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관계의 변화 Ⅰ
# 드러나는 문제의 실체
진원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쪽 벽을 바라보고 우두커니 서 있다. 어느새 벽면은 수은에 관한 기록으로 가득 차버렸다. 일주일 동안 스토커란 소리까지 들으면서 진원은 그녀 주변의 소리란 소리는 죄다 수집했다. 어떤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수은의 모습까지 꼼꼼하게. 그녀는 확실히 남들보다 소리에 예민했다. 그렇다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극한의 고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익숙한 듯한 공간에 다닌다는 느낌을 받은 것도 역시 소리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시급하게 진원이 알고 싶은 건 밤사이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를 못 견디게 해서 집 밖으로 몰아내는 요소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생각에 잠긴 진원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문 쪽을 바라본다. 조금 있으면 수은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시각, 수은이 집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진원이 상담실로 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집에 있기도 싫었고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그래서 고분고분 그의 말을 듣는 참이다. 수은이 덜컹 현관문을 열자, 골목 저 멀리서 그녀의 집을 주시하던 누군가가 재빨리 몸을 숨겼다. 태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은이 무심코 태하 곁을 지나쳐 걸어간다. 태하는 수은이 느낄 수 없게 떨어져서 걸으며, 차곡차곡 또 다른 그녀의 향기를 수집했다. 수은과 함께 걷다 보니 탕감자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 역시 탕감자들에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역시 수은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듣도 보도 못한 경우라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는 게 좋을지, 태하는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은이 걷다가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멈춰서 돌아보긴 했는데 그뿐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텅 빈 거리일 뿐인데… 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멈춰 서 있던 수은이 다시 걸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녀의 생각은 구상 중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여자 주인공이 잠들어야 남자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는 설정은 뭔가 부족했다. 주인공이 쉽게 만나선 안 된다. 쉬운 만남은 이야기를 진행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자가 잠이 들어야 남자가 나타나고, 대신 남자가 나타날 때 여자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래, 이거야!’
막혔던 이야기 설정 하나가 풀렸다고 수은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환호했다. 그때였다. 끼익, 이대로 세상이 끊겨버릴 것 같은 큰 굉음이 들렸다. 생각에 빠진 그녀가 보행신호가 켜지지도 않았는데 건널목에 발을 들인 탓이었다.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그녀를 향해 삿대질하며 시원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근데 나 방금 뭔가 본 것 같은데…”
수은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얼핏 누군가를 보았다. 그 누군가는 그래, 맞아! 분명 태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녀는 혼자였다. 정말 그였다면 왜 숨는단 말인가. 기대감에 붉은빛이 감돌던 수은의 볼이 다시 핏기 없는 본래의 상태로 바뀐다.
“작가라더니, 이야기에 푹 빠져 산다더니,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더니, 세상이 무슨 이야기 배경인 줄 아나!”
하마터면 사고가 날뻔했다. 눈앞에서 그녀를 잃을 뻔한 것이다. 태하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를 만나면 자꾸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왜 죽을 뻔한 그녀보다 자기 심장이 더 뛰고, 식은땀까지 샘솟는 걸까. 태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욕심 때문이리라. 수은이 자신에게는 방패와도 같은 존재임이 명확해졌으니까. 어딜 가나 했는데 그녀가 도착한 곳은 진원의 상담실이었다. 가깝게 탕감자의 기운이 느껴지자, 태하가 발걸음을 돌렸다.
진원의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수은은 태하를 찾는 듯 계속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이윽고 진원의 사무실 문 앞에 다다른 수은이 숨을 고르는데, 인기척을 느낀 진원이 벌컥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요.”
그 바람에 수은이 놀라 주저앉았다.
“뭘 좀 찾을 게 있어서….”
조금 전 죽을 뻔했던 순간 피어올랐던 긴장감이 그제야 나타난 듯했다. 당황한 진원의 얼굴이 눈앞에서 점점 뿌옇게 흐려지더니, 결국 수은은 쓰러졌다.
‘나는 왜 자꾸 이 사람 앞에서 정신을 잃는 거지? 아닌가? 잠에 빠져드는 건가?’
수은은 기절하는 와중에도 의문이 들었다.
상담실 옆에 마련된 진원의 작업실. 기절을 핑계로 짧게나마 단잠에 빠졌던 수은이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진원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수면빚 탕감의 두 번째 단계, 상담을 할 차례였다.
