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이야? 박물관이야!
루브르에서 하루 종일 맴도는 날입니다. 옷차림은 가볍게, 루브르를 위해 챙겨 온 걷기 편한 신발로 갈아 신고 나서는 길에 설렘과 호기심이 동행합니다. 작은 물병 하나, 손때로 반들반들한 카메라도 가방에 넣었지요. 김동율의 출발 노래가 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아 루브르를 탐험하는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센강이 자연스럽게 침략에 대한 방어를 해주는 시테섬은 파리지 (Parissi) 부족이 처음 정착한 곳으로 파리의 기원이 됩니다. 파리지 부족의 이름에서 파리의 이름이 시작되지요.
루브르 궁전은 12세기 중반 필리프 2세 (1165~1223)가 영국의 침략에 대비해 탑과 2개의 건물을 갖춘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를 지으며 역사에 처음 등장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여러 왕들의 입맛에 맞게 개조되며 프랑스 역사의 산실이자 심장이 되어 지금까지 박동하고 있습니다. 루브르 궁전이 박물관으로 변모하는 과정에 돋보이는 왕들의 집중적인 컬렉션들로 지금의 루브르가 근접할 수 없는 박물관의 위용을 갖추게 되는 과정을 살짝 들여다볼까요.
프랑스 르네상스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수아 1세는 루브르를 프랑스의 수도에 걸맞은 궁전으로 변모시킵니다. 이후 샤를 9세가 센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쁘띠 갤러리를 증축하고, 앙리 4세와 그의 아들 루이 13세가 그랑 갤러리를 짓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에게 내부 장식을 맡기지요. 이때 루브르 궁전은 중세의 답답함을 지우고 화려한 장식과 왕실의 소장품들로 단장하며 왕실의 궁전으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앙리 4세는 부르봉 왕조의 시조입니다. 여자를 너무나 밝혀 정부만 56명을 두었다지요. 리슐리외관 3층 메디치 갤러리에 그의 두 번째 왕비인 마리 드 메디치의 일생을 다룬 루벤스의 연작이 있습니다. 다리와 광장, 운하 등을 건설하여 파리의 도시정비를 도모한 앙리 4세를 기념하여 그의 청동 기마상이 퐁뇌프 다리에 세워져 있습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흠뻑 취해 루브르를 잠시 멀리했을 때 궁전의 일부가 지붕도 없는 상태로 다양한 작업장이자 숙소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루이 14세 이전 왕실 컬렉션은 백여 점도 채 되지 않아 컬렉션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을 장려한 루이 14세는 예술품 수집에 열광하며 닥치는 대로 구매하고 빼앗다시피 들여옵니다. 루이 14세 때 이르러 황실 컬렉션이 3천여 점에 이릅니다. 루이 14세는 화가들을 국가적으로 양성하고 후원하며 유럽 예술의 중심축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가져오지요. 한 때 루브르 궁전을 멀리했다지만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 말을 탄 루이 14세 동상이 차지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를 모두 손아귀에 쥐고 싶어 한 정복왕 나폴레옹은 전쟁 중에 약탈한 어마어마한 예술품들을 보관하기 위해 600년 동안 왕들의 거처였던 루브르를 박물관으로 바꿔버린 주인공입니다. 가장 많은 관람객들이 거쳐가는 드농관의 전시작들이 나폴레옹 컬렉션입니다. 드농관의 이름은 나폴레옹이 첫 번째로 임명한 예술감독인 고고학자 도미니크 비방 드농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그는 나폴레옹과 함께 전쟁터를 오가며 이집트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약탈한 수많은 미술품을 정리할 책무가 있었지요. 침공한 나라들의 궁전, 박물관, 성당에 닥치는 대로 쳐들어가 찬탈한 예술품이 5천 점이 넘습니다. 그는 특히 대작을 빼앗아오고자 머리를 굴리고 힘을 쏟습니다.
