔한다.


“대표님은 신비한 약초를 구하러 가셨어요. 엄청 예쁜 분과 함께요. 어쩌면 대표님은 그렇게 진 작가님 생각뿐일까요. 존경스러워요.”


현노는 참 많은 직함을 가지고 있다. 스토리텔링 회사는 수은을 위해 만들었고, 음반사, 체육관, 음식점 말고도 댄스연습실과 화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 모든 걸 삼촌 현노가 직접 관리하는 건 아니다. 그는 그저 이 다채로운 사업장을 들러 취미생활을 즐길 뿐이다. 어찌 이렇게 일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지, 수은은 그게 신기했다.



회의실에 직원들이 다 모이자, 수은이 가볍게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무실 오는 길에 버스에서 잠깐 졸았는데, 아주 놀라운 꿈을 꿨어요. 깨고 났는데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이야기보따리 같다고나 할까. 수은은 매번 회의 때마다 별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았다.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어디서 이 많은 얘기들을 주워듣는지 모두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매번 직원들은 한껏 기대에 부푼 눈빛으로 수은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골자는 꿈속에서 두 남자를 만났는데, 한 남자는 깨어 있어야만 만날 수 있고, 다른 한 남자는 잠들어야만 만날 수 있다는 거예요.”


예상대로 반응이 좋았다. 현실적 만남과 비현실적 만남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 이야기, 여자의 선택이 불 보듯 뻔하지 않으려면 많은 장치가 필요하겠다는 의견이 오갔다. 이야기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을 모아보겠다며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오늘은 꼭 집에 데려다줘야만 할 것 같은데? 그냥 보내면 딱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상태라고!”


스토리텔링 회사가 설립되던 무렵부터 10년 가까이 수은을 지켜본 담당자 미연이 주섬주섬 자동차 키와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니야, 오늘은 혼자 돌아다니고 싶어.”

“바로 집에 가는 게 아니고? 정말 괜찮겠어?”

“아직 쓰러질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 마, 언니.”


수은이 미연의 손을 꼭 잡고 끌고 가 자리에 앉히더니 서둘러 자리를 뜬다. 몇 걸음 걸어간 수은이 돌아보지도 않고 미연을 향해 세차게 손을 흔들었다. 수은을 바라보는 미연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 담겨있다.

어느새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채로 사무실을 나서는 수은. 꿈속에서 만난 두 남자가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두 남자 다 참 매력적이었는데… 얼굴이 도통 생각이 안 난단 말이지.’


그 순간,


“야, 진수은!”


놀란 수은이 멈춰 선다. 바로 앞에 멀대처럼 큰 전봇대가 서 있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창문 밖으로 몸이 반쯤 나온 미연이 벌건 얼굴로 수은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맙다는 듯 손을 흔들어 미연을 안심시킨 수은이 몇 걸음 걷다가 또다시 멈춰 선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 내가 졸다가 꿈을 꾼 거야? 나… 꿈꾼 거 처음인 거 같은데?’


수은의 표정이 복잡미묘해진다. 낯설면서도 설레기도, 조금은 알 수 없는 두려움도 밀려왔다.




# 엄마를 위한 마지막 노력



진원이 벌컥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이설이다. 어쩐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진원이 망설인다. 손목의 팔찌를 확인하는 진원. 아직 색깔이 옅다. 위기의 상황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결국 진원이 문을 기대고 선 채 고갯짓으로 이설에게 사무실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진원이 한쪽 벽면 가득한 LP 중 한 장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려놓자, 잔잔한 음악이 상담소를 가득 메운다. 음악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어온 진원이 이설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진원은 언제나 상대방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 상황이 낯선 듯 멍한 채로 있던 이설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명함을 꺼내 진원에게 건넨다.


“저는 강이설 기자라고 합니다. 이곳을 취재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가 요즘 자살과 관련해 다각 도로 취재 중이거든요.”


덧붙여 나의 엄마도 어린 딸을 두고 수차례 자살을 시도한 바 있다고. 그래서 이참에 엄마를 좀 이해해 보고 싶다고. 이게 마지막 노력일 거라고, 시원하게 다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이설은 차마 그러지 못한다. 아직 누군가에게 배정이 될 정도로 수면빚이 가득하진 않지만, 이설도 때가 멀지 않다는 걸 진원이 감지한다. 기왕이면 수면빚이 가득 차지 않도록 도와주는 게 좋겠다 싶어, 진원은 그녀가 이곳에 계속 들러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이곳에서 자살 관련된 상담도 많이 하고 있어요. 잘 찾아오셨네요. 근데, 하루이틀로는 역부족이라는 거 잘 아시죠?”


인간이란 존재는 참으로 묘했다. 조금만 다른 각도로 보면 마음을 쓰이게 하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인간의 마음이란 절대로 단단해질 수 없는 존재여서 늘 상처가 나기 마련이었다.



