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면빚 탕감 Ⅰ
# 그녀가 잠든 사이
‘잠이 저리도 달까. 저리도 달디단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그동안 생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잠든 수은을 바라보던 진원이 상념에 잠긴다.
인간은 평균적으로 생의 3분의 1을 잠을 자는 데 쓴다. 인간이 잠든 사이 뇌를 비롯한 몸속 장기들은 휴식을 취하며 회복의 과정을 거치는데,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일상생활이 불편해지는 것은 물론 면역 기능이 떨어져 각종 질병에 취약한 상태가 된다. 그뿐일까, 고혈압·당뇨·뇌졸중과 심장 질환에 걸릴 위험이 커지고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왜 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책을 읽다가 채팅으로 상담도 하고, 탕감자 동료들과 요즘 자주 출몰한다는 갈취자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다 보니 꼬박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수은이 잠에서 깰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진원은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시간으로 20년 넘게, 벌써 1백 명이 넘는 인간의 수면빚을 탕감했건만 왜 항상 시작은 이다지도 긴장이 되는 건지. 혼자 중얼거리며 서성이던 진원이 거울 속 자신을 보고 피식 웃는다.
사이 스르륵 잠에서 깨어난 수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목청보다 재빠른 손이 그녀의 입을 먼저 막았다.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여본다. 다행히 어디 아픈 곳은 없다. 평범한 사무실 같은데… 서성이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이 남자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으리라. 남자는 뭔가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범행도구로 쓰일 만한 위험한 것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나한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있었나? 아니면 혹시 스토커? 도대체 뭐냐고!’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 몸부림치다가 하마터면 벌떡 일어날 뻔한 자신을 수은이 겨우 토닥여 진정시켰다. 다행히 남자는 창밖의 하늘을 보는 듯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근데 남자의 실루엣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분명 본 적 있는 뒷모습이었다.
‘꿈! 그래 꿈에서 봤다! 앞모습을 본 적도 있는데… 언제 봤더라?’
수은의 눈앞에 병원에서의 풍경이 펼쳐졌다. 남자의 앞모습이 떠오르려는 찰나 진원이 확 돌아선다. 놀란 수은이 눈을 질끈 감자, 그 순간 문이 쾅 열린다.
현노는 수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뒤늦게 확인했다. 평소 수은이 먼저 현노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란 없었다.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직감한 현노가 계속 수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불통이었다. 단잠에 빠진 수은이 어찌 전화를 받을 수 있으랴. 이런 상황을 대비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해 둔 자신을, 현노는 그 와중에 칭찬했다. 현노의 눈이 재빠르게 사무실 안을 훑었다. 수은은 보아하니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다음 타깃은 진원.
“방금 뭘 하려던 참이었나?”
현노에 이어 수은의 시선도 진원에게 향한다. 갑자기 두 사람의 날카로운 눈이 자신을 쏘아보자 당황한 진원이 더듬더듬 설명을 늘어놓는다.
“저는 그때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주저앉아 우는 이 여자분을 발견했죠. 급하게 차를 세우고 다가갔는데, 그 순간 픽, 하고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이분을 제 차에 태우고 서둘러 병원에 갔고 간단히 검사를 했는데 별 이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링거를 다 맞고 퇴원하라는데, 이 여자분이 도통 잠에서 깨질 않으니,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제 사무실로 모시고 왔고… 여기는 보시다시피 제가 운영하는 상담실입니다. 지금은 이 상황은, 여자분이 내내 숙면을 취하시다가 이제 막 깨어난 그런 상황이 되겠습니다.”
진원의 말을 듣는 동시에 현노가 수은을 이리저리 살핀다. 달게 잠을 잔 수은은 그 어느 때보다 편해 보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서로 각자의 입장 정리가 쉽지 않은 듯, 침묵이 이어졌다.
“자네는 내가 앞으로 지켜보겠네.”
이건 또 무슨 소리? 진원과 수은이 어이없다는 듯 현노를 본다. 온화한 표정을 짓던 현노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얼굴이 매서워지더니 눈이 찢어질 듯 수은을 노려본다.
“아, 왜! 또!”
“내가 너 몇 시간 전에 서점에서 어떤 남자랑 수다 떠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제보를 들었거든? 그 사람 누구야? 이 남자야?”
“뭐? 아직도 나 미행해?”
“미행은 무슨… 제보를 들었다니까, 제보!”
