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수면빚 / 6화

6. 잘못된 만남

by 박선향

# 한눈파는 진원



진원은 자신의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상부에 자료를 요청했다. 자신이 담당한 사람을 제외하곤 바로 상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수은과 이설의 엄마, 두 사람이 만났던 일화를 거론하며 절대 거절당하지 않게 신중하게 요청서를 작성했다. 그리고는 정리된 글자들을 저 멀리 하늘 위에 띄웠다. 초조한 듯 그가 몇 걸음 서성이는 사이, 다행히 바로 요청했던 자료가 도착했다.

이설 엄마의 기록은 그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설의 엄마 역시 탕감자의 손에 맡겨졌으나 수면빚 탕감을 거부해서 실패했다고 적혀있었다. 심지어 현재 생의 일부를 잠식당하고 있는 상태,라고도 적혀있었다. 탕감자는 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삶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이 끝까지 수면빚 탕감을 거부하면 이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진원이 이설의 집으로 향했다, 탕감자가 아닌 상담자의 신분으로. 그녀의 엄마는 단 한 번뿐인 수면빚 탕감 기회를 날려버린 후라 손쓸 방법이 없었지만, 이설의 엄마가 수은과 연관되어 있음을 안 이상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어쩌면 수은의 수면빚을 제대로 탕감할 수 있는 열쇠가 이설의 엄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원은 이설의 엄마가 현재 어떤 상태이며, 어떤 소리에 반응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더불어 이설에게 엄마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이설은 엄마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 엄마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엄마는 내 얘기에 관심 없으니까.”


이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자신이 마주했던 엄마의 모습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진원은 이설의 모녀 뒤로 배경처럼 펼쳐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병원에서 처음 목격한 낯선 엄마, 그리고 정말이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엄마에 대해 얘기하던 이설은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마다 말을 멈췄고, 그때마다 눈물을 훔치며 엄마를 바라봤다. 그녀의 엄마는 전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이설은 남에게 가족사를 이토록 자세하게 털어놓기도 처음이었지만, 엄마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설과 엄마,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이설 모녀는 사고로 인해 관계가 어그러졌고, 그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고 오해가 생겼을 것이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리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해가 깊어진 만큼 시간이 필요했고 고통이 따라야만 했다.


진원은 이설과 함께 그녀의 집 거실 벽 한 면에 모녀의 이야기를 채우기 시작했다. 어린 이설과 함께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부터 성수대교 사고 사진, 이설 모녀를 버리고 간 그녀의 아빠 사진까지. 이설의 엄마는 남편 사진을 보고 움찔하는 듯 보였으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수은의 수면빚을 탕감하는 이번 임무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어쩌면 자신의 각오보다 더 큰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원이 이설의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이방인을 거부하지 않아서 다행인 거겠지. 조급함을 애써 누르려고 노력해 보지만 이상하게 이번엔 조바심이 생겼다. 벌을 받고 있기 때문이리라. 잡념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수은에게 닿자, 진원이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 걱정됐다. ‘지금 뭐 하고 있습니까? 바로 답하지 않으면 전화할 겁니다!’ 진원은 이제 수은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은에게 답이 왔다. ‘네’ 달랑 한 글자. 전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답이었다.

진원이 다시 이설의 엄마를 바라본다. 도대체 이설의 엄마를 지금 이 상태로 만든 결정적 이유는 뭐였을까. 무언가 다른, 조금은 강하게 이설의 엄마를 자극할 만한 게 필요했다.



이설은 요즘 행복했다. 진원이 자신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 매일 같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안심이 된달까? 이 모든 게 수은을 위한 일일 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설이 연재한 자살 시리즈의 반응도 뜨거웠다. 악플이 대부분이었지만 시끄러운 이슈를 즐기는 잡지사였기에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 영향 때문인지 진원의 상담소도 덩달아 바빠졌다.



