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살았던 두 남자 이야기
크로와상 빵과 커피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벨베데레 궁전으로 갑니다.
크로와상 빵 이야기를 해 볼게요.
빈의 빵가게 주인 피터 벤더는 오스만 튀르크 병사들이 땅굴을 파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관아에 신고하여 그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적을 세웁니다. 그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깃발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피처'라 이름 짓고 빵가게의 주력상품으로 판매합니다. 피처빵은 빈 시민들의 입 안에서 오스만 튀르크가 되어 오물오물 씹히며 쾌감을 선사하지요.
루이 16세와 정략결혼 후 프랑스로 건너간 마리 앙투아네트는 빈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피처빵을 만들어 달라고 특별 주문을 합니다. 왕실 제빵사는 소박한 피처빵에 버터와 이스트를 첨가해 왕실가 사람들의 입맛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빵을 만들어 르 크루아상, 초승달 빵이라 부릅니다. 부드럽고 고소한 크로와상 빵과 모닝커피를 마시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쇤부른 궁전에 다시 돌아온 듯 매력적인 웃음을 되찾습니다. 그러자 귀족들과 서민들도 그녀를 따라 아침으로 크로와상을 커피와 곁들입니다.
황태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침 메뉴는 세기를 지나 대륙을 건너 티파니 보석 백화점 앞 오드리 헵번에게로 이어집니다. 크로와상 빵 하나에도 이야기가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빈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오이겐 장군 (Eugen 1663-1736)이 꼭 등장합니다. 그는 유럽 역사의 굵직한 전투마다 승리하는 탁월한 책사이자 군인이었습니다. 파리 왕실에서 자란 그는 왕실 군대에 입대하겠노라 루이 14세에게 청합니다. 볼품없는 생김새에 작은 키의 오이겐 장군이 눈에 차지 않은 루이 14세는 군대가 아닌 사보이 공국의 왕자로 그를 보내버립니다.
오스만 튀르크 전투에서 형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오이겐 장군은 거추장스러운 왕자의 옷을 벗어버리고 오스트리아로 달려가 군대에 입대합니다. 그는 형의 원수를 갚듯 전투마다 승전고를 울리며 타고난 군인임을 만천하에 드러냅니다. 그가 오스만 튀르크 군대를 물리쳤을 때 크로와상의 원조, 피처 빵이 등장했지요.
오이겐 장군은 30세에 사령관이 되어 가톨릭 연합군을 지휘하며 군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문 역할을 하며 황실 최고의 고문 자리에 앉습니다.
스페인 계승 전쟁에서 루이 14세는 오이겐 장군에게 크게 패합니다. 루이 14세는 천하의 명장 오이겐 장군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었을까요? 오이겐 장군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눈빛이 형형했다는데 작은 키와 생김새로만 그를 판단하여 군입대를 거절한 자신을 책망했겠지요. 그래서 사람을 볼 때 눈을 꼭 한 번은 맞춰야 하나 봅니다.
오이겐 장군이 세운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궁전 벨베데레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오이겐 장군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살았을 때부터 그 이유에 대해 추측이 무성했지요. 오이겐 장군은 그에 대해 어떤 말도 빼거나 보태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할 일과 하고픈 일에 매진합니다.
오이겐 장군은 부와 권력을 여름 궁전 벨베데레를 짓는데 쏟아붓습니다. 그래도 남아도는 재력을 예술을 후원하는데 쓰지요. 그는 빈 역사상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습니다. 책도 엄청 수집하여 소장한 장서의 규모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였고, 연금술에 관심도 많아 신비주의자라 불려지기도 합니다. 오이겐 장군은 이미 가질 만큼 가졌는데도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어 어디에 쓰고자 했을까요.
벨베데레 궁전은 프랑스풍 바로크 양식을 처음 도입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설계했습니다. 벨베데레는 '궁전이나 주택의 위층 또는 정원의 높은 곳에 지은 전망대'입니다. 벨베데레 궁전은 기막힌 전망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전망대를 가진 궁전인 셈입니다. 오이겐 장군은 벨베데레 궁전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을 잔뜩 풀어놓고 오늘은 여기에서 어슬렁, 내일은 저기에서 어슬렁거리며 눈을 호강시키고 곤두선 마음을 달랬을 테지요.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지체 높은 이들은 눈에 보이는 풍경마저도 바꾸고 가꾸고 부리고 싶은가 봅니다.