“수은 씨 주변에서 채집한 소리와 연관성도 체크하고, 동시에 스토리를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에요.”
작가에게 개연성은 꼭 지켜야만 하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탓에 진원은 그녀에게 무언가 제안하려면 철저한 논리를 바탕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녀가 상담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진원은 상담 장소를 사무실 대신 작업실로 변경했다. 그런데 왜 자신이 그녀에게만 이렇게 특별 대우를 하는 건지… 진원은 앞으로 다른 이들에게도 지금처럼 하리라 다짐했다. 그럼! 그녀만 특별한 건 아니니까.
“가능한 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과거에서 현재로도 좋고 현재에서 과거로도 좋고, 뒤죽박죽이어도 좋아요. 되도록 빠지지 않고 들려줬으면 좋겠어요.”
수은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업실에 거부감이 없는 듯 해 다행이었다.
“나는 10월에 태어났어요. 오빠가 있었고.”
열심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수은의 뒤로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모습이 펼쳐졌다. 진원의 눈에만 보이는 이미지였다. 이렇게라도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수은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듣다 보니 어쩐지 낯설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 14살 10월에서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멈췄다.
“그때 나는 혼자가 됐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벌써 날이 어둑해졌다. 두 사람이 상담을 마치고 나오다 문 앞에서 이설과 마주친다.
“상…담을 하고 싶어서 왔는데… 예약…을 했어야 했나…요?”
여긴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이설이 작업실을 기웃거리자, 진원이 문을 쾅 닫아버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수은이 서둘러 인사하고 건물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진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멀어져 가는 수은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설의 시선은 그런 진원에게 고정되어 있다. 이설은 어쩐지 기분이 상해버렸다.
“누구예요? 환자?”
환자라는 말에 진원의 눈썹이 움찔했다. 답하기 싫다는 진원의 생각이 너무 강하게 전달돼 이설은 더 묻고 싶지만 참는다. 진원이 상담실로 들어가자, 이설이 문이 닫힐세라 후다닥 따라 들어간다. 진원이 혹여 자신을 내보낼까 싶어, 이설은 서둘러 취재 이야기를 꺼냈다.
“직접 사례자 상담하는 과정을 보고 싶은데. 혹시 양해를 좀 구해줄 수 있나요?”
진원이 단칼에 거절했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시죠. 강이설 씨 같으면 자신이 상담받는 과정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나요?”
진원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한없이 까칠한 상태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상담 받고 싶어서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당신이 상담받는 과정을 기사로 쓰는 건 어때요?”
“아… 그…그러면 되겠네요. 어차피 익…명으로 할 거니까…”
멋쩍음에 이설이 바로 수긍해 버렸다. 모처럼 엄마 얘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서 부리나케 진원을 찾아왔는데… 그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이설은 속마음을 감춘 채 기사를 쓰기 위해 부족했던 취재를 이어갔다.
고요한 이설의 집. 덜컹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방안에서 문손잡이를 애써 돌려보지만, 문밖으로 굳게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끄떡도 하지 않는다. 이설의 엄마가 작게 흐느끼기 시작한다. 온 힘을 다해 계속해서 흔들어도 문이 열리지 않자, 울부짖는 소리가 귀를 찌를 듯 커진다. 그 순간, 작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장가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아줌마, 그새 또 나를 부른 거야?”
이설의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방안은 텅 비어 있다. 태하는 휘파람을 불며 집안 곳곳을 제 집인 양 돌아다녔다.
이설이 엄마는 까맣게 잊은 채 밤늦게까지 기사 정리에 몰두한다. 그러는 사이 태하는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다. 수은의 책이다.
맙소사,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문득 시계를 보고 놀란 이설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미친 듯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면서 엄마를 불렀다. 손이 떨려서 자물쇠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어렵사리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넋을 놓고 앉아 있는 엄마가 보였다. 이설이 조용히 엄마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는다. 그 순간 집 안 구석에 놓인 화분의 풀잎 하나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뭔가 방금 화분을 건드린 것처럼, 누군가 집안에 머물렀던 것처럼. 그 소리에 놀란 이설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안함을 느낀 걸까. 대부분 먼 곳을 향해있던 엄마의 시선이 모처럼 이설에게 닿았다. 엄마가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엄마 물줄까?”
