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면빚 탕감 Ⅱ
(어제 시간 맞춰 올렸는데, 연재 항목 체크를 빠뜨려서 잘 못 올라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재밌게 보세요~)
# 미운 정 고운 정
큰 자극이 오히려 안정을 찾게 한 건지, 이설 엄마의 불안증이 다소 잦아들었다. 한숨을 돌린 진원은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수은을 설득할 준비에 돌입했다. 설득하는 게 왜 재우는 것보다 어려운 건지, 진원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진원은 상부에 제출하는 보고서 보다 더 꼼꼼하게 자료를 준비했다. 이설의 엄마에 관한 기록, 성수대교 붕괴 사건 기록을 정리하던 진원은 인연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수은과 이설의 엄마를 만나게 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산 넘어 산이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냥 부딪쳐 보는 게 상책이라고 했나? 그래서 진원도 무작정 수은을 찾아갔다. 인간의 집을 이렇게 자기 집 드나들 듯하다니. 진원은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수은의 집 비밀번호를 알려준 사람은 현노였다. 수은과 연락이 닿질 않자, 진원이 온 동네를 쥐 잡듯 뒤졌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집에 있었고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며, 현노는 처음으로 남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그렇다고 현노가 진원에게 절대 경계를 늦춘 건 아니었다. 비밀번호야 또 바꾸면 되니까. 지금으로선 수은이 치료를 받고 있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진원이 스스럼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에 들어서는데, 상상도 못 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재를 시작했으니, 극도로 예민해졌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집안 꼴이야 그렇다 치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위험신호는 없었다. 그러니 지난번처럼 집 안 어딘가에 그녀가 있을 것이다. 진원은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욕실에서 수은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던 건지, 욕조에 몸을 반쯤 걸친 수은의 뒷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진원은 덜컥 겁이 났다. 다행히 욕조에 물은 없었다. 피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흔들어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수은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진원이 이설에게 몰두한 사이, 수은의 수면빚은 하나도 줄지 않았다. 중간보고를 해야 하는데 난감했다. 수은에 이설의 엄마까지… 진원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화가 치밀었다. 그러다 빠른 속도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수긍했다. 이래서 벌이었구나.
병실에 누운 수은은 깊은 밤이 되자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그놈의 글이 뭐라고, 그놈의 연재가 뭐라고… 진원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내용을 듣고 있자니 받아 적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을 입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그건 자존심이 상해 대신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깨어나면 분명 마감이 코앞이라며 울고불고할 게 뻔했다. 그러면 자신만 귀찮아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지랄 맞은 사수가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이설은 행복지수가 최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병문안을 무사히 마친 이설은 자유롭게 취재 다닐 생각에 들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병원을 빠져나가던 이설이 낯익은 얼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근데 저 사람이 병원엔 어쩐 일이지?”
진원을 불러 세우려던 이설은 생각을 고쳐먹고 조용히 그의 뒤를 밟았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는지, 그는 역시 수은을 돌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고객 이상의 관계였다. 그가 수은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길 바랐는데, 자신이 그토록 노력했건만… 진원이 갑자기 병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이설은 서둘러 계단 쪽으로 도망쳤다.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왜 숨는지, 자신에게 화가 났다.
혹여 진원과 마주칠까, 두리번거리며 병원을 빠져나온 이설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병원 입구를 서성였다. ‘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방법이…’ 답답한 마음에 이설이 발을 동동 구르자, 사람들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수면 부족에 영양실조까지, 의사는 병원에서 더 쉬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수은은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기에, 진원은 조건을 걸고 허락했다.
“내가 당신이랑 함께 있을 거예요. 당신에겐 투덜거릴 권리 따위 없어요.”
어느덧 진원은 수은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달라진 자신들의 관계를, 그리고 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삼촌에게 연락할 거고. 연재고 뭐고 병원에 당장 가두라고 할 겁니다.”
싸울 기력도 없는지, 수은이 순순히 진원의 말을 따랐다. 수은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원은 수은을 침대에 눕히고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였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그는 일일이 밥을 떠먹이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였다.