나무들이 숨바꼭질하기에 맞춤으로 식재된 정원을 지나 개선장군처럼 벨베데레 상궁과 하궁를 잇는 긴 길을 따라 걷습니다. 넓게 드리워진 정원에 구리를 금으로 바꿀 주문이라도 되는 냥 물과 불, 흙과 공기의 상징을 새겨 넣었습니다. 인간계를 뜻하는 정원과 신의 영역인 궁전 건물을 스핑크스 조각상이 구분 짓고 있습니다.
오이겐 장군은 연금술로 마이더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을까요. 아니면, 절대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스핑크스 조각상이라도 세워 신의 거처를 흉내 내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에서 더 이상 성취하고 가질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이 되고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삼키나 봅니다.
독신이었던 오이겐 장군이 사망한 뒤 모든 재산은 한참을 헤아리고 건너 띄어야 하는 촌수의 조카가 물려받습니다. 벨베데레 궁전도 그의 수중으로 넘어가지요. 남보다 못한 이 조카는 오이겐 장군의 유산을 가꾸고 빛낼 어떤 의지도, 능력도 없었나 봅니다. 누가 주인이 되든 상관없다는 식으로 재산들을 팔아넘기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합스부르크 황실이 부랴부랴 벨베데레 궁전을 구입해 증축하고 수집한 예술품들을 보관하게 됩니다. 벨베데레 궁전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해 1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살던 곳이기도 하지요.
벨베데레 궁전의 첫 관문인 현관에 들어서면 귀퉁이 한쪽에 자리 잡고 서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과 기둥 네 개를 각각 떠받치고 있는 헤라크레스가 우리를 반겨줍니다. 지혜와 용기로 온갖 박해를 견디고 시련을 거뜬히 헤쳐나간 헤라클레스는 어찌 보면 오이겐 장군이 죽어서라도 따르고 싶은 멘토였겠지요. 아, 정말 오이겐 장군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게 맞나 봅니다. 그리고 이 기둥에 조각된 여러 문장과 무늬들을 들여다보고 해석하던 학자들은 그가 프리메이슨과 비슷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꾸려나갔을 것이라 유추합니다.
절대 외부 전시가 안 되는 그림이 3점 있습니다. 오로지 그림이 전시된 이곳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작품들이지요. 그러니 이도시에 갔다면 놓치지 말고 꼭 눈과 마음에 넣어오는 걸 잊지 마세요.
1. < 모나리자 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3~1519,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
2. <키스 The Kiss , 구스타프 클림트, 1907~1908,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궁전>
3. <게르니카 Guernica, 파블로 피카소, 1937,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바쁜 일정으로 키스를 못 보고 빈을 떠나는 공항에 도착했다니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못 보았다면 빈을 떠나지 말라>며 빈 국제공항이 한 번 더 당신을 빈 시내로 밀어낼 수도 있답니다.
벨베데레 궁전은 키스를 전시하며 빈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황금빛에 둘러싸인 연인이 꽃들을 즈려밟고 입맞춤하려는 찰나를 영원히 화폭에 봉인하며 Der Kuss라고 이름 붙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어인 The Kiss가 익숙하지요. 사람들이 갖추고픈 모든 것을 캔버스에 쏟아부은 The Kiss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황금, 꽃밭, 연인. 더 필요할 게 없는 우리 삶의 필요충분조건을 완벽히 갖춘 그림이니까요.
클림트는 급하면서도 내성적이었습니다. 참을성도 없었고 뭐든 자기 맘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길게 풀어썼지만 한마디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모난' 성격 인 셈이지요. 그는 자화상을 하나도 남기지 않은 화가로도 유명합니다. <나를 알려거든 나의 그림을 보라>며 화가인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어깨를 돌려세워 그가 그린 그림에 눈 맞추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림에 매료되면 화가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클림트는 금속을 물감처럼 다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가 건축장식, 벽화 기법 등을 배웁니다. 국립극장, 박물관이나 교회의 벽화, 극장 무대의 커튼 등 장소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는 토털 아티스트였습니다.