진원의 사무실에 들어오고부터 이설은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사이 그녀의 시선이 상담실 이곳저곳에 머문다. 장시간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진원에게서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광활한 우주에선 먼지보다 못한 인간의 고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달까? 그간 만나왔던 자살 상담 사례와 더불어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치료의 취재에 협조하기로, 진원은 이설과 약속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섭외가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일이 쉽게 풀리자, 진원을 바라보는 이설의 눈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설은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자신이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엉뚱한 상념에 빠진 사이, 진원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이설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반대편 거울로 미소 짓는 낯선 자신을 보고 흠칫 놀란 이설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판타지가 일상처럼 느껴져서 그런지, 이 세상에 정말이지 인간 말고 다른 존재들이 수두룩빽빽 할 것만 같거든요. 어디 블로그에서 본 것 같은데, 인간 대신 잠을 자는 그런 특별한 존재도 있다던데요? 죽은 건 아니고, 분명 잠든 상태였던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졌대요. 얼마나 지나지 않아 다시 나타나긴 했는데, 아무런 이상도 없고. 없어진 사람은 자기가 없어진 걸 몰랐다나 봐요.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가능하다면 어떤 느낌일지 정말 궁금해요.”


믿는 건지 믿고 싶은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설의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 진원은 아무런 대꾸 없이 이설을 바라봤다.


이설이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메시지가 떴다. 으레 뜨던 메시지인데 이설의 얘기를 듣고 나니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이런 메시지 수가 늘었다. 그들을 봤다는 메시지가 넘쳐나고 있으니까.


“갈취자라…”




# 이끌림 … 수은과 태하의 만남



수은에게 사람이란 그저 이야기 속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위험하고 험난하기 그지없는 세상 또한 그녀에겐 이야기의 배경일 뿐이었다. 현실감이 떨어져서 그런 거라고 삼촌 현노가 종종 그랬다.


“너는 도대체 어느 세계에 사는 거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처럼 살아야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수은은 그저 상대방을 빤히 쳐다봤다. 인간처럼 사는 게 뭘까. 그러는 삼촌은 인간답게 사는 건가. 결국 인간은 제각각이다. 함께 존재하지만 결국 나의 고통은 나만의 고통이고, 나의 삶은 나만의 삶일 뿐이다.


내 오늘도 그댈 담을 말이 없는걸

뜸을 들이다 그댈 추억하오

늦은 밤, 꺼내서 미안해

누구를 위한 그 사랑 노래를

백아 노래, <테두리> 중 ♬


좋아하는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수은이 서점의 책 무더기 사이를 걸어간다. 섞여 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그녀의 이질감을 누군가 멀리서 인지한다. 잠에 관련된 책이 이렇게 많다니, 수은은 새삼 놀랐다. 그것도 이렇게 자라 저렇게 자라 일장 연설을 이다지도 많이 늘어놓다니, 인간은 참으로 피곤한 존재다. 정말 사람들은 이런 책을 보고 따라 하는 걸까. 한때 수은도 현노에게 끌려와 한 무더기 책을 산 적이 있다. 그때 그 책을 잘 뒀더라면 다시 안 사도 됐을 텐데. 책 속의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겐 해당 사항이 없음을 깨닫게 된 수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련 없이 책을 버렸더랬다.


그 사이 수면장애를 겪는 사람이 무척 많아진 듯했다. 이전보다 훨씬 수면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 공간도 그만큼 넓어졌고, 위치도 눈에 확 띄는 곳이었다. 자신이 골라 쌓은 책 장벽이 아늑한지, 수은이 또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든다. 아까부터 그녀를 따라다니던 시선이 점점 가까워졌지만, 수은은 눈치채지 못한다. 수은이 장벽 위에 책 한 권을 더 올려놓으려는 찰나 우수수, 책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맙소사!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황한 수은이 앞도 보지 않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그 순간 수은의 시야에 커다란 남자의 손이 쑥 들어왔다. 수은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태하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부드럽긴 한데 뭔가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달까. 위험하니까 빨리 피하라는 마음과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동시에 수은을 괴롭혔다. 두 마음이 너무 팽팽해 쉬이 결론이 나질 않았다.



서점 내 한적한 카페에 수은과 태하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지나가는 말 한마디 겨우 나누는 것 외엔 낯선 사람과 오롯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수은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태하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아까부터 생각 중인데 도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는 편인지라, 뭔가 접점이 있었다면 분명 떠올랐을 것이다. 태하의 얼굴 생김새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인상이었다. 분명 처음 보는 남잔데, 도대체 어디서 본 걸까. 수은이 고른 책들을 훑어보던 태하가 먼저 말을 건넨다.


“수면장애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수면 연구자?”

“수면장애는 안 겪어본 사람이 없을 만큼 현대인의 공통된 질병이라 장애라기 보다는 현상 쪽에 가깝지 않을까요?”


저절로 흘러 나간 말을 주워 담으려는 듯 수은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이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고는 익숙한 듯 이야기를 나눴다. 잠을 왜 자야 하는지, 잠자는 시간 동안 인간의 몸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오만 잡다한 잠자는 방법까지 주제는 다양하나 딱히 전문적이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다. 누군가 자세히 귀담아듣는다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를 대화였다.


