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수면빚 / 8화

8. 실행

by 박선향

# 대범한 시도



빙글빙글, 이설의 엄마가 방안을 맴돌고 있다. 결심한 듯 문 가까이 다가갔다가도 다시 멀어지기를 여러 차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겨우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에는 어림없는 거리였다. 문고리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이때 벌컥 문이 열리고 이설이 들어왔다. 놀란 이설의 엄마는 방구석으로 도망쳤다.


“엄마, 밥 먹자.”


엄마의 이런 행동이 익숙한 듯 이설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듯, 이설이 엄마에게 그랬고 엄마가 이설에게 그랬다. 서로에게 있는 듯 없는 존재였다.



모처럼 쉬는 휴일, 이설은 엄마의 방문을 열어뒀다. 그리고 멍하니 엄마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외면과 달리 그녀의 내면은 지금 전쟁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척 정말이지 자신의 얘기를 쓰고 싶었다. 합동위령제를 해마다 치렀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날짜도 시간도 관심 없는 엄마였지만 이상하게 그 시기만 되면 온몸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덩달아 그녀도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엄마는 그 여자를 보고 반응한 것일까. 평소 아는 사이였나? 그 여자 표정은 그런 거 같지 않던데. 그 여자 또래가 죽는 걸 목격이라도 걸까?’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가며 아무리 유추해도 이설의 추측은 제자리였다. ‘역시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하는 걸까?’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엄마는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이설은 이제는 그만 끝내고 싶었다. 급기야 엄마를 잃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 만큼 했어.’


엄마를 바라보던 이설이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노트북을 켜고, 깜빡이는 커서를 한동안 바라보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성수대교 붕괴 사건 후, 자신을 버린 채 살아가는 영혼…이라 쓰고 벌떡 일어나 엄마의 방문을 닫았다. 엄마가 자신의 방을 절대 나올 리 없고, 더군다나 이설의 방에 절대로 들어올 리 없지만, 또 한 편으론 지금 쓰고 있는 이 기사를 읽으면 뭐 어떠랴 싶지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기사를 쓰는 내내 파노라마처럼 엄마의 모습이 스쳐 갔다. 얼굴에 미소 따위 없고 울부짖거나 자신을 죽여 달라는 간절한 눈빛이 전부였다. 켜켜이 쌓였던 시간을 써 내려가다 보니 문득 궁금했다. 엄마를 제외한 열여섯 명의 생존자가 모두 엄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까. 살면서 내내 엄마를 마주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그들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이설은 생각을 멈추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만 써 내려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글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해졌다. 이설이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여는 순간, 동시에 다른 문이 열렸다. 집 안에는 자신과 엄마뿐인데… 자신이 연 방문 외에 다른 방문이 열린 것이다. 놀란 이설이 그대로 정지한 채 방문을 열고 나온 엄마를 바라봤다. 좋은 건지 슬픈 건지 분간할 수 없는 웃음이 이설의 얼굴에 번졌다. 방문을 부여잡은 엄마는 방 밖으로 겨우 한 발을 떼더니 곧바로 주저앉았다.



한편, 진원은 수은에게 계약서 조항을 보여주며 반협박 중이었다.


“나는 당신과의 계약을 성실히 이행 중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가요? 앞으로 그 좋아하는 글 평생 쓰고 살려면 수면장애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진원은 하고 싶은 말이 끝도 없이 많았지만, 꾹꾹 눌러 담았다. ‘이 여자는 한번 말을 하면 듣지 않는 여자다. 귀에 딱지가 내려앉도록 잔소리해야 한다. 바보 같아서 잊어버리는 건지, 아니면 자신의 얘기가 아니라고 치부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뇌를 열어서 확인해 보고 싶다, 진정!’


“실시간으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보고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계속 함께 있겠습니다.”


그제야 수은이 놀란 눈으로 진원을 바라봤다. 삼촌 현노의 말이 맞았다. 수은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살았다. 이 세상은 인간의 삶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야기 배경일뿐이었다. 그래서 두려울 것도,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냥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가면 그뿐이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을 그녀만 몰랐다.


전화벨이 정적을 깼다. 발신자는 이설이었다. 이 여자는 왜 또! 하여튼 인간 여자들이란 자신을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는다. 앞으로 남자만 받겠다고 상부에 부탁이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이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진원의 주변은 정말이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엄마가… 엄마가… 흐억, 방문을 열고 나왔어요.”