클림트는 점점 천재적인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굵직한 프로젝트 그림도 주문받습니다. 클림트가 완성한 빈 대학교 강당의 천장 벽화 그림으로 빈이 술렁입니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천장화를 올려다보며 깊은 사색을 하기를 바랐던 교수들은 그림을 보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체의 여인들이 어둡고 모호하며 절망스러운 의학, 철학, 법학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죽음을 이길 수 없으며, 철학을 관통해봐야 깨달음과 거리는 더 멀어지고, 법으로 인간의 권리를 보장할 수 없는 부조리를 그림으로 드러냅니다. 결국 그림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며 강당에 설치되지 못한 채 전쟁으로 불타버리고야 말지요.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열린 사고를 했다면, 예술은 예술로 있을 때 빛난다는 걸 당대의 사람들이 알았더라면, 빈대학교 강당은 상징적인 천장화를 보기 위해 세계에서 몰려온 여행자들로 북적였을 테지요. 전쟁으로 불타 버릴 일도 없었을 테고요. 괜한 아쉬움에 '만약 ~ 했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가져와 써봅니다.
클림트는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이기도 했습니다. 클림트의 인물 화풍은 누구라도 골라낼 수 있을 만큼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클림트적이었습니다. 화려한 배경에 은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표정으로 그려내는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며 빈의 사교계를 주름잡던 여인들이 클림트의 아틀리에를 찾습니다. 이미 내로라하는 초상화가들이 그려준 그림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봅니다. 초상화 속 여인들을 차별화시키는 클림트만의 배경 장식도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테지요.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화는 한국 제약회사가 만든 네모난 진통제 상자에 재현되었습니다. 두통에 잘 듣는다는 알약을 클림트가 그린 아델이 되살아나 건네주니 통증이 싹 가신 기분을 느낄 법도 합니다.
클림트 이야기에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그의 여성편력입니다. 그는 그림의 모델들을 속속들이 알아가며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외로웠을까. 그가 말을 아꼈으니 호사가들 입만 신이 났습니다.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롯한 클림트의 연인, 그가 세상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불렀다는 그 이름, 에밀리 플뢰게입니다. 그녀는 클림트 동생인 에른스트의 아내와 자매인 사돈처녀였지요.
클림트는 노를 저으며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에밀리가 엷은 미소를 짓고 있네요. 그가 노 저으며 그려내는 물속 동그라미를 보는 것 같아요. 이 둘이 입은 옷, 어디서 많이 본듯하지요? 네, The Kiss 그림 속의 연인이 입고 있는 디자인과 흡사합니다. 어떤 매듭도 없이 자유로운 가운을 입고 두 사람은 호수 저편으로 소풍을 가는 걸까요. 사진인데 꼭 그림처럼 분위기가 아련합니다. 클림트의 뒷목과 키스 속 남자의 뒷목이 유난히 닮아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요. 클림트의 여성편력에 혀를 내두르며 멀어졌던 에밀리는 키스 그림을 보고 난 뒤 다시 클림트에게로 돌아왔다니 아무래도 키스의 연인은 이 두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에 수긍이 갑니다.
클림트의 아버지와 남동생인 에른스트가 같은 해 몇 달 사이를 두고 뇌일혈로 사망했기에 클림트도 항상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는 공포와 함께 살았습니다. 클림트는 죽음이 문 밖에 서성대고 있는 것처럼 불안했겠지요. 결국 그도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됩니다. 60년을 채우고 싶어 했던 클림트는 56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찬란한 황금빛 세상에서 그를 밀어낸 병은 스페인 독감과 폐렴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장례와 유산 처리의 권한을 에밀리에게 일임해 놓았습니다. 클림트 그림의 모델이었던 여인들이 아이들을 앞세워 에밀리에게 몰려옵니다. 에밀리는 클림트의 재산을 처분해 어미가 된 그녀들에게 나눠주며 클림트의 살붙이들을 챙깁니다.
클림트에게 영감을 주고 지지를 보내며 죽은 뒤에도 클림트만을 바라보던 유일무이한 연인 에밀리 플뢰게. 두 사람은 키스 속 그림처럼 황금빛 가운을 걸치고 벨베데레 궁전에서 다시 만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