상태는 충분히 파악했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사고를 통해 아픔을 겪었지만, 이를 극복해 낸 사람들을 보면 이설의 엄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의 방 밖을 나서지 않더라도 온통 흰 벽이라 영화를 보여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원은 이설의 엄마에게 매일매일 다른 영화를 보여줬다.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생각보다 많았다. 어떤 영화는 스크롤이 올라가는 사이, 실제 사례자의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다.


“그분의 희생이 없었다면, 저는 아마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너무 늦었지만, 그분께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평생 그 고마운 마음을 안고 살아갈 거예요.”



며칠이 지났을까. 진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설의 엄마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지치기 시작한 진원은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이설에게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어요. 엄마를 위한 일이니까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하나 더 부탁하고 싶은데, 기왕이면 사망자들의 얼굴도 함께 찾아주세요.”


이설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설의 엄마가 영화에 반응을 보였다. 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엄마가 남편에게 딸아이를 부탁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의 영화였다. 얼마 전 수은을 만났을 때 보였던 그때 발작과 증상이 비슷했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결국 풀썩 쓰러졌다. 이설이 진원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이설 씨 어머니와 수은 씨를 만나게 해야겠어요. 어쩐지 어머님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열쇠는 수은 씨가 쥐고 있는지도 몰라요.”

“지난번 엄마의 반응 하나로 그런 판단을 하는 건가요?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은 안 하세요? 그러다 둘 다 상태가 나빠지면요? 전 반대예요.”


이설이 흥분하자 진원이 그녀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간다. 이들이 밖에서 대화하는 사이, 이설의 엄마가 악몽을 꾼 듯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조용히 침대를 벗어나 살금살금 돌아다니며 병실을 살피다가 문밖의 진원과 이설을 발견한다. 이설의 엄마는 급히 탈출이라도 하려는 듯 이설의 외투를 급하게 걸치다 이설의 가방을 떨어뜨린다. 우수수, 기사와 사진들이 쏟아졌다. 성수대교 붕괴,라는 글자가 보였다. 신문의 글자들이 금방이라도 지면을 뚫고 나올 것처럼 이설의 엄마를 위협했다. 그래서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렸는데, 단란한 가족사진 한 장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설의 엄마가 손을 뻗어 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퍼지더니 이설의 엄마는 또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에 이설과 진원이 병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설이 간호사를 부르러 간 사이 진원이 이설의 엄마를 침대 위에 눕혔다. 이설의 엄마는 손에 사진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진원이 슬며시 그 사진을 빼냈다. 사진 속 가족은 무척 익숙했다. 수은의 가족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이설이 진원에게 빼앗듯 사진을 가져가 버렸다. 가족사진 속 여자아이는 누가 봐도 수은이었다. 이설은 사진 속 수은을 쏘아보았다.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 꼬이는 이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진원은 난감했다.




# 가까워진 두 사람 그리고 첫 키스



수은이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다. 며칠째 이러는 중이다. 책을 보긴 보는데 건성건성 표지만 넘겨보곤 이내 흥미 없다는 듯 내려놓았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다른 곳에 있었다. 태하는 정말 미지의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 만나기 쉽지 않아서일까, 수은은 어쩐지 그에게 끌렸다. 그는 잠들어야만 만날 수 있는 자신의 작품 속 남자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그보다 더 만나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어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철퍼덕, 수은이 서점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드러누웠다. 정말 꿈속에서 태하를 만나기라도 하려는 듯 선잠에 빠지려는 찰나 휙, 책이 걷혔다. 태하가 수은을 향해 씩 웃고 있었다.


“설마 나 만나려고 온 건가? 사람들이 수군거리던데, 어떤 여자가 며칠째 여기서 죽치고 있다고.”


수은은 그가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부끄러워 허둥지둥 일어섰다. 태하가 그런 수은을 이리저리 살폈다.


“근데 또 못 잤나 보다. 얼굴이 말이 아닌데?”