나폴레옹 군대의 최고의 전리품으로 지목되는 <가나의 혼인잔치, 1562>는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 중 가장 큰 벽화입니다. 원래 베네치아 공화국의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의 수도사 식당 뒷벽화로 파올로 베로네세가 그렸습니다. 가로 9.94m 폭이 6.77m 크기의 가나의 혼인잔치는 235년 동안 수도사들의 식당 벽을 장식하며 수많은 제왕과 귀족들이 선망하고 탐내던 걸작이었습니다. 잔치가 열리는 저택에 130명의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포즈로 각자의 자리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이 벽화는 가나에서 열린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수도원에 침입한 후 곧장 수도사들의 식당으로 직행합니다. 수도사 식당 창문으로 들어온 빛을 받으며 예수의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처럼 빛나던 벽화가 군인들의 작업으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로 갈라지며 식당 바닥에 떨어집니다. 이를 지켜보던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는 반으로 잘려 카펫처럼 둘둘 말려 루브르로 옮겨진 뒤 다시 꿰매 집니다. 꿰맨 원본은 숨이 턱턱 막히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복제본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 수도원의 식당에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정복을 떠나기 전 이집트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제대로 약탈하기 위한 발굴단까지 꾸리는 치밀함을 보이며 선사시대부터 4천5백여 년의 세월을 통째로 훔쳐와 이집트 전시실에 부려놓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날뛰는 도적이자 장물아비가 바로 나폴레옹이었던 셈이지요. 역사를 어떻게 되돌려야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까요. 역사를 되돌릴 수 없을 때는 현재의 수레바퀴를 제대로 간수해야겠지요. 죽었다 깨도 반으로 잘린 후 꿰맨 흔적이 있는 진품 가나의 혼인잔치는 베네치아에 일렁이는 물결을 볼 수 없을 테지요.
1776년 루이 16세는 창고에 방치해 둔 거대한 왕실의 유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 복원하며 박물관으로서의 초석을 마련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마침내 1793년 루브르 박물관은 중앙 예술 박물관으로 공식 개관하며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 예술 문화의 성지가 됩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가 그린 모나리자는 어떻게 루브르에 걸리며 루브르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프랑수아 1세(1494~1547)와 다빈치를 역사에서 불러내 살펴봅니다.
프랑스의 젊은 왕 프랑수아 1세는 영토확장에 의욕을 불태웠습니다. 1515년 12월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왕은 전리품으로 바티칸 박물관 개관기념 작품인 <라오콘 군상>을 요구합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차마 빼어난 조각상을 패배의 상징으로 바칠 수 없어 청동으로 만든 모조품을 건네지요. 이미 이탈리아 예술에 흠뻑 빠진 프랑수아 1세가 얼굴을 찌푸리며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자 교황은 이탈리아 최고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소개합니다. 프랑수아 1세는 한눈에 천재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듬해 그를 프랑스 앙부아즈로 모셔갑니다. 바티칸에 혜성처럼 등장한 두 신예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 충분하니 63세의 노쇠한 다빈치는 더 이상 이탈리아에 쓸모가 없다고 교황은 여겼던 걸까요.
르네상스는 신에서 인간으로 관심사를 다시 옮겨온 것으로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프랑스에 르네상스의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종교적 인물들을 인간 세계로 불러 내려 따뜻하고 정감 있게 그려낸 개척자였습니다. 그림을 하나씩 완성할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지요. 타고난 재능을 살려 노력하는 이가 진정한 의미의 천재가 아닐까요.
다빈치는 미완성 작품 3점을 가지고 프랑스로 갑니다. <성 안나와 성 모자>, <세례자 성 요한>, 그리고 <모나리자>였지요. 프랑수아 1세는 아버지뻘인 다빈치를 궁전 최고의 화가로 임명하고 극진한 예우로 후원합니다. 두 사람은 왕의 접견실에 다정하게 마주 보고 앉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테지요. 프랑수아 1세는 허연 수염을 길게 기른 다빈치를 무척 아꼈습니다. 세상 모든 진리를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의 눈에 매료된 것은 아닐까요. 다빈치는 왕이 하사한 저택 클로 뤼세에서 말년을 보내며 그림을 그리고 놀라운 궁합의 음식을 창조하며, 듣도 보도 못한 복잡한 물건들의 설계도를 그려냅니다. 나이가 들어도 그의 호기심과 열정은 사그라들지 않았던 거지요.
지금도 많은 학자들은 그의 노트에 적힌 천재적인 발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지요. 다빈치는 죽기 얼마 전 자신의 노트에 < 우주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 >라고 쓰며 자신도 어두운 우주공간으로 소멸되어 갈 것을 예언합니다.
다빈치는 프랑스로 건너온 지 3년 만에 프랑수아 1세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둡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 국왕이여, 주인이여, 신이여!"라는 말을 남깁니다. 자신을 아끼고 후원했던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라도 한 점 남겼더라면 그토록 애타게 프랑수아 1세를 부르지 않았겠지요.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켜주는 왕을 부르는 것으로 고맙고 미안한 맘을 전했을까요. 프랑수아 1세는 다빈치가 가장 아낀 그림 <모나리자>를 자신의 초상화 인양 루브르로 가지고 옵니다. 다빈치는 자신의 고국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 앙부아즈 성의 위베르 성당에 안치되어 500년을 넘기며 그를 기리는 사람들을 누워서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가장 높은 가격의 그림, 가장 신비로운 그림 모나리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프랑스의 자랑 모나리자(Mona Lisa)는 리자 부인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작품명은 '라 조콘다'입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피렌체 출신 거상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의 둘째 부인 '리자 게라르디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35세의 남편과 결혼한 16세의 앳된 두 번째 신부가 24살이 되었을 때 모습입니다.