진원의 상태는 한 가지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선 행동, 후 후회. 소화까지 시켜 수은을 재우고 나니 진원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런 자괴감은 어떻게 떨쳐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원은 오래도록 머리를 쥐어뜯으며 집안을 서성였다.
분명 재웠고 자는 걸 보고 돌아섰는데, 잠시 한눈판 사이 수은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진원이 다가와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진원은 진정 궁금했다. 연재가 정말 목숨보다 소중할 수 있을까. 그에게 인간은 참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많은 존재였다.
음악을 틀고 다시 재우려 하는데, 소음 방지용 수면 귀마개를 귀에 꽂았다. 그가 화를 내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진원이 그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사무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설마 했는데, 역시 마감을 재촉하는 전화였다.
“다들 그만 좀 해요! 사람이 잠을 자야 글을 쓸 거 아닙니까! 내가 절대 마감에 늦지 않게 할 테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
이 사람이 이토록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나, 수은은 놀란 토끼 눈으로 진원을 바라봤다. 진원과 눈이 마주치자 안 되겠는지, 수은이 전광석화처럼 침대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불이 난 진원이 열을 식히러 밖으로 나가려다 가족사진 앞에 섰다.
“저 여자는 도대체 왜 저렇게 말을 안 듣는 겁니까! 청개구리가 따로 없습니다!”
# 질투의 화신
진원은 상담실도 걸어 잠그고 아예 수은의 곁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수은은 그와 눈만 마주쳐도 짜증을 냈다. 이상하게도 눈앞에 진원만 보이면, 나던 생각도 쏙 들어갔고, 잘 써지던 문장도 엉망진창이 됐다. 진원의 눈을 피해 탈출 기회를 노렸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설 역시 변장한 채 수은의 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근처 건물의 옥상, 망원경으로 수은의 집이 잘 들여다보이는 곳도 찾아냈다. 진원에게 짜증 내는 수은을 목격한 이설의 얼굴이 가슴 깊은 곳에서 피가 끓어오른 듯 점점 붉어졌다. 수은의 이런 상태가 계속 이어지자, 이설은 어서 빨리 그녀에게서 진원을 빼앗아 오고 싶었다. 이설의 상태는 무언가에 홀린 듯 다급해 보였다. 몇 날 며칠, 두 사람을 지켜보며 계속 궁리해 보았지만 역시 엄마 외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여자를 보고 발작을 일으켰던 엄마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엄마가 쓰러지면 진원은 분명 자신의 집으로 올 것이다, 전에도 그랬으니까.
“엄마를 어떻게 쓰러지게 하지? 맞아! 엄마가 그때 저 여자를 보고 쓰러졌잖아. 엄마 정말 미안한데… 내가 내내 엄마 보호자 했으니까, 딸을 위해 한 번만 희생해 줘”
하지만 엄마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수은을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야 했다. 이설의 생각은 항상 그 지점에서 멈췄다. 도무지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설이 신경질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바닥에 던졌다.
태하 역시 이설처럼 수은을 만나지도 못한 채 그녀의 집 근처를 배회 중이었다. 그녀의 집에서 계속 탕감자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때 마주쳤던 그자이리라. 태하가 갈취하려던 다음 타깃은 수은이었는데, 계획이 다 틀어졌다. 탕감자가 인간의 수면빚 탕감을 시작한 이상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설의 엄마처럼 수은이 수면빚 탕감을 거부하게 만들어야 했다. 어쩌면 그녀를 포기하는 게 당장 자신의 안전을 위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욕심이 났다. 태하에게 수은은 이전에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방패와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핑곗거리를 찾던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갑자기 헛기침을 해댔다.
현재 태하가 갈취 중인 인간은 잠을 길게 자는 타입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인간의 공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드나들어 긴 시간 잠을 갈취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렇게 매번 고생고생하며 수은을 찾아오는데, 그때마다 탕감자인 진원이 붙어 떨어지질 않는 상황이었다. 태하는 다시 돌아가야 할 타이밍이어서 느릿느릿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던 참이었는데, 그때 시야에 이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줌마 딸? 아줌마 딸이 여기 왜?”
