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개가 넘는 궁중 에티켓을 지키라고요?
타야 할 비행기 편의 마지막 탑승 안내라는 방송이 흘러나오는 샤를 드골 국제공항.
마카롱 한 상자를 주문하며 , 진짜 진짜 시간이 없다, 비행기 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냥 대충 포장해 달라며 울상을 짓고 있었습니다. 라 뒤레의 점원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우아하게 팔과 손을 슬로비디오로 움직여 상자에 리본까지 완벽하게 둘러 맨 후, 좋은 여행 되라는 인사와 함께 하늘빛 상자를 건네주었습니다.
아니, 마카롱 담아주는 상자가 이렇게 고급져도 되는 거야?
상자를 받아 들고 게이트를 향해 숨이 턱에 닿도록 뛰면서 든 생각입니다.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 문양이 또박또박 금박으로 박힌 하늘색 상자에 베르사유 궁전(Chateau de Versailles) 단어도 단정하게 물려있습니다. 값은 내가 치렀는데 파리가 건네는 선물을 받은 느낌이랄까요.
달콤한 마카롱의 맛을 더욱 살려주는 절제된 화려함의 전형을 보여주는 포장을 볼 때,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격조 높은 음악이 흐르는 완벽한 분위기로 음식의 맛을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레스토랑에 앉아 있을 때,
단순한 소지품 보관의 기능을 넘어 패션이 되어버린 유명 브랜드 핸드백을 유난히 갖고 싶은 어느 날,
이 때가 바로 루이 14세가 찬란히 꽃 피운 베르사유 시대가 탄생시킨 욕망이 꿈틀대는 시간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우리가 서구식이라고 알고 있는 건축과 정원의 양식, 가구와 조명 등 실내 인테리어의 발원지이며, 세계 명품 시장을 거머쥐고 있는 브랜드의 시원이자, 향수와 부츠, 하이힐이 첫 선을 보인 곳이지요. 역사상 유례없는 유행과 취향으로 프랑스가 물들었던 정점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습니다.
루이 14세(1638~1715)는 23년 만에 왕위의 계승자로 태어나 '신의 선물'이라는 호칭을 받았지만 다섯 살에 아버지인 루이 13세를 여의고 왕이 됩니다. 모후인 안 도트리슈가 섭정을 하는 동안 왕실을 위협하는 크고 작은 반란들을 지켜보며 루이 14세는 왕권강화를 신이 내린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적으로 왕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던 루이 14세는 스스로 태양왕이라 부르며 자신을 빛나게 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 베르사유 궁전을 짓기 시작(1662년)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동시대 프랑스 최고의 부를 가졌던 푸케의 대저택 보-르-비콩트(Vaux-le-Viconte)를 모델로 지었습니다. 자신과 경쟁하는 인간을 용납 못한 루이 14세는 정치적 계략을 펴 푸케를 하루아침에 몰락시키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했지요. 그리고는 푸케의 저택을 지었던 건축가들로 하여금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게 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사냥철마다 왕의 임시거처로 사용되던 별장이 있던 곳에 지어졌습니다. 이곳은 원래 모래언덕과 늪지대였습니다. 왕궁을 짓기 위해 땅을 개간하고 파리의 센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건설하는 거대한 공사를 시작으로 50년 동안 매년 삼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대정원의 첫 삽을 뜨는 것을 시작으로 기존 건물 위에 층을 쌓고 날개 건물을 신축합니다. U자형 건물이 완성되자 베르사유 궁전은 새로운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1682년에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왕의 모든 것을 옮겨와 본격적인 베르사유 시대를 시작합니다. 이후로도 베르사유 궁전은 계속해서 넓어지고 깊어지며 화려한 변모를 계속하지요.
《짐은 곧 국가다》라고 할 만큼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을 확립하여 왕의 권위를 드높였습니다. 또한 프랑스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창조적인 시대를 열어젖혔습니다. 유명 요리사, 유명 패션 디자이너, 유명 헤어드레서가 세계 최초로 등장해 왕실과 귀족문화를 한층 더 우아하고 고상하며 고급스럽게 발전시켰지요. 오트 퀴진 ( haute cuisine 프랑스 궁정 문화에 뿌리를 둔 전통적인 고급 요리)과 오트 쿠튀르 (Haute couture 고급 의상실)는 싹을 틔우자마자 하룻밤이 지나면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재크의 콩나무처럼 발전했습니다.
베르사유 시대에 세련된 궁정 예법을 일컫는 에티켓이라는 단어가 생겼습니다. 에티켓에는 만찬의 진행순서와 좌석 배치,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왕이나 왕의 가족에게 옷을 입히는 일과 세수를 시키는 일, 코를 풀게 하는 일에도 격식이 있었고 담당자도 각기 따로 지정되는 등 800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귀족들과 관료들은 에티켓을 숙지하여 왕의 권위에 복종과 찬사를 표현했습니다.
이제 늠름하게 말을 타고 있는 루이 14세의 동상이 맞아주는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8만 제곱미터의 면적 위에 궁전 건물과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궁전 건물은 한꺼번에 2만 명이 2,300여 개의 방에 나누어 모일 수 있는 규모입니다. 2,143개의 창문으로 궁전 이곳저곳을 전망할 수 있습니다. 태양의 신 아폴론을 너무 숭배하다 신이 되어버린 착각에 빠진 걸까요. 루이 14세는 자연마저 정복하고픈 욕망에 넓게, 넓게, 드넓게 궁전에 정원을 펼쳐놓습니다. 화려한 아폴론 분수를 필두로 천 개가 넘는 분수가 알알이 들어찬 정원이 보입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인공호수에 띄운 곤돌라를 타고 왕과 귀족들은 폭죽놀이를 하며 베르사유 궁전을 만끽했습니다.
