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밝혀지는 진실
# 지워진 기억
수은이 어지럽힌 집을 현노가 치우긴 했지만, 주인 없는 집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제 만날 수 없는 대상이 돼버렸기에 태하는 더 답답했다. 혹여 그녀가 볼까 하는 마음에 자신이 붙여둔 메모는 읽은 흔적이 없었다. 깊숙한 곳에 둔 탓에 못 봤으리라,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녀를 찾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이 많다 보니 메모를 잘 보이는 곳에 옮겨 붙이는 게 맞는지 고민이었다. 탕감자의 기운이 점점 가깝게 느껴졌다. 사라져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진원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뭐라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할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태껏 알고 있던 법칙이 뭉개진 상태라 두 존재는 더더욱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진수은 어딨어!”
진원이 먼저 침묵을 깼다.
“알면서 뭘 물어? 아, 내가 나타나면 그 여자가 사라지는 건 아는데 어디로 가는 진 모르는구나?”
말 대신 몸으로 위협이라도 하려는 진원이 한발 다가서자, 태하도 지지 않고 다가섰다.
“장난하지 말고 어서 말해! 진수은 어딨어!”
빈정거리는 적대관계였지만 둘은 마치 싸우는 친구 같았다. 맞설 필요 없다는 듯 태하가 웃으며 답했다.
“정말 모른다니까. 혹 신은 알려나? 근데 이 여자 힘이 대단한가 봐? 내가 이렇게 너란 존재를 마주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면?”
그래도 한때 친구라 여기던 존재였는데, 진원은 맥이 풀렸다. 지치기는 태하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적대적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수은을 향한 걱정만큼은 공통분모였고,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강했다. 그 공통분모가 우선 시 되자 다시 대화가 재게 됐다. 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규칙만큼은 변함없을 거야. 내가 당신이랑 마주하고 있는 시간만큼 진수은의 수명이 짧아진다는 거.”
이에 지지 않고 진원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맞서듯 말했다.
“이번이 두 번째 갈취가 맞다면, 한 번 남았네. 그 이상을 넘어서면 내가 그 여자를 컨트롤할 수 없게 돼.”
갈취라는 말에 이번엔 태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그전엔 어떻게 컨트롤할 수 있는데? 이제 어떡할 건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일을 저질러 놓고 진원 보고 어떡할 거냐니. 얼마나 절박하면 자신을 다그칠까 싶어 진원은 태하의 행동이 어이가 없어도 화를 낼 수 없었다.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고 서서 감정을 추스른 진원이 입을 열었다.
“먼저 네가 기억해 내야 할 게 있어.”
진원의 생각에 따라 과거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걸 태하가 지켜봤다.
진원과 태하는 수련 기간 중 알게 된 사이였다. 둘은 말 수는 적으나 호기심은 가득해 마음이 통했다. 다양한 특기 중 같은 것을 선택하리라 생각했는데, 그 부분만큼은 의견이 갈렸다. 태하는 향기를, 진원은 소리를 선택했다. 둘은 다른 분야였지만 서로 습득한 기술을 공유했다. 그러던 중 태하가 인간 세상에 실습을 나갔고, 그 뒤로 진원은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수소문을 하던 중 진원은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가 전해 들은 소식에 의하면 태하가 실습 나간 시기는 인간 세상의 시기로 1994년 10월. 한 달간 머무는 일정이었다. 때마침 태하는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마주했고,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다. 사고로 가족을 전부 잃은 여자아이가 너무 가여워 사건 당일의 기억을 지운 것이다. 인간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은 수장급 정도나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건데, 태하는 아마도 인간으로 치면 천재쯤 된 것 같다고 했다. 그 뒤로 태하가 어떻게 됐는지 들을 수 없었다. 기억이 삭제된 채 추방되었다는 얘기만 나돌 뿐이었다.
진원이 하늘에 펼쳐진 잔재를 지우고는 태하를 바라보며 얘기를 이어갔다.
“그간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조합해 보면, 그 여자아이가 ‘진수은’이고, 벌을 받아 기억을 빼앗기고 쫓겨난 게 바로 너겠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태하가 진원이 말릴 새도 없이 사라졌다.
“할 말이 참 많았는데… 툭하면 말없이 사라지는 버릇은 여전히 못 고쳤구나.”
진원은 태하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바라봤다.
“제발 나쁜 마음만은 먹지 말아 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고개를 세차게 내젓던 진원이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니야! 이제부터 그녀를 찾아야지!”
그러고 보니 이설의 엄마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태하가 동시에 두 사람의 잠을 갈취한 것일까. 진원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단서 수집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맞기도 하면서 태하는 계속 걸었다. 얽힌 인연의 시작이 자신이었다니. 기억나진 않았지만 분명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간절히 그 소녀가 행복하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행동은 옳지 않았다. 수은은 고통을 외면한 채 혼자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자신은 무얼 해야 한단 말인가. 넋이 나가 돌아다니는 태하의 존재는 탕감자들에게도, 갈취자들에게도 위험의 존재라는 듯 경고로 표시되었다. 이들의 경고 표시는 전해지고 전해져 결국 수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공원에 앉아 말없이 한강을 바라보던 태하가 결심이 선 듯 일어섰다. 도서관으로 향해 무언가에 홀린 듯 검색을 하고 신문 기사를 복사했다. 사이사이 시계를 보면서. 얼추 만족할 만큼 자료가 준비되자 수은의 집으로 향했다.
빈집일 거라 생각했는데 진원이 있었다. 있거나 말거나 지금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태하는 수은의 작업실 한쪽 벽면을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로 도배했다. 진원이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고, 태하는 그의 시선이 불편했다.
“내가 갈취하는 이상, 진수은은 아무도 못 건드려.”
위험할 일 없으니 그만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의 모든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알았다는 듯 진원은 말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태하의 행동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태하는 그녀의 기억을 지운 당사자였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기억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순 없었다. 강제 추방당하면서 태하 역시 능력을 빼앗겼으니까. 기억을 되돌리기만 하면 수은은 온전해지는 것일까. 진원 역시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어 있는 벽 앞에 그가 굳은 다짐을 한 듯 섰다. 사고 발생 당일, 사건 개요부터 이후의 과정까지 시간별로 정리해 내려갔다. 오전 7시경 사고 발생. 자체 구조 시작. 00시 구조팀 도착. 00시 시신 병원 영안실 안치. 사망자 서른두 명의 명단 중 수은의 엄마, 아빠, 오빠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친다. 다시 시계를 보는 태하.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