이설이 망원경으로 수은의 집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태하가 목격한 것이다. 수은과 진원, 둘을 바라보는 이설의 눈빛은 확연하게 달랐다.
“조만간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은데? 독이 잔뜩 오른 인간은 항상 사고를 치기 마련이거든. 근데 나는 그걸 또 잘 이용하면 득을 볼 거 같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이설이 중얼거렸다.
“왜! 왜! 나는 왜! 안 봐주고 쟤만 보는데!”
# 위험... 신호?
모두가 퇴근한 시간, 이설은 불 꺼진 사무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괴기스럽게 휴대전화 불빛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설은 수은의 글을 읽으며 재미있다는 댓글에 아이디를 바꿔가며 욕을 퍼부었다. 너무 시원해서 얼굴에 미소가 다 번졌다. 그러다 깨달았다. 수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자 중 한 명이 너무 익숙했다. 이설은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다는 듯 손에 든 전화기를 집어던지려다 참았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흥분하면 곤란하다고.”
병원에 장기 입원 중인 사수 덕에 이설은 아예 대놓고 수은의 집 근처에서 잠복했다. 망원경으로 진원의 웃는 얼굴이 보이자, 이설은 안심이 되면서도 화가 났다. 그의 웃음이 자신을 향한 웃음이길 간절히 바랐는데… 그 순간 갑자기 울린 진동에 이설이 놀라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발신자는 상사였다.
“넌 도대체 어디서 뭐 하냐?”
“아, 그게. 엄청난 특종을 잡아서, 아직 말씀드리기는 곤란하고. 잠복 중입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지금? 당장 들어와서 보고해!”
“딱 1시간만 주세요. 증명해 보일 테니까.”
평소와 다르게 겁도 없이 툭, 이설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망원경 안으로 전화를 받는 진원의 눈치를 살피며 도망칠 기회를 엿보는 수은의 모습 외엔 그 어떤 것도.
산책이라도 하려는지 진원과 수은이 모처럼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하필 중요한 전화라도 걸려 온 건지, 진원은 꽤 오랜 시간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수은은 호시탐탐 그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노렸지만, 그는 다 안다는 듯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수은이 도망치기를 포기하려는데, 진원이 잠시 멀어진 틈을 타 이설이 잽싸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 작가님 아니세요? 작업은 잘 되시나요? 요즘 연재 히트치고 계시죠? 저도 재밌게 읽고 있어요.”
이설을 기억 못 하는지, 관심이 없는 건지 시선을 진원에게 둔 채 수은이 답했다.
“아, 네, 고맙습니다…”
이설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모른 채 잠시 침묵하던 수은이 넋두리를 이어갔다.
“근데 저 인간 때문에 작업을 못 하겠어요. 어찌나 쫓아다니는지.”
이설이 재빠르게 기회를 낚아챘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그제야 수은의 시선이 이설에게 닿았다.
“작가님은 저를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은데,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엄마를 팔게요. 그럼 저분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제 말만 믿으세요.”
통화를 마친 진원이 돌아서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저만치 멀어진 이설이 수은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진원이 받은 전화는 자신이 건 전화라는 신호를.
“지금 튀는 게 좋을까?”
수은이 고민하는데, 진원이 수은을 돌아봤다. 뭔가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듯했다.
통화를 마친 진원에게 수은은 말썽을 피우지 않겠다며, 도장에 복사에 코팅까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해 약속했다. 진원이 사라지자 고맙다는 눈인사라도 하려고 이설이 있던 곳을 돌아봤지만,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수은은 이제부터 자유를 만끽하겠노라,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를 떴다.
이설은 곧장 회사로 향했다. 진원의 전화가 계속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괘씸죄를 적용하기도 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상사의 끝도 없는 잔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생각 있는 척, 고상한 척 그만하고 세상 시끌벅적하게 만들 센 거, 진한 거나 찾아와!”
계속 들어야 할지, 어떻게 이 자리에서 탈출할지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뚫린 입이라고 상사가 딱 자기 가치관을 드러내는 막말을 쏟아냈다.