오로지 모나리자만을 위해 드농관의 공간을 할애한 전시실에 들어서면 작은 그림을 보려고 잔뜩 몰려있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모나리자는 어떻게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전 인류의 연인이 되었을까요.
다빈치는 빛과 어둠이 빚어내는 신비스러움을 그림에 녹여내기 위해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화법을 창안합니다.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sfumare'에서 비롯된 스푸마토 기법이지요. 사물이나 인물의 윤곽을 흐릿한 경계로 배경 속에 녹여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신비스러운 기법입니다. 인물과 배경의 색을 칠한 후에 다빈치는 손가락으로 윤곽선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경계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빈치의 타고난 감각이 잠자는 재능을 깨웠기에 가능했겠지요.
<모나리자>는 4번 루브르를 떠났습니다.
자신의 침실 벽에 <모나리자>를 걸어두고 혼자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던 나폴레옹을 위해 한 번.
1911년 도둑을 맞고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았던 2년간. 모나리자 스캔들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의 파리 침공 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처로 이동.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캐네디의 간곡한 부탁으로 워싱턴과 뉴욕 전시 (1963).
드 넓은 드농관 전시실의 한 공간을 뚝 떼어낸 모나리자 전시실은 루브르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모라리자를 만날 때는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미션이 주어집니다. 그래야만 시대를 앞서간 천재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제대로 만날 수 있으니까요.
다빈치는 숨을 거둘 때까지 모나리자 초상화를 곁에 두었습니다. 다빈치는 무엇 때문에 초상화의 주인공에게 그림을 건네지 않았을까요. 가장 유력한 설은 다빈치가 어려서부터 떨어져 지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초상화에 덧칠하다 결국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며 모라리자는 더욱 신비스러운 베일을 드리우며 미완의 작품으로 루브르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루브르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루브르 피라미드를 거쳐야 합니다.
루브르 궁의 안뜰인 나폴레옹 광장에 설치된 이 유리 피라미드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관람객들을 터미널이나 국제공항의 중앙 홀 역할을 하는 넓은 로비로 내려오게 한 다음 주요 루브르 전시관들로 올라가는 출입구입니다. 커다란 출입구 피라미드를 3개의 작은 피라미드가 둘러싸고 있지요.
이 유리 피라미드도 에펠탑처럼 루브르에 자리를 잡기 전부터 거부와 논란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관람객들을 감당하기에 기존 출입구는 턱없이 협소했습니다. ‘건축 대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 박물관의 협소하고 불편한 출입구를 확장하여 새로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건축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고, 미국의 케네디 도서관과 댈러스 시청 등을 설계하며 스타 건축가의 반열에 오른 중국계 미국인 이오 밍 페이 (1917~2019)에게 루브르의 새로운 출입구 사업을 맡겼습니다. 그가 유리 피라미드를 세워 출입구로 삼겠다고 설계안을 1984년에 발표하자 프랑스 전체가 들고일어납니다. 싸구려 유리 피라미드 출입구는 필연적으로 루브르의 외관을 망치고 결국은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파리의 이미지마저 깨뜨린다는 비난이 빗발처럼 쏟아졌습니다. 파리의 건축 전문가들은 유리 피라미드를 ‘피부 깊숙이 박힌 암세포’라는 말로 핀잔과 비난과 거부의 몸짓을 퍼붓습니다. 일간지 <르 피가로>는 유리 피라미드 설계에 반대하는 독자 운동을 이끌고, 당시 루브르 박물관장은 사표를 던지며 온몸으로 거부합니다. 이오 밍 페이가 루브르로 가기 위해 파리 시내를 걸어갈 때면 파리지앵들은 노골적인 분노의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고 합니다. 돌멩이만 손에 쥐지 않았지 폭력에 가까운 인종차별 발언도 이오 밍 페이는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습니다.
반대 여론이 들끓었지만 미테랑 대통령은 이오밍 페이를 적극 지지하며 그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습니다. 마침내 마름모 모양 유리 603개, 삼각형 유리 70개와 스틸을 이용한 유리 피라미드 출입구가 1989년에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궁전의 본채를 유리를 통해 볼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파리 시민들은 흡족해했고 언론들도 천재의 작품성이 돋보인다며 추켜세웠지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한 곳에서 조율하기가 쉽지 않지만 옛것은 그대로 살리면서 현대로 끌어오는 현명한 리모델링의 표본이 유리 피라미드 아닐까요.
조명을 받아 따뜻하게 빛나는 유리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인생 사진 한 컷 찍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