두 사람의 싸움에서 자신이 제외되자 팔짱을 끼고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진원의 표정이 수은이 남자와 한참 수다를 떨었다는 대목에서 굳어진다. 이번엔 두 남자가 동시에 수은이 마치 큰 잘못이라도 했다는 듯 쳐다본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야!’
수은이 현노를 이끌고 상담실을 빠져나오려다 멈칫하더니 두리번거린다. 그런 수은을 진원이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자, 눈치 빠른 현노가 수은의 손에 진원의 명함을 쥐여준다. 이래서 삼촌은 삼촌인 건가? 더욱 민망해진 수은이 상담실 문을 닫으며 속사포처럼 인사를 남겼다.
“내일 꼭 연락할게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너 절대 혼자 오면 안 돼. 알겠어? 여기 너무 외진 곳이잖아!”
현노는 고맙다는 말은커녕 끝까지 진원을 경계했다. 두 사람이 나가자, 상담실에 갑작스럽게 고요가 찾아왔다. 진원의 입에서 안도의 숨을 뿜어져 나왔다.
“앗, 계약서!”
계약서만큼은 칼같이 보고해야 하는 게 또 이들의 세계다. 글자와 문자에 집착한다고나 할까. 첫 만남의 날짜를 조작하거나 또 다른 상황을 꾸며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진원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은은 첫 만남부터 쉽지 않은 여자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수은은 진원에게 벌이니까. 결코, 쉽지 않은 상대임이 분명했다.
대로 한 복판, 좀 전과 반대의 상황으로 이번에는 수은이 현노의 팔에 이끌리듯 끌려가고 있다. 수은이 현노의 잔소리에 지쳐가는 중이다.
“남자가 필요해? 시집가고 싶어? 그렇게 하랄 때 안 하더니 이제 서야 연애가 하고 싶니?”
“삼촌!”
수은이 소리치듯 현노를 불렀다.
“그래, 말 한번 잘했다. 내가 네 삼촌이다. 알기는 아는구나.”
그래도 오늘은 이쯤에서 끝이 났다. 집까지 따라 들어올 줄 알았던 현노는 현관문 앞에서 수은이 들어가는 걸 보고 돌아섰다. 아니다. 이건 문밖의 상황을 모르는 수은의 상상이다. 실상은 달랐다. 수은이 현관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리자 현노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수은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살고 있기는 한데 세상을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대상 정도로 생각했다. 수은의 집에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한 현노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저게 언제쯤 사람을 사람으로 볼지…”
고요한 밤. 수은은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집안을 둘러본다.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변함없이 환하게 웃고 있다, 액자 속에서. 이 집에서 같이 살았던 가족임에도 수은은 이들 존재가 낯설었다. 이제 같이 산 세월보다 홀로 산 세월이 더 길어서이리라. 오늘만큼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수은이 집안 곳곳을 활보한다. 그런데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엄마의, 아빠의,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은이 움찔하며 귀를 막는다.
‘오늘은… 오늘은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 모처럼 좀 잤으니까’
슬며시 귀에서 손을 뗀 수은이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린다.
빛에 테두리를 그리고
주위를 맴도는 난
그 달이 될게요
백아 노래, <테두리> 중 ♬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걸 아는 몸의 철저한 대비랄까. 수은은 책상 앞에 앉기 전에 꼭 스트레칭을 했다. 찬물 한 컵을 벌컥벌컥 들이켠 수은이 책상 앞에 앉는다. 새롭게 생각한 이야기, 두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할 참이다. 성격과 버릇, 직업과 말투까지 생각나는 대로 적은 메모지를 텅 빈 메모판에 붙였다. 만화 이미지 중 연상되는 두 남자의 이미지를 찾아 프린트해서 붙이고 나니, 서서히 동이 텄다. 어쩐지 그녀에겐 두 남자 모두 애틋했다.
“진수은, 너는 누가 더 좋아?”
자신이 말해놓고도 민망한지, 수은이 도망치듯 작업실을 빠져나간다. 홀로 남겨진 수은의 질문이 메아리치듯 집안을 맴돈다. 수은이 꾸며놓은 두 남자, 누가 봐도 태하와 진원이다.
# 쌍방 계약
오랜만에 푹 잔 탓인지 수은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작업도 잘 진행됐다. 근데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수은이 듣는 사람도 없는데 또 혼자 중얼거렸다.
“그 남자가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약속이라도 할 걸…”
수은은 무작정 옷부터 챙겨 입었다.
“작품을 쓰다 보니 궁금한 게 생겨서 가는 거지? 설마 그 남자가 궁금하다거나 보고 싶은 건 아니지?”