아직 구글맵이 등록하지 못한 정원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다는 소식도 들려오니 부디 길을 잃지 마세요.
베르사유 궁전 본관 2층에 있는 거울의 방은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을 잇는 회랑입니다. 이곳에서 왕족의 결혼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등이 이루어졌으니 베르사유 궁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울의 방은 보불전쟁 패배 후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1871년)하는 모멸감을 맛보다, 제1차 세계대전 독일이 패배를 인정(1919년)하는 장면을 통쾌하게 지켜본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숨이 막힐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이곳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파티가 열렸다니 거울의 방에 있는 거울이 사람이라면 대단한 안목을 가진 파티플래너가 되지 않았을까요.
프랑스를 문화강국으로 키워가기 위해 맘이 바쁜 루이 14세는 최고급 사치품인 거울 생산이 맘대로 되지 않아 골치를 앓았습니다. 당시 최고의 거울은 베니스에서 만들었지요. 베니스의 기술이 탐난 왕은 거액의 뇌물로 베니스의 기술자들을 매수, 스카우트에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니스에서 자객을 보내 변절한 기술자들을 모두 살해하는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결국 프랑스산 거울 생산은 시작도 못하고 끝이 납니다. 루이 14세는 거금을 주고 베니스에서 만든 거울을 들여와야 했지요.
거울의 방은 길이 73m, 폭 10.5m, 높이 13m로 길쭉한 사각형입니다. 정원이 보이는 17개의 창 맞은편에 같은 모양의 아케이드 벽을 만들어 한풀이하듯 무려 357개의 거울로 채웁니다. 우아한 아치형 천장에는 궁정화가 샤를 르 브룅이 그린 프레스코화가 화려함을 더하고 있습니다. 17세기에 살았던 귀족처럼 천천히 뒷짐을 지고 쓰다듬고 올려다보며 거울의 방을 거닐고 싶어 집니다.
거울의 방의 북쪽 끝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쟁의 방이 있습니다.
대리석과 황금 등 고가의 재료를 사용하여 매우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루이 14세의 조각상이 여전히 말을 타고 달립니다.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싼 방사형의 길들이 궁전을 향해 모이고 이 길들은 알현과 의전을 겸하는 왕의 침실에서 교차합니다. 그중 가운데 직선은 궁전과 파리를 잇습니다. 왕의 침대에서 전체 배치의 절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루이 14세가 잠옷 차림으로 눈을 비비며 침실의 문을 여는 것으로 궁전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태양왕의 이름에 걸맞는 기가 막힌 배치입니다.
절대왕정의 아이콘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세상의 호사를 다 누렸던 루이 14세가 곧 왕이 될 루이 15세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입니다.
나를 닮지 말거라.
화려한 건축물에 마음을 쏟지도 말고 전쟁을 좋아하지도 말아라.
이웃나라와 싸우기보다 화친하도록 애쓰거라.
늘 신을 경건히 섬기고 백성들이 신을 편안히 섬길 수 있게 돕거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루이 14세가 스스로 내린 삶의 평가는 '(이렇게 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입니다.
마리 앙투와네트(1755~1793)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앙숙관계였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를 동맹으로 묶을 정략결혼으로 루이 16세의 왕비가 됩니다. 왕실에서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작은 요정'으로 불리며 사교계를 주름잡았고, 11년 만에 후계자를 낳았으며, 부패와 사치의 대명사가 되어 민중의 미움을 있는 대로 받다가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사라진 파란만장한 운명의 여인 마리 앙투와네트.
유럽 귀족들 사이에 그림으로 그린듯한 아름다운 정원이 인기를 끌자 마리 앙투와네트도 궁정 건축가에게 호숫가 작은 마을을 짓게 합니다. 왕비의 집과 당구장, 물방앗간, 버터 만드는 집, 고기잡이 탑 등 모두 마리 앙투와네트를 위한 거대한 소꿉장난의 집 열두 채로 이루어진 이곳이 왕비의 마을 (Hameau de la Reine)입니다.
루이 16세조차도 허락을 받아야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왕비의 사적인 공간으로 인정한 이곳에서 마리 앙투와네트는 식물을 키우고 양의 젖을 짜며 왕비로서의 책무를 벗고 자유롭게 생활합니다. 한밤중에 베르사유 궁전을 산책하다 맘이 내키면 파리로 나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지요. 모든 격식을 벗어던지고 좋아하는 사람과 카드를 치고 파티를 열며 사생활의 즐거움을 찾아갑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그녀의 자유였습니다. 실제로 가능하기도 했겠지요.
"저 가여운 아이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이세요"라고 했다는 말은 민중의 분노를 이용하기 위한 혁명정부의 의도적인 흠집 내기로 밝혀졌지만 그녀의 삶에 비추어보면 '빵이 떨어지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생각은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Marie Antoinette Syndrome》을 아시나요?
극심한 압박감, 공포와 슬픔으로 인해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버리는 현상을 일컫습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인간사 최악의 나락을 왕비 시절 한없이 높게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한 것을 보며 실감했을까요.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고를 낭비하고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다 20세기 초《 '앙시앙 레짐(프랑스혁명 이전의 옛 제도)'시기에 왕실이 거주했던 왕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인정받아 중앙부가 예전 왕실이 사용했을 때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루이 14세가 풀어놓은 길고 화려한 베르사유 시대의 리본은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 속에 마리 앙투와네트로 매듭지어졌습니다.
이제 라 뒤레 마카롱 상자에 두른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어 라즈베리 마카롱을 크게 한 입 베어 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