엄마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할 게 없는데도 어쩐지 이런 순간은 이상하게 서두르게 되곤 했다. 서둘러 주방으로 나온 이설이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손을 뻗어 컵과 물병을 챙겨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필 이설이 챙긴 건 투명 플라스틱 컵이었다. 그녀는 컵과 엄마를 번갈아 쳐다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결심한 듯 컵에 물을 콸콸 따라 엄마 손에 들려줬다. 무심코 컵을 받아 든 엄마가 물을 마시려다 투명하게 찰랑이는 물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더니 컵을 던져버렸다. 무표정이던 엄마의 얼굴에 점점 두려움이 깔리더니 급기야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이설이 엄마를 진정시키려는 듯 다가가 안으려 했지만, 엄마는 강하게 뿌리쳤다. 방바닥에 흥건해진 물 때문에 이설이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만다. 하필 그때 구급차가 지나가는지 귀가 따갑도록 사이렌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오열하던 엄마는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미안해 엄마.”
힘없이 축 늘어진 엄마를 이설이 꼭 끌어안았다. 조용히 흐느끼는 이설의 눈에서 오래도록 눈물이 떨어졌다.
며칠 뒤, 진원의 상담실. 수은과 진원이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다. 수은은 무리한 부탁을 해온 진원 때문에 화가 났고, 진원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 독하게 마음을 먹은 참이다. 수은은 현노 외에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적이 없다. 지난번 그녀가 잠든 사이 진원이 집에 함께 머물긴 했지만 그건 낮이었다. 특히 밤은 예민한 시간인데, 하필 진원이 밤에 그녀의 집에 함께 있겠단다.
“밤이 더 소리를 담기에 좋은 시간이란 말이에요! 협조하기로 했잖아요!”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의 몸 상태가 아니고선 수은은 어지간해선 밤엔 집에 머물지 않았다. 그래서 난감했다.
“뭐가 두려운 거죠? 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수은이 진원을 빤히 바라봤다.
‘언제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존재가 된 거지? 설마… 정말로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니?’
진원 역시 수은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어째서 이런 말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지. 진원이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지 애써 떠올리는 사이, 수은이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왔다 갔다 정신 사납게 서성였다. 그녀는 진원을 만난 뒤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생각했다. 소리를 조금 다르게 느끼는 거? 아직 수면장애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글 진도 역시 그다지 나가지 못했다.
‘그래, 글! 쌍방 계약 관계라는 걸 잠시 잊었어!’
수은은 조금 더 고민하는 척하다 진원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절대 서두르지 말고 딱 해 질 무렵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한 시라도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상담실 문을 나서던 수은이 또 문 앞에서 이설과 마주친다. 이설이 싸늘한 눈빛으로 수은을 바라본다. 두 번밖에 마주치지 않았는데, 수은은 이상하게 이설이 신경 쓰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설의 눈빛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이설에게 수면빚이 더 이상 쌓이지 않게 도와주려 마음먹은 진원이었지만, 그런 상황이 왜 늘 이런 순간인지 진원은 찜찜했다. 멋쩍게 서 있던 이설이 이번에도 진원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싶어 서둘러 얘기를 시작한다. 진원에게만큼은 어쩐지 속 편하게 엄마 얘기를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엄마는, 엄마는… 여러 번,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어요. 집 밖을 나가는 게 위험해서 집에 가둬…둔 상태고. 어떤 치료도 소용없었어요. 지금은 그저 약만 꾸준히 먹는 상태고, 가끔 병원에 가요. 엄마가 이렇게 된 건, 20년도 훨씬 전부터예요. 내가 여섯 살 때 가을, 그러니까 10월 어느 날. 어젯밤에도 엄마가 발작을 일으켜 너무 무서웠어요.”
진원이 얘기를 잘 듣고 있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왜 그렇게 되셨는지, 이유를…”
“사고가 있었어요. 그때 다리가 무너졌거든요. 진원 씨는 아마 기억 못 하실지도 몰라요.”