“나는 가끔 궁금해요. 잠이 들면 나는 어디에 있는지, 꼭 잠든 그 자리에 고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있을 것 같진 않거든요. 그래서 잠이 여행 같기도 해요. 그 여행이 너무 궁금해서 꼭 한 번 제대로 떠나보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런 얘길 써보려고요.”


순간 움찔하는 두 사람. 태하는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서 놀라고, 수은은 아직 구상을 시작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생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털어놓는 자신에 놀랐다.


“내가 잠이라면… 좀 독특한 얘기를 많이 아는데. 우리 또 만날까요? 혹시 알아요? 내가 그쪽 글 쓰는데 어마어마한 자료를 제공할지?”


갑작스러운 태하의 제안으로 수은의 표정에 언뜻 두려움이 스친다. 더 이상 머물다 간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듯싶었는지, 수은의 책을 계산대까지 가져다준 태하가 안녕을 고했다. 충분히 수은의 향기를 기억했으니, 이제 수은이 어디에 있든 태하는 그녀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언뜻언뜻 수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태하는 마음에 들었다.


“다음 타깃은 바로 너야.”




# 다리 위 … 수은과 진원의 만남



참 이상한 날이다. 언뜻 보면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수은은 그 누구보다 삶에 지켜야 할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다니는 장소도, 만나는 사람도. 근데 오늘은 계속 빗나가는 중이다. 내내 뭔가 불안하고 찜찜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 수은이 서둘러 서점을 나선다. 택시를 탈까 하다, 더 이상 사람과 말 섞기가 싫어 버스에 오른다. 자꾸만 떠오르는 태하의 존재를 떨쳐버리려는 듯 수은이 고개를 휘저었다. 자리에 앉은 수은이 무심한 표정으로 차창 밖을 내다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초점이 점점 사라지더니, 그녀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또 꿈을 꿨다. 사무실로 오던 길에 꿨던 그 꿈과 이어지는 꿈. 똑같은 남자가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서점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아까 그 꿈은 예지몽이었나? 또 한 명의 남자는 뭐지? 이 남자도 곧 만나는 건가?’


흐릿했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지려는 찰나 버스가 급하게 멈춰 섰다. 놀란 수은이 잠에서 깬다. 그런데! 창밖 풍경이…


이미 버스는 한강 다리에 진입한 상태였다. 택시와 잠깐 실랑이를 벌이던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수은이 본능적으로 벨을 눌렀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자, 수은이 뒤도 안 돌아보고 재빨리 내렸다. 그런데 맙소사, 언제부터 다리 위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단 말인가. 20년도 훨씬 전에 다리를 건너본 게 다인 그녀였다. 평소 다리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는 그녀였다. ‘다리’라면 사진조차 보지 않던 그녀였다.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수은이 그대로 정지해 버린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데, 쌩쌩 달리는 차 외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땀이 샘솟았다. 눈에서도 땀이 나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휴대전화를 꺼내 1번을 꾸욱 눌렀는데, 삼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수은의 애타는 마음도 모른 채 현노의 휴대전화는 무음 설정으로 불빛만 깜빡이고 있었다. 현노는 멋지게 차려입고 탱고를 추는 중이다. 마치 해변에서 생애 절정의 순간에 마지막 탱고를 추는 듯한 모습으로.


“엄마! 아빠! 오빠!”


극적인 순간이 되니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삼단 외침이 수은의 입에서 절로 나왔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려는데, 시야에 남자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진원이다. 올려다볼 힘도 없다는 듯 풀썩, 수은이 남자에게로 쓰러졌다. 진원이 수은을 꼬옥 안았다. 버스가 다리에 들어서기 전에 막을 생각이었는데, 굳이 오래 남을 상처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만 여유를 부리다 결국 이 상황을 겪게 만든 것이다. 자책하던 진원이 수은을 번쩍 들어 천천히 조심조심 다리 한쪽에 세워둔 자신의 차로 걸어갔다.



탕감자는 메시지로 관리 대상자가 결정되면, 수면빚이 깨끗하게 탕감될 때까지 대상자의 위기 순간을 미리 알 수 있다.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거나 범죄 사고의 위험에 처한 순간, 그리고 갈취자를 마주하는 순간 같은 게 위기의 순간에 해당했다. 진원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의 불빛이 핏빛에 가깝게 변한 상태였다. 응급실, 침대 옆에 앉은 진원이 땀범벅 눈물범벅이 된 채 기절한 수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정신이 드는지, 수은이 힘없이 눈을 떴다.


“몸에 별 이상은 없습니다. 링거 다 맞으면 집에 가셔도 됩니다.”


의사의 말에 안심이 됐는지, 수은이 스르륵 다시 잠에 빠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링거도 다 맞고 이제 집에 가라는데, 수은은 깨어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난감한 진원은 하는 수 없이 수은을 자신의 상담실로 데려간다.


상담실 한쪽에 마련된 작은 침대 위, 수은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숙면에 빠진 상태다. 진원이 물과 수건을 가져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수은의 얼굴을 닦아준다. 상쾌함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수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이제부터 진원은 수은의 수면제가 될 것이다. 다만 얼마나 심각한 상태일지 진원은 그게 두려웠다. 진원이 수은을 만난 것 자체가 벌을 받는 것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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