‘그래, 너 때문이다! 너 기다리다 못 잤다! 왜!’ 수은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말을 꿀꺽 침과 함께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반문했다. 정말 순수하게 작품 때문에 만나고 싶었던 걸까. 연재 스트레스가 심해서일 거야. 그녀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당신에겐 지금 휴식이 필요해. 내가 기분 전환 시켜줘야겠네.”


근데 이 사람, 양해도 구하지 않고 언제부턴가 반말을 쓰고 있었다.


태하가 수은을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한강시민공원. 물이 무서운 수은은 강 근처에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 잔디밭을 서성였다.


“물이 무서워요? 왜?”


어디 피해 갈 구석도 없게 태하는 말투도 직설적이었다.


“사람이 물에 빠져 죽는 걸 목격했거든요.”


수은의 훅 들어온 대답에 당황하긴 태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른 듯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태하와 수은이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 있다. 사람 구경에 바빠 두 사람은 어색할 틈도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감정을 갖게 만드는 신비한 존재였다. ‘나 잡아 봐라.’를 선보이는 아빠와 아장아장 걷는 딸, 공 하나로 활력 넘치는 청년 셋, 지그시 사람 구경하는 노부부, 사랑이 막 시작된 듯한 남자와 여자.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보던 수은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 중 내 이야기는 어떤 걸까요? 내 이야기 속 주인공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태하가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거둬 수은을 바라보는데, 정면에 커플이 자리를 잡는다. 커플이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애정행각을 이어가자, 그 모습을 목격한 수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태하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 역시 커플을 목격한다. 설마 지금 내가 부끄러운 거야? 태하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민망함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 보이는 두 사람. 수은과 태하의 눈빛이 허공을 헤매다 부딪쳤다. 태하가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갈까요?”


수은은 기다렸다는 듯 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근데 그의 손이 향한 곳은 다리 위였다. 벌떡 일어난 수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자 태하가 말도 안 되는 말로 위로를 했다.


“가까이에서 보는 건 무서워도 멀리서 보면 안 무서워요.”

“무섭고 안 무섭고의 기준이 대체 뭐죠?”


진원을 처음 만난, 쓰러졌던 그날이 떠오른 수은의 얼굴이 이번엔 잿빛으로 변했다. 태하가 그런 수은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간의 감정이 이렇게 자신에게 잘 전달되었나, 태하는 새삼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괜찮아, 요? 정말?”

“지, 집에 가야겠어요.”

“무슨!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이 얼마나 황금 같은 시간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좋은 아이디어 떠올랐다, 가요!”


태하가 수은의 팔을 낚아채 뛰기 시작했다.



수은이 배를 잡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그가 데려온 장소도 웃겼지만,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주려는 듯 애쓰는 그의 행동이 그녀를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태하가 수은을 데려온 곳은 한 건물의 내부 1층, 광장 같은 곳이었다. 개울에 돌멩이가 군데군데 놓여있는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뭔가 특수 장치가 되어있었다. 움직이는 징검다리였다. 태하가 한 발 디디면 다음 발을 디딜만한 공간에 돌멩이가 생겼다. 그렇게 한 걸음씩 움직이니 어느새 저만큼 멀어졌다. 멀어진 채로 수은을 향해 어서 오라는 듯 그가 손을 흔들었다.


태하를 바라보는 수은의 눈빛이 이제껏 사람을 바라보던 눈빛과는 조금 달랐다. 수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느끼는 듯했다. 태하 역시 이 생소한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녀는 잠을 갈취해야 하는 인간이 아닌 그냥 자신의 시간 속에 들어와 있는 소중한, 무어라 규정해야 할까, 추억 같은 존재였다. 에라, 모르겠다! 수은과 태하는 같은 마음으로, 마음껏 그 순간을 즐겼다. 지나가던 꼬마들이 이런 태하와 수은을 보고 얼레리꼴레리 놀려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은은 태하를 따라 이리저리 징검다리를 건넜다. 수은은 진짜 물을 만나도 어쩐지 무섭지 않을 것만 같았다.