진원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재빠르게 옷을 챙겨 나가려던 진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서서 수은을 빤히 쳐다보더니, 수은이 연재 중인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실에서 만나는 남자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여자가 너무 수동적이에요. 두 남자가 들이대고 여자는 가만있기만 하는 지금 상황은 하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독설을 날리고 사라지는 진원이 얄미웠지만, 수은은 진원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진원이 사라지자, 집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모처럼 집중이 잘 되자, 수은은 작업 속도를 올렸다. 여주인공의 수동적 태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자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딩동~ 벨 소리에 평화가 깨졌다. 빈집인 척했건만 이번엔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오자, 수은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도어 뷰어로 내다보니, 태하였다.


“집에 있는 거 다 알아요. 문 열어요.”


오랜만에 보는 터라 수은은 태하가 반가웠다. 수은의 표정을 통해 마음을 읽은 태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수은이 따라 웃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태하가 수은을 지나쳐 그녀의 작업 공간으로 향했다. 이전에 올라온 글도 봤다며 남자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을 모델로 삼은, 잠을 자야만 만날 수 있는 남자 얘기를.


“당신은… 깨어있을 때 만나는 남자와 잠들었을 때 만나는 남자 중 어느 쪽이 더 좋지?”


수은은 진원과 태하를 떠올렸다. 잔소리하는 진원과 달리 태하는 어쩐지 좋은 이미지만 있었다. 왜일까. 수은이 생각에 잠긴 채 태하를 빤히 바라봤다.


“나구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수은이 후다닥 책상 앞에 앉았다. 눈앞에 자신의 이야기 속 인물이 살아 움직여서 그런지 진도가 잘 나갔다. 곁에 있던 태하가 수은이 막힐 때마다 좋은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미우나 고우나 진원이랑 태하 때문에 수은의 이야기는 술술 잘 풀렸다. 갈수록 자신의 이야기 속 인물이 태하와 진원을 닮아간다는 걸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진원은 이설 엄마의 변화가 반가웠다. 얼굴에도 조금씩 표정이 생겼다. 다만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엄마를 둘러싸고 앉아 진원과 이설, 두 사람은 별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밤이 되자 수은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이 밤에 어딜?”


태하가 위험하다며 따라나섰다.


“회의요. 참 붙임성이 좋아요, 당신은?”

“내가 그런가?”


잘생긴 남자의 등장에 이야기 중간 점검 회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수은이 사무실에 누군가를 데려오다니, 그것도 남자를… 생전 회의에 참석하는 법이 없던 현노가 양손 가득 야식을 들고 나타났다. 수은을 향해 ‘쟤는 왜 여기 있냐.’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수은은 모른 척했다. 대신 태하에게 그때 그 일을 벌인 자가 저 사람이라는 듯 눈짓으로 알려줬다. 그러자 태하가 현노를 바라봤다. 태하와 눈이 마주치자 민망해진 현노가 수은을 향해 인상을 한 번 빡 쓰더니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엄마도 호전이 되는 듯했고, 자신과 진원도 많이 가까워진 듯해서, 모처럼 이설은 기분이 좋았다. 세심하게 엄마를 재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욕심이 앞섰다. 평생 그가 옆에 있다면 아픈 엄마도 감당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껏 아파했던 자신의 고통도 다 떨쳐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이 타이밍일까? 그랬다가 오히려 관계를 망치면 어쩌지?’ 고민됐지만 이설은 용기를 냈다. 그가 평소 즐겨 마시던 차를 구입해 두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하지만 진원은 아는지 모르는지, 영 반응이 없었다. 진원은 자상한 듯했지만 동시에 차가웠다. 그 여자, 수은에게만 빼고. 왜 그 여자와는 그토록 허물없이 지내는지, 가끔 수은과 함께 있는 그의 모습이 이설에겐 낯설었다. 자신도 수은 못지않게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한 진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수은 씨 작업을 도와주다 갑자기 나온 거라서…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찻잔을 든 이설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 여자를 좋아하나요?”


진원이 단칼에 선을 그었다.


“상담자에게는 그 어떤 감정도 갖지 않습니다. 그건 이설 씨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여잔 특별하잖아요. 다 보인다고요, 내 눈에는.”