“얼마 전에 교각 일부가 무너진 사고, 알지? 내가 그걸 보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성수대교 무너졌던 거 혹시 이 기자는 아나? 거기 왜 목숨 질겨서 살아남은 인간들 있잖아. 그 사람들 취재나 해봐. 가능하면 아주 망가진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경각심도 심어줄 겸. 기자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
이설은 서랍 속 사표를 노려보다 그냥 닫아버렸다. 어떻게 입사한 회산데, 또다시 백수가 된다면 엄마 곁에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만 했다. 그보다는 지금의 이 고통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진원에게서 벗어난 수은은 자유를 즐기다 못해 연재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진원을 마주칠 법한 곳들은 피했다. 새삼 그가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게 무서웠다. 진원의 생각을 지우기 위해 수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딜 간담?”
수은은 태하와 함께 머물렀던 곳으로 향했다. 문득 혼자여도 무섭지 않은지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은이 청계천 징검다리 앞에 섰다. 모형은 괜찮았는데, 아무래도 실사는 아직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수은은 결국 징검다리를 바라만 보다 그냥 돌아섰다.
수은은 작품 속 인물과 함께하고픈 걸 떠올리며 이곳저곳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졌고, 돌아다니다 지친 수은은 지하철 안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수은은 며칠 동안 진원의 보호 아래 있었지만, 아직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표적이 되기 쉬운 상태였다. 수은은 자신에게 닥칠 위험도 모른 채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텅 빈 지하철, 홀로 잠든 수은을 향해 누군가 다가와 손을 뻗었다. 점점 그 손길이 수은과 가까워지려는데, 순간 지하철이 정차했다. 그 바람에 주춤하는 누군가의 손길. 그때 위험을 감지한 진원의 손목 팔찌 색이 짙어졌다. 진원은 미친 듯이 수은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지하철 문이 닫히려는데, 누군가 미친 듯이 뛰어 올라탔다. 땀을 뚝뚝 흘리는 남자는 진원이었다. 그 순간 휙, 하고 수은을 향해 다가오던 손길은 자취를 감췄다. 진원이 전혀 마주친 적 없는 갈취자였다.
“도대체 이 여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진원이 수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땀을 닦고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휘저으며 졸고 있는 수은이 편히 잘 수 있게 자기 어깨를 내줬다.
밤늦은 시간, 이설이 성수대교 난간에 매달려 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자살하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겁이 없는지 점점 난간 너머로 몸이 넘어가는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갑자기 훅 불어온 바람에 휘청하는 이설을 누군가 붙잡았다. 태하였다. 그도 이설의 엄마 상태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근데 왜 이 여자가 이런 꼴로 여기에 있는 거지?’ 묻지도 않았는데 막혔다 뚫린 호스처럼 이설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이 다리가 무너진 적 있는 거 알아요? 무너지면서 서른두 명이 죽었는데, 그것도 알아요? 열일곱 명이 살았는데 알아요? 그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 사람들 가족은 또 어떨 것 같아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느낌이 뭔지 알아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은 도대체 어디서 풀어야 하는지 알아요? 산 자의 고통을 이슈 삼아 기사나 써야 하는 기자의 마음을 알아요?”
질문은 이어졌지만 답할 틈이 없었다. 이설이 또 휘청이자, 태하가 이번엔 두 팔로 단단하게 그녀를 잡았다.
“우리 2차 갈까요?”
바닥엔 찌그러진 맥주 캔이 여러 개 널브러져 있었다.
이설은 이미 자신의 주량을 넘어선 상태였다. 엄마 때문에 힘들었던 자신의 인생부터 자신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주는 남자 진원의 이야기,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적수 수은에 관한 이야기를 무한 반복 재생했다. 태하에게 이설은 이용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수은을 향한 적대감, 진원을 향한 애정이 그 이유였다. 거기다 분명 이설 역시 수면빚이 차고 넘칠 것이었다. 다음 주자까지 예약하는 거랄까. 태하가 이설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이제 이설도 수은처럼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설이 다른 이의 먹잇감이 되는 걸 막기 위해 태하는 이설을 집에 데려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