마음이 결론을 내리지 못해 지지부진한 사이, 이미 수은은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생각보다, 마음보다 행동이 빨랐다. 평소와 달리 그냥 몸이 먼저 움직이는 자신이 수은은 신기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태하를 처음 만난 곳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수은이 자리를 옮겼다.
“다른 코너에 있을지도 몰라.”
지치지도 않는지 수은이 그 큰 대형 서점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싶어, 수은은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서점을 서성였다. 서점만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아 서점 바깥도 시간을 달리해가며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그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내일부턴 나가지 않을 거야.”
굳게 다짐하며 터덜터덜 집 근처에 다다른 수은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사실 그 시선은 서점에도, 서점 안 카페에도, 서점 밖에도 있었다. 수은이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시선의 주인공은 태하였다. 태하는 자신을 애타게 찾는 그녀를 보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간절해지라고… 근데 왜?”
태하는 수은의 잠을 갈취하면 그뿐이었다.
“너 뭐 하는 거냐?”
태하는 자신의 마음이 우스웠다.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우습거나 말거나,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게 좋았다. 그녀의 향기는 너무 달콤했다. 있지도 않은 옛 추억이 떠오를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약속대로 수은은 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후에 진원의 상담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두 사람은 대본도 없이, 상대역도 없이 각기 다른 장소에서 맹연습을 시작했다. 태하를 만나지 못해 우울해하던 수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상태다. 꿈속에 나타난 남자가 둘이었듯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자도 둘이다. 한 사람이 태하를 닮았다면 다른 한 사람은 진원을 닮았다. 머릿속이 온통 새롭게 시작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수은의 눈에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보였다. 진원을 만나면 무엇부터 물어볼지, 어디까지 물어볼지 수없이 반복하며 연습 중이다.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고!
진원 역시, 시작의 설렘을 만끽 중이다. 분명 벌칙과도 같은 과업인데, 이상하게 수은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졌다. 일주일 넘게 수은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 진원은 몹시도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휘파람을 불며 청소하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자, 진원이 잠시 멈칫한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 여자를 설득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하지? 이 방법이 나을까? 아니면 이 방법이?”
서둘러 청소를 끝낸 진원도 다시 대본 없는, 상대역도 없는 연극 연습을 이어갔다.
수은이 진원의 상담실에 도착했다. 그녀의 모습은 첫 만남의 흐트러진 모습과 딴판이다. 자신을 도와준 것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모습이 상냥하기까지 했다. 수은을 만나는 순간까지 고민에 빠졌던 진원이 결심한 듯 상담실 옆 방으로 수은을 데려갔다. 다행히 수은은 낯선 공간임에도 별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방 안은 소리를 만드는 다양한 물건과 소리를 제대로 듣는 장비들로 빼곡했다.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수은에게 진원은 이 공간이 자신의 진짜 일터라고 소개했다. 수은의 눈에 반짝 빛이 서렸다. 보면 볼수록 진원은 자신의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제격이다. 다시 수은을 상담실로 데려오고도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진원이 고민 끝에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제가 수면과 소리의 연관성에 관해 연구 중인데, 한 번 참여해 보실래요?”
“수면이면 잠?”
수은이 반응을 보이자, 진원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연구 내용을 풀어놓으면 풀어놓을수록 수은과 진원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진원과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수은이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지금이 타이밍이야! 진원이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수은에게 내밀었다. 삼촌과 쓴 계약서가 전부였던 수은은 별 의심 없이 계약서를 쓱 보더니 바로 서명하려는 듯 펜을 집어 들었다. ‘이 여자 참 큰일 날 여자야.’ 수은의 허술한 면모가 지금은 도움이 되겠지만 언젠가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나중을 생각하니 진원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데, 쉽게 사인할 것 같았던 수은이 갑자기 고개를 세차게 내젓더니 날카로운 눈빛을 장착하고 진원을 바라봤다.
“조건이 있어요.”
작품을 쓰기 위해 꼭 필요한 취재였는데, 하마터면 수은은 자신에게도 요구 조건이 있었다는 걸 잊을 뻔했다. 진원을 설득하기 위해 그토록 연습했는데… 당황한 진원을 안심시키려는 듯 수은이 씽긋 웃어 보이고는 난데없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저는 사실 스토리를 짜는 작가예요.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네요. 무튼, 이야기 소재를 다양한 곳에서 얻곤 하는데 이번엔 좀 남달라요. 꿈에서 소재를 찾았거든요. 근데 신기한 게 뭔 줄 알아요?”