진원이 다리, 라는 말에 수은을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떠올렸다. 다리 위에서 사시나무 떨듯 괴로워하다 정신을 잃던 수은의 모습을…. 그러고 보니 수은이 조금 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다 멈춘 시점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 오해
이설의 얘기를 듣고 나자, 진원은 수은과 이설의 엄마가 어쩌면 같은 사고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수은의 수면빚을 탕감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임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진원은 두 가지 방법으로 소리를 제조했다. 자연의 소리를 여러 가지 섞어 마치 자연과 함께 머무는 듯한 느낌이 들게도 했고, 기본적으로 의뢰자가 좋아하는 음악에 잠을 유도하는 인위적인 소리를 얹기도 했다. 수은의 경우, 후자를 선택했다. 너무 많은 소리가 뒤섞이면 그녀는 더 괴로워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는 걸 포기하고 그가 만들어준 소리를 하나하나 분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에게 소리를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수은의 예민함 코드와 맞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수은이 냄새에 민감했다면, 그랬다면 그녀는 다른 탕감자에게 배정되었을 것이다. 수은과 필연임을 입증하려는 자신의 마음이 진원은 당황스러웠다. 이리저리 널뛰던 생각은 엉뚱하게도 벌로 만난 수은이 자신에게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왜일까.
녹음기 하나만 달랑 챙긴 진원이 집을 나섰다. 어쩐지 설레고, 어쩐지 두려웠다. 수은의 집에 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때문에 길을 잘못 든 데다, 퇴근길 정체까지 더해져 진원은 그만 약속 시간을 넘겨버렸다. 그 덕에 어둠을 견디지 못한 수은은 결국 집 밖으로 나왔다. 약속 때문에 어디 멀리 갈 수도 없어 수은은 집 주변을 서성였다. 현노가 미행을 붙여놓은 사람이 그런 수은을 살폈고, 수은의 모습은 시시각각 현노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태양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듯 어둠이 깔린 뒤에야 진원은 수은의 집에 도착했다. 수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자꾸 미루면 수면빚 탕감만 늦어질 뿐이었다. 두 사람이 현관문 앞에 다다른 그때, 그녀의 집안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설마 도둑?’
‘설마 벌써 갈취자?’
놀란 듯 허공에서 방황하는 수은의 손을 진원이 재빨리 잡았다.
“괜찮아요. 내가 있으니까.”
찰칵, 진원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수은의 모습이 현노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됐다. 현노가 그 사진을 보고 놀란다.
“치료한다더니 밤에! 감히! 집에 같이 들어가? 이 자식이 미쳤나!”
밤이 되어 불을 켜니, 그녀의 집은 낮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가족사진을 비추는 등은 수명을 다했는지 꺼져있었다. 진원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단란해 보이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어쩌다 한 사람만 남겨두고 떠난 걸까. 무너진 다리와 상관있는 걸까. 진원이 마음이 조급해져 돌아서는데, 수은이 손전등을 자신의 얼굴에 비춰 짓궂게 장난을 친다. 놀란 진원이 휘청거리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그녀는 꽤 오래 깔깔거리며 웃었다. 민망해하던 진원도 그녀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은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수은이 작업실 책상 앞에 앉았다. 진원이 수은을 따라 맞은편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그새 이야기가 꽤 진전됐는지 메모가 늘었다. 진원이 녹음기를 켰다.
“자, 시작해 볼까요?”
“그럴까요?”
수은이 노트북을 켠 뒤 계약서를 흔들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쌍방계약이잖아요. 설마 잊은 건 아니죠? 오늘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차례라고요.”
수은은 꽤 집요하게 진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이 쉴 새 없이 이어져 자신이 제대로 대답하고 있는지 진원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전에 계약서를 쓰고 이런 순간이 다가오면 말하려고 미리 생각해 뒀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거짓말이 탄로 날 뻔했다.
“부모님이 있고, 여동생이 있어요. 모두 멀리 미국에 살고 있어서 자주 볼 순 없고. 사진 찍는 걸 다들 끔찍하게 싫어해서, 이유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사진이 없네요. 보여주고 싶은데.”
“소리엔 어떻게 관심 두게 된 건가요? 잠은요? 공부는 어떻게 했나요? 아, 그동안 치료한 사람들 얘기도 들려주세요. 특기 같은 것도 궁금해요.”
“하나씩 물어보면 안 될까요? 짧은 얘기도 아닌데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보면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나 어디 안 가니까 하나씩 물어봐요.”