진원의 표정이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변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어머님 잘 보살피세요.”


진원을 잡아 세우고 싶었지만 이렇게 끝낼 수 없는 관계였기에 이설은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이설의 집을 나서는 진원에게 띠링 문자가 날아들었다. 회의 잘 마치고 방금 출발했다는 수은의 보고였다. 그런데 마지막 문구에 진원이 화들짝 놀란다. 그 남자와 함께라고? 서둘러 수은의 집에 도착한 진원이 무척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였다.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거지? 집주인? 아니면 애인? 아니면 오빠?”


진원이 혼자 원맨쇼를 하는 사이, 수은과 태하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


“내가 불을 켜 놓고 나왔나?”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나는 소리는 보이지 않아서인지 더 크게 들려서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래서 수은은 밤에 집을 나서기 전 항상 불을 켜두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태하가 옆에 있었기에 그녀는 무섭지 않은 척 태연하게 불을 껐다, 분명히!


수은은 집에 남자가 드나든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댔다.


“오빠가 왔나?”

“오빠 있어?”

“아닌가, 오빠 친군가?”


현관 앞으로 무겁게 한 걸음을 옮기는 수은과 달리 태하는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근데 집에 안…”


그녀의 말을 태하가 싹둑 잘랐다.


“오늘 신세 좀 질까 하는데, 같이 사는 친구가 여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하도 눈치를 줘서. 대신 내가 오늘 소설 쓰는 거 서포트 확실하게 할 테니까. OK?”


오늘따라 태하는 왜 또 이렇게 적극적인 건지… 수은은 이래저래 정신이 없었다. 오늘 밤 같이 있겠다는 태하 때문인지, 집안에 진원이 있을까 걱정이 돼서인지, 수은은 헷갈렸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수전증 있는 사람처럼 덜덜 떨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자, 거실 한가운데 소파에 떡하니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진원이 보였다.

“어머나,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수은이 당황한다. 그녀의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진원은 얼음장처럼 굳어있었다. 태하는 진원의 존재를 알아채고도 수은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왔다. 보통의 경우라면 태하가 피해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곁에는 방패막이되어줄 수은이 있었다.


그 누구도 피하지 않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수은이 횡설수설했다. 진원은 자신의 팔찌 상태부터 확인했다. 수은이 태하와 함께 있었지만, 팔찌는 푸른빛이었다. 위험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여태껏 자신은 이 둘이 만나는 순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진원이 숨을 몰아쉬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진원의 생각은 수은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존재임을 안 이상 태하가 섣불리 그녀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쪽으로 이른다.


진원은 며칠 전 상부의 메시지를 받고 확인을 못 한 게 생각 났다. 급한 일이 있다며 둘러대고 현관 쪽으로 걸어 나오던 진원이 움직임을 멈춘 채 돌아서서 태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역시 피하지 않고 진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 우발적 행동



탕감자 훈련받던 시절, 진원에게는 단짝 친구가 있었다. 자신은 소리를, 그 친구는 향기를 좋아해서 파트가 나눠지는 바람에 둘 다 무척 아쉬워했다. 파트는 달라도 두 사람은 간간이 만나 시간을 보냈다. 실습 삼아 인간 세상에 나가곤 했는데, 둘 다 인간 세상에 흥미가 많았기 때문에 서로의 경험담을 공유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쫓겨났다는 얘길 들었다.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 뒤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찾아 헤맸지만, 그에 관한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태하를 마주했을 때, 진원은 그 친구가 떠올랐다. 태하가 정말 그 친구라면, 그는 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까? 태하가 그 친구라면 자신은 왜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걸까? 그 친구가 갈취자가 됐을 리가 없다며, 진원은 고개를 내저었다.


진원이 상담실에 돌아오자마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지였다. 보안 때문에 서면으로 보낸 것을 그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거였다. 떨렸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지.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진원의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수은과 태하의 특별한 관계에서 빚어진 이상 현상이라고 했다.


“특별한 관계가 도대체 뭘까.”



진원이 돌아가고 난 후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수은이었다.


“지난번에도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두 사람 도대체 어떤 사이예요?”


너무 급작스러운 질문이라 태하가 멈칫한다.


“그냥 뭐 만나서 서로 별로 좋을 것 없는 사이 정도로 해 두지.”