진원은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도대체 어디서 만났는지 생각이 안 나서 답답했는데, 갑자기 꿈이 생각난 거예요. 그런 경험한 적 있어요? 꿈속에서 만났던 사람을 현실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 암만 생각해도 당신이랑 꿈속 남자가 너무 비슷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의 모델이 되어주지 않을래요?”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전혀 예상치 못한 수은의 반응에 진원이 당황한다. 진원의 표정을 살핀 수은이 안 되겠는지 작전을 변경한다.
“쌍방 계약을 하자는 거예요. 서로의 작업에 서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요?”
수은이 준비해 온 계약서를 진원에게 내민다. 쌍방 계약이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수은의 수면빚을 탕감하기 위해 진원이 일방적으로 수은을 돕는 상황이었다. 잠 못 들며 괴로워했던 그녀의 이전 삶을 보상하기 위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적으로 그녀만을 위한 일이었다. 그런데 조건을 걸다니, 그것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제안을 하는 수은 때문에 진원은 헛웃음이 났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은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진원이 창가로 향했다. 그가 창문을 열자, 허공에 탕감자들의 메시지가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그의 마음도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인간의 표현을 빌자면, 이런 것이 맺히면 한이 되려나.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진원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녀의 제안에 화가 나는 것인지 슬픈 것인지 섭섭한 것인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마치 자신이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수은의 모습이 진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원이 마음을 닫아걸자, 메시지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결심한 듯 수은에게 다가간 진원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정말 괜찮겠지?’
진원은 어쩐지 이 순간을 죽도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진원이 사인한 계약서를 내밀자, 수은도 진원의 계약서에 사인했다.
“기념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까요?”
훅 다가온 수은이 진원과 계약서를 든 채 셀카를 찍었다. 사진 속 수은은 미소를 지은 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고, 진원은 그런 수은을 바라보고 있다. 도대체 이 여자는 뭘까.
# 현실은 대놓고 스토커
“악! 악! 악!”
답답한 듯 수은이 벽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울려 사는 듯 보이지만 세상에 자신 혼자만이 존재한다는 듯 자유롭게 살던 수은은 지금 혹을 하나 달고 있다. 자신은 늘 같은 패턴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몇 번을 강조했지만, 최소 일주일은 따라다니겠노라 진원은 통보했다. 그리고 정말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를 따라다녔다.
진원이 파악한 수은의 패턴은 대략 이러했다. 일주일에 한 번 사무실 회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낮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책 읽고 영화 보고 종이 접고 색칠하고 피아노 치고 필사도 했다. 정말이지 신기한 건 그녀가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는 거였다. 집 안 곳곳이 그녀가 하던 것들이 널려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녀는 청소를 했다. 몹시 지독하게, 세상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을 것처럼 박박. 그리고는 배치를 달리했다. 그게 무엇이든.
진원이 묻지 않고 넘길 수 없는 게 하나 더 있었는데, 우렁각시라도 있는 듯 수은의 집에는 생필품을 비롯해 식재료는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본인한테 물어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했기에 진원은 사무실 직원과 안면을 트고 대놓고 물어봤다.
“아, 그거요. 저희 대표님이 채워놓는 거예요. 작가님이 밖에 돌아다니는 사이 몰래 들어가서요. 작가님 취향 제일 잘 아는 것도, 필요한 걸 제일 잘 아는 것도 저희 대표님이세요. 참, 대표님이 작가님 삼촌인 건 아시죠?”
진원은 이 모습을 꼭 한 번 숨어서 보리라 다짐했다. 삼촌 현노는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진원이 결론 내린 그녀의 일상 중 가장 문제적 시간은 바로 밤이었다. 수은은 밤이면 마실을 나섰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슷한 느낌, 비슷한 조건의 환경이지만 매번 다른 곳으로 마실을 나섰다. 어떻게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지 신기할 정도랄까. 장르도 다양하게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고,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서점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는 24시간 운영하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글을 썼다. 어디든 들고 다니는 그녀의 수첩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여자 혼자 밤을 오롯이 밖에서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어두컴컴한 길만 그런 게 아니었다. 장소에 따라 위험 요소는 다양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 상황도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인지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렇다 한들 계속 이렇게 다니게 놔둬도 될지 심각하게 고민이 되려는 찰나, 진원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수은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를 지키는 존재가 있었다. 삼촌 현노가 수은을 혼자 그냥 둘리 없었다.