“미안해요, 마음이 급해서. 하하하”
진원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 앞에선 왜 자꾸 진실을 말하려 하는 걸까. 하마터면 소리로 사람을 재울 수 있는 능력과 그 사람의 위험 또한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을 뻔했다. 매 순간 그녀 앞에선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수은은 만족한 얼굴이었지만 진원은 아니었다.
“다시 만나야죠, 우리. 내 상담실 말고 여기 당신 집에서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내일 어때요? 마침, 밤새도록 비도 온다는데. 그럼, 밤 마실 가기 좀 그럴 거잖아요?”
그녀와 동행한 시간만큼 진원은 수은에 대해 아는 게 많아졌다. 원하는 걸 얻어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진 수은이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너무 바쁜 진원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이설이었다. 엄마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니 시원해서, 이참에 좀 더 가까워져 볼까 하고 기획 기사까지 준비해서 진원을 찾아갔건만 번번이 상담실은 비어 있었다. 게다가 진원은 연락도 잘되지 않았다. 상담실 운영이 설마 취미는 아닐 거라고, 이설은 애써 차오르는 의심을 싹둑 잘라냈다.
“오늘은 절대 그냥 못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멀리 진원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먼 거리였는지, 진원은 이설이 불러도 듣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뭐야! 나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 거야? 도대체 또 어딜 가는 거냐고!”
이설은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진원의 뒤를 밟았다.
현노가 조용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 사진을 보고 있다. 아주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이라는 듯, 넘어질 뻔하다 겨우 중심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수은을 만나볼 참이다.
“그놈과 도대체 무슨 사인지, 정확하게 뭘 하는 놈인지. 지금 둘이 뭘 하자는 시츄에이션인지! 내가 삼촌인데 물어볼 수 있지! 암, 물어봐야지!”
현노도 수은의 집으로 가는 중이며, 진원도 수은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거기에 이설이라는 혹까지 달고. 아무것도 모른 채 수은은 집에서 또 어스름한 어둠과 씨름 중이었다. 붉은 기운이 다 빠진, 다채로운 남색이 가득 채운 하늘은 어릴 때부터 수은이 참 좋아하던 시간과 하늘인데, 도대체 왜 무서워하게 된 건지, 오랜만에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수은의 집, 엘리베이터. 이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데, 수은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이설은 진원이 혹시 자신을 발견할까 봐 도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진원이 집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이설이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살금살금 수은의 집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뭔가 들릴 거라는 확신이 있다는 듯 이설은 수은의 집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수은의 집 앞에 있음을 감지한 현노가 조심조심 다가갔다. 그 누군가가 진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라는 걸 깨닫자, 현노가 당황한다. 이 상황은 또 뭘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현노의 마음이 복잡해진다. 들리지도 않는데 엿듣기에 집중하던 이설이 뒤늦게 현노를 발견하고 놀라 주저앉는다. 이설이 뭔가 변명을 하려는데, 현노가 입 다물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이설을 조용히 계단 쪽으로 이끈다.
“당신은 누구실까요?”
그러자 이설이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세요?”
어이없어 웃음이 났지만 현노는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이 집 주인의 삼촌이라면 설명이 될까요?”
그제야 이설이 방긋 웃으며 누가 봐도 잘 보이려는 듯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저는 이 집 주인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 절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말문이 막힌 현노에게 억지로 명함을 쥐여준 이설이 쌩하니 사라진다. 다시 수은의 집 현관문 앞에 선 현노. 방금 전의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 벨을 누르지 못하고 서성이던 현노는 결국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 밖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은과 진원, 두 사람은 평온했다. 쉬이 꺼낼 수 없는 얘기라는 듯 여러 차례 호흡을 고르던 수은이 지난번 들려줬던 열넷, 가족과 헤어진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고 무렵 저는 쓰러졌어요. 그러니까 사고로 부모님과 오빠는 다른 세상 사람이 된 거고. 깨어나 보니 옆엔 삼촌밖에 없었어요. 전에 봤죠?”
진원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어요. 내가 삼촌 속 참 많이 썩였지, 그냥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고. 삼촌의 애원에, 어차피 할 일도 없고,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까지 마쳤어요. 그 뒤로 지금처럼 계속 글을 쓰고 있고요. 그래서 나는 안타깝게도 친구가 없어요.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불행하거나 하진 않아요. 나는 지금의 내 삶에 만족해요, 아주.”