요즘 두 남자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진 수은이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사이?”


태하가 더 당황한다.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 여자, 오늘따라 직설적이다. 질문은 던져놓고 답변이 두려운지 수은은 태하를 등지고 섰다. 그러자 에라 모르겠다, 태하가 수은을 뒤에서 안아버렸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번에 만나서 하는 걸로. 잘 자.”


그런데 이 남자는 왜 계속 반말일까? 근데 난 왜 익숙한 거지? 수은은 그제야 깨달았다.



동이 트자마자 진원은 수은에게 달려왔다.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혹시 사고가 일어난 그 당시 하루의 기억이 없는 겁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얘기했었나?”


진원은 그때 사라졌던 그 친구와 태하가 동일 인물임을 확신했다.



데스크에서 이설의 기사를 높이 평가하며 시리즈로 더 구체화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한 번으로 끝나길 바랐는데, 계속 시리즈로 쓸 생각에 이설은 가슴이 답답했다. ‘아, 맞다! 그 여자가 있었지!’ 이설은 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수은 씨? 강이설 기자예요. 기억하죠? 진원 씨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요. 만났으면 하는데요.”

“그래요.”


왜 그러냐고, 더 자세히 물으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는데 수은은 이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수은과 이설, 둘이 따로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함을 뚫고 이설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 우리 엄마 보고 많이 놀랐죠? 우리 엄마도 수은 씨 보고 무척 놀라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유가 궁금해졌어요.”


수은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이설은 막무가내로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았다.


“나 지금 당신 취재하는 거예요. 성수대교 붕괴 사건 피해자 가족으로.”


당당하기까지 한 이설의 모습에 수은은 말문이 막혔다.


“우리 엄마를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아니면 당신 엄마가 우리 엄마랑 아는 사인가요? 당신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기에 우리 엄마가 이런 상태가 된 거죠?”

“나는 본 것도 없고, 기억나는 것도 없어요.”


이어지는 이설의 답이 수은에게 독이 되고 만다.


“참 편하게 세상을 살았군요. 그만 일어나죠.”


수은이 싫다는 걸 굳이 데려다주겠다며 그녀를 차에 태운 이설이 다리 위에 차를 세웠다. 그러자 수은의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수은의 반응에 이설이 당황한다. 지난밤 이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계속 수은의 주변을 맴돌던 태하가 위기 상황임을 눈치채고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수은의 모습에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인 이설 역시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태하를 발견한 이설이 결국 울부짖는다.


“저 여자 좀 데려가! 꼴도 보기 싫어!”


이설을 노려보던 태하가 수은을 데리고 사라졌다. 수은에게 위기가 닥쳤음을 감지한 진원이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지만, 수은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수은만 찾는 진원 때문에, 이설은 격분한다.

“왜 다들 그 여자 때문에 난리들이야! 뭔데! 도대체 그 여가자 뭔데!”



진원은 수은에게 아무런 신호가 잡히지 않자 당황스러웠다. 곧장 수은의 집으로 갔지만 역시 그녀는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진원이 다시 집 밖을 빠져나가는 걸 보고서야 태하가 수은을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여전히 그녀는 바르르 떨고 있었다. 눈이라도 맞추면 좋으련만 수은의 눈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체온마저 점점 떨어졌다.


‘병원에 데려가야 할까? 아니면 탕감자인 그 남자에게 그녀를 넘겨야 할까?’


별생각이 다 들었지만, 태하는 어쩐지 자신이 해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순간 가빠졌던 그녀의 숨이 돌연 잦아들었다. 괜찮아지는가 싶었는데, 이대로 숨이 멈출 것처럼 점점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였다. 탕감자 진원이었다면 이 순간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재우는 방법 외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를 계속 위험한 상태로 두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 봐.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 뿐이라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러다 방법이 떠오른 듯 태하의 눈빛이 차분하게 변했다. 하지만 어쩐지 태하는 선뜻 수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수은을 향해 돌아선 태하가 그녀가 듣길 바란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지금은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어. 분명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할 거야. 그래도 나는 할 거야.”


태하가 덜덜 떠는 수은을 침대에 눕히고 가만히 손을 잡았다.


“내가 고통으로부터 널 잠재워 줄게.”


태하가 자장가를 부르자, 수은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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