수은을 따라다니던 중 진원은 몇 번이나 의심되는 존재를 감지했다. 인간의 잠을 갈취해 인간을 재우고 그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 그러다 결국 인간의 수명을 빼앗아 버리는 갈취자. 수면이 부족한 상태일수록 잠을 재우기가 쉬웠고, 오래 재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수은은 그야말로 거저먹는 꿀떡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수은이 그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그녀를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진원의 마음이 급한데 수은은 너무 천하태평 했다.
여섯째 되던 날, 진원은 기어이 갈취자와 마주쳤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잘 따라다녔는데, 방해하지 않고 잘 따라다닌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겐 진원이 따라다니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그가 허공에 뜬 공지 사항을 확인하는 사이, 수은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행히 손목의 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아 헤매던 중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수은을 발견했다. 인간인 듯 보여 말을 걸려는 찰나, 남자가 위험신호를 감지했는지 진원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갈취자였다. 그런데 손쓸 틈도 없이 갈취자는 사라졌다.
“뭐지? 이토록 가까워질 때까지 왜 감지 못했지? 그보다도 왜 안 잡히냐고! 이런 특별한 존재가 있었던 거야?”
하필 역광 때문에 갈취자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낭패였다. 이런 진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은이 진원을 발견하자마자 소리를 질러댔다.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 이 스토커야!”
황급히 자리를 뜬 갈취자는 태하였다. 태하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탕감자가 이토록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자신이 왜 몰랐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만 모른 게 아니었다. 상대 역시 자신을 인지하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을 잡을 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다행인 건 자신이 어떤 인간에 기생해 있는지 역시 탕감자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들켰다면 태하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한 태하가 테스트 대상을 물색한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향기를 채취하는데, 탕감자가 느껴졌다. 수은과 있을 때와는 분명 달랐다. 수은의 잠을 관리하는 탕감자가 있었음에도 수은에게선 그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하는 또 한 번 테스트를 감행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인은 두 가지로 좁혀졌다. 그 여자와 자신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게 형성되었거나 탕감자 중에서도 유독 그 존재가 자신에게 힘을 쓰지 못하거나. 둘 중 어떤 게 진실일까? 태하는 몹시 궁금했다. 수은은 향기로 찾을 수 있고, 그 탕감자 역시 분명 수은의 주변에 있을 테니 둘 다 만나는 건 이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떤 진실을 먼저 확인하는 게 좋을지 태하는 그게 고민이었다.
퇴근한 이설이 벌컥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자, 길거리를 서성이던 태하가 갑자기 사라졌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설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안방 문을 열었다. 엄마는 고요히 잠들어 있다.
밤새 이렇게 돌아다니면 분명 날이 밝기 전에 쓰러질 게 뻔한데 수은은 그렇지 않았다. 인간이 살면서 만들어내는 오만가지 소리가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나마 집이 조용할 텐데, 그녀는 왜 어두컴컴한 밤에 집을 나서는 것일까. 집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이다. 아직 그녀를 위한 소리를 완성하지 못했기에 진원은 밝은 낮이라도 졸고 있는 그녀 곁을 지켰다. 예외의 순간을 목도 한 이상, 그 어떤 순간도 소홀히 하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을 지키려는 듯 앉은 채로 잠든 진원을 잠에서 막 깬 수은이 바라보고 있다. 사실 진원은 잠든 게 아니라 휴식 중이다. 수은이 무안할까 봐 자는 척할 뿐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하는데, 그녀의 시선이 진원에게 머무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이 사람은 대체 뭘까. 가족도 친구도 그 무엇도 아닌 이 사람, 연구한답시고 이렇게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이 사람. 뭔지 모르겠지만, 그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녀 자신보다 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도 그것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뭘까.
‘아니, 잠깐! 근데 언제 이 사람을 집안으로 들였는지 기억이 없는데… 왜 없지? 왜 없냐고!!’
진원과 수은은 서로에 대해 알 수 없는 적대감과 알 수 없는 친근감으로 혼란스러웠다. 수은이 거칠게 진원을 흔들어 깨우자, 진원이 누가 봐도 어색하게 기지개를 켜며 짜증을 부렸다.
상담실로 돌아온 진원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수은의 잠을 방해하는 요소를 전부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마주친 그 갈취자가 문제였다. 자신은 갈취자가 가까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갈취자를 잡지도 못했다. 진원은 즉시 상부에 보고했다.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건지, 수은에게 특별한 뭔가가 있는지, 그도 아니면 갈취자 중에 특별한 존재가 있는 건지 진위 여부를 조사해 달라는 보고였다. 아마도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수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진원은 바라고 또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