수은의 마음을 읽었는지, 어린애처럼 놀던 태하가 수은을 또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이번엔 건물 밖 분수였다. 질겁할 새도 없이 끌려 들어가 옷이 죄다 젖어버린다. 주변 시선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뛰어다니는 수은과 태하를 누군가 찰칵, 사진을 찍는데… 순간 태하와 수은의 입술이 부딪친다. 놀라 동그랗게 커졌던 태하와 수은의 눈이 금세 약속이나 한 듯 다시 감긴다. 그리고 꽤 긴 시간, 두 사람은 달콤한 키스를 나눴다. 사진을 찍던 시선이 더 놀란 듯 카메라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아쉽게도 키스한 사진은 전송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실시간으로 수은의 사진을 보고 받던 현노는 기겁했다.


“세상에, 물, 놀이라니…”


진원을 수은의 짝으로 점찍어두던 현노의 마음이 흔들렸다. 띠링 또 울리는 휴대폰. 이번엔 진원의 사진이었다. 진원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미행을 붙인 참이었다. 그런데 맙소사. 진원이 우는 여자를 감싸 안고 위로하고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게 딱 이런 상황이리라. 멋진 사장님 포스로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현노가 돌아섰다,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무슨 일을 꾸밀 때마다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 오해, 현노의 저울질



“차질 없이 움직여야 해! 하나라도 틀어지면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고!”


현노의 말이 끝나자, 누가 봐도 경찰이 사복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의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자, 그럼 손님 맞으러 가볼까나.”


그 시각, 진원의 상담실. 수은과 진원이 마주 앉아 있다. 그런데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수은의 수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문답이 이어졌다. USB 덕분에 자긴 잔다는데, 수면빚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 다그치려는 진원의 마음을 알아챈 수은이 미리 선수를 쳤다.


“연재 때문이에요!”

“이제부터 수은 씨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대면하는 치료를 시작할 거예요.”

“작품 연재 중인데 하필 이런 타이밍에 그런 치료를 꼭 해야 할까요?”


진원의 표정은 몹시 단호했다. 수은이 그 표정을 보더니 푹, 고개를 숙였다.



진원은 예술가의 마음을 너무 몰랐다. 그런 면에선 태하가 더 좋았다. 수은은 이런 순간에도 두 남자를 비교하고 있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댓글을 봐도 의견이 반반 갈렸다, 태하파와 진원파로. 여주인공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아직 3회밖에 연재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결말까지 내버리고 맞네, 틀리네, 설전도 오갔다. 사무실 분위기도 역시 두 파로 갈렸다. 이슈몰이에 성공했다며 한껏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파와 원하지 않은 쪽으로 결론이 난 뒤를 대비해야 한다는 부정적인 파로. 근데 너무 팽팽하게 맞서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진원도 보태고 있는지라 수은은 너무 골치가 아팠다. 이때 진원의 휴대전화가 진동에 이리저리 요동쳤다. 전화를 받은 진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또 취재요청인 듯했다. 어떻게 개인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아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번호를 아는 건 이설과 수은뿐인데. 상대방이 어찌나 애절하게 매달리는지, 쉬이 거절하지 못한 진원이 째려보듯 수은을 노려보며 옆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를 왜? 내가 뭐?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아니라고!”


그때, 바로 지금이 찬스라는 듯 일사불란하게 남자들 서넛이 진원의 상담실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은을 납치하는 게 아니라 호위하듯 끌고 내려가더니 차에 태웠다. 얼굴을 보아하니 수은에겐 낯익은 존재였다. 거기다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어설프게 수은을 묶었다. 누가 봐도 무서운 상황이라기보다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펼쳐지는 상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또 야? 이번엔 뭔데? 어째 우리 삼촌은 변하질 않는대? 주변에 누구 하나 있는 꼴을 못 보지 아주 그냥! 이런 곳은 또 어디서 찾았대? 아, 모르는 척해 드릴게요. 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폐공장 한가운데 현노가 한껏 폼을 잡고 앉아 있었다. 기가 찬 듯 수은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어찌나 어설프게 끈을 묶었는지, 손가락을 까딱하니 우수수 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노가 남자 무리를 노려보자, 다들 시선을 피했다. 현노가 재빨리 수은의 전화기를 낚아챘다.