그녀의 웃음은 자연스러웠지만 그래서인지 어쩐지 더 서글퍼 보였다.
“그런데 왜 잠을 못 자는 건가요?”
정곡을 찌른 진원의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던 수은이 장난처럼 답했다.
“귀가 예민해서 그런 거잖아요.”
밤이면 집을 나서는 이유가… 모든 게 다 희미한데 엄마, 아빠, 오빠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 때문이며, 수면의 본질적인 문제가 망가진 마음 때문이래서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아 봤지만, 어떤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고. 그러니 당신이라고 뭐 다르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차마 속마음을 꺼내 보일 수 없었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쩐지 그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았다.
누구도 섣불리 다음 말을 잇지 못해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자 그 정적을 깨려는 듯 우르르쾅, 강하게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확인한 수은이 슬금슬금 걸음을 뗐다. 그 덕에 진원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다. 그건 수은의 생존 본능이었다.
# 사라진 이설의 엄마
현노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이동할 차량도 준비하고. 직접 돌아다니며 의상도 골라 배달을 부탁했다. 달력에 표시된 디데이, 바로 그날이었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보고 뿌듯하다는 듯 미소를 짓던 현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음성으로 넘어가기 직전이 되어서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수은이었다. 찢어질 듯한 그녀의 고함이 전화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쭉 모든 상황을 점검한 현노가 여행길에 오른다.
“결과 보고 하는 거 잊지마!”
미행팀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해. 남녀 성별을 정한 이유가 다 있는 거거든. 니가 남자를 너무 오래 안 만나서 그런 걸지도 몰라.”
“무슨 구시대적 발상이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린지, 수은은 갑작스런 현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삼촌의 말이 메아리처럼 계속 떠오르자, 수은은 결국 참지 못하고 길 한복판에서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수은이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 그게, 제가 갑자기 납치당하듯 끌려와서요. 하하하.”
메이크업, 헤어, 의상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나오니 행선지를 알 수 없는 차까지 대령이 된 상태였다.
이동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 망설이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수은이 멀리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상황 파악이 끝났다는 듯 재빨리 돌아서는데, 지배인이 수은을 발견하고는 막아섰다. 이대로 수은이 나가버리면 지배인이 곤란해질 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는 삼촌인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수은은 난감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굴까, 수은이 호기심이 발동한 채 걸어가는데, 남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다. 진원이었다. 그 역시 당황한 눈빛이다. 수은이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된 음식이 나오고,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부담스럽기 짝이 없게도 레스토랑에는 수은과 진원, 둘 뿐이었다.
간략하게 수은의 설명을 들은 진원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 남자가 원래 이렇게 잘 웃었나, 수은은 멍하니 진원을 바라봤다.
“아니 지난번에 보니까 삼촌이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왜 이러셨을까 의아해서요.”
“뭐 다 필요 없고, 삼촌이 애쓰고 준비하신 거니까 재밌게 맛있게 먹고 즐기자고요.”
“그래요. 하루 휴가 받은 셈 치죠, 뭐.”
자동차 극장에서 아주 평화롭게, 잔잔한 영화를 보는데, 진원의 벨이 다급하게 울렸다. 그가 전원을 끄려는 걸 수은이 말렸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울음소리가 전화기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설이었다.
“엄마가 없어졌어요!”
갈취자의 짓일까. 진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서 가봐요.”
수은이 서둘러 내렸다. 하지만 진원은 기어이 수은을 다시 차에 태웠고, 집에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줬다.
“밤에 집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들릴 듯 말 듯한 수은의 말은 결국 진원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배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수은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두커니 건물 밖에 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집을 올려다봤다.
한편, 수은을 내려주고 서둘러 이설의 집으로 향한 진원. 그의 머릿속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괴로운 듯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촉이 왔다. 그동안 이설과 이설의 엄마 그리고 수은. 뭔가 알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원이 불순한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이설에게 휘둘렸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원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수은의 앞에 언제든지 갈취자가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수은에게 느낀 특별함을 그 존재 역시 느꼈다면, 갈취자는 반드시… 다시 수은을 찾아갈 테니까. 하지만 수은이 이설과 만난다면, 아니 수은이 이설의 엄마와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온갖 소리가 진원을 말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