“에이~ 이건 반칙이지.”


수은이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레퍼토리나 좀 바꿔라. 이런 덴 왜 빌리는 거야. 영화 찍어? 나는 여기 뭐 하러 데려오냐고!”


통화를 마친 진원이 상담실로 돌아왔는데, 그가 마주한 건 몹시 당황스러운 광경이었다. 알고 보니 발신자는 현노였다. 앞으로는 수은을 상담 안 빼먹고 잘 다니게 할 테니까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수은은 조금 전까지 바로 이곳에 앉아 있었다. 귀찮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제 발로 왔는데… 뿅 하고 사라졌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흔적도 없이. 전화도 받지 않았다. 진원이 자신의 팔찌를 확인했다. 평온한 푸른빛이었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이었다. 진원은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나가 수은의 집으로 향했다. 모니터로 이를 지켜보던 현노가 허탈해했다.


“자, 이제 나를 그냥 보내주지? 나 연재 중인 거 모르나? 대표가?”


수은이 일어서자 현노가 민망한 듯 중얼거렸다.


“무슨 남자가 저러냐. 감정이 없어, 화를 내든지 뭔가 리액션이 있어야 할 것 아냐!”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진원은 차분한 듯 보였지만, 별일 없는 듯 보였지만 수은과 함께 갔던 곳을 죄다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 첫 번째 장소가 집일 뿐이었다.

이번엔 또 다른 남자, 태하 차례였다. 그런데 현노는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잔뜩 짜증이 나있었다.


“도대체가 정체를 모를 놈이야! 그놈보다 이놈이 더 위험하겠어! 그놈이나 이놈이나!”


며칠째 태하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영 소식이 없었다. 수은 역시 오다가다 만나는 터라, 태하와의 만남이 규칙적이지 않았다. 언제를 기회로 삼아야 할지 현노로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 모처럼 잡은 기회가 하필 사람 가득한 서점이라니. 거기다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지, 특히 수은이 몸을 배배 꽜다. 인내를 거듭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데 뜻밖의 행운이 현노를 찾아왔다. 생리현상은 어쩔 수 없으리라. 현노가 기쁨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그런데 수은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탕감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태하가 냉큼 몸을 숨겼다. 방패가 사라지니 태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라, 이게 아닌데?”


상황이 정반대로 흘러갔다. 갑자기 사라진 태하 때문에 오히려 수은이 어리둥절한 상태가 되었다. 태하를 잡아간 게 현노라고 생각한 수은이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러댔다.

“털끝 하나라도 건들기만 해!”


수은은 현노의 수하를 제 수하인 듯 불러 함께 태하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태하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수은은 직접 현노를 찾아가 가슴속 온갖 분노를 다 끌어내 소리를 질렀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한 번만 더 그래봐! 그 순간부터 나 절대 못 볼 줄 알아!”


수은의 소리가 현노에겐 그저 모기가 윙~ 하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현노의 머릿속은 온통 태하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이 자식 정체가 뭘까? 혹시 범죄자?”


현노의 망상이 입 밖으로 나오자, 봉인이 해제된 수은이 결국 펀치를 날렸다. 현노의 얼굴에 크게 멍 자국이 생겼다.



며칠 뒤, 수은과 진원이 다시 마주 앉았다. 수은은 갑자기 사라진 죄로 반성문을 써야만 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비슷한 구도의 장면이 연출됐다. 이번엔 수은이 태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삐친 수은을 달래기 위해 태하는 그녀가 작업하는 동안 그녀의 수발을 들어야만 했다.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져서였을까? 태하가 수은을 멀거니 바라보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다. 어쩐지 자꾸 그녀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방패일 뿐인데, 잠을 갈취할 인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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