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모차르트 to 사운드 오브 뮤직
잘츠부르크에서 처음 먹었던 점심은 유난히 짰습니다. 소금의 도시 아니랄까봐 음식의 짠맛이 가히 놀라울 정도였지요. 소금(Salz) 광산이 천지에 널렸던 이곳에 가장 먼저 왕국(brug)을 세운 켈트족의 후예들이 만든 음식다웠으니 입을 다물고 접시를 비워야 했습니다. 오래전 소금은 자연이 만들어준 음식 보관창고이자 음식의 맛을 돋우는 천연 조미료였습니다.
소금의 도시 잘츠부르크는 걸출한 음악가 모차르트로 인해 음악이라는 색을 덧칠합니다. 여기에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의 배경이 되어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불렀던 노래를 영화처럼 따라 하며 추억하는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지요. 소금기 걷어낸 잘츠부르크에 부는 바람은 이마를 지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가르며 온음표와 64분 음표 사이를 오고 갔으며, 햇살은 눈부신 으뜸화음으로 쏟아졌고, 오후의 빗줄기는 포르테에서 피아니시모로 내렸습니다. 잘츠부르크에 걸음을 맞추면 안단테와 알레그로를 반복하게 됩니다.
온통 모차르트 생가(Mozarts Geburtshaus)라는 독일어와 사람들로 뒤범벅된 작은 광장에 왔습니다. 세상 모든 언어들이 어울려 웅성대는 소리와 자유롭게 무리지은 사람들을 배열하면 세계지도를 그릴 수 있을 듯합니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가 살아서 이 광경을 본다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을 입증할 교향곡 두서너 개는 족히 작곡할 신나는 장면입니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를 경배하는 순례자이니까요.
이곳은 잘츠부르크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건물입니다. 삼층 창문 위에 위대한 음악가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라는 표식이 문장처럼 새겨져 있습니다.
1756년 1월 27일, 궁정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그의 아내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사이에 일곱 번째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누나 한 명만 남기고 다른 형제들은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었기에 아버지 레오폴트는 막내아들에게 신의 은총이라는 뜻의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모차르트는 세 살에 피아노를 연주하고 네 살에는 한 번 들은 곡을 그대로 연주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다섯 살에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음표를 그려 넣은 자작곡을 만들어 아버지 앞에 내밀었지요. 아버지의 흥분된 심장박동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감흥을 잊지 못해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아버지의 일기를 살짝 볼까요.
<다섯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1761년 1월 26일 저녁 9시 30분 미뉴에트와 트리오를 삼십 분 만에 다 익혔다.>
어린 음악 천재 모차르트는 곧 다가올 여섯 살 생일을 기다리며 뮌헨으로 생애 최초 연주여행을 떠납니다. 연주를 본 뮌헨의 청중들이 꼬맹이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 부르며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소문은 빛의 속도로 퍼져 그 해에 쇤부른 궁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가족들을 앞에 두고 연주를 하게 되지요. 천방지축 뛰어놀다 넘어진 모차르트를 또래의 어린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일으켜주자 어린 마음에도 공주가 너무 이뻐 보였는지 나중에 커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건넨 유명한 일화를 이때 남깁니다.
모차르트는 전 유럽을 무대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명성을 쌓습니다. 모차르트가 살던 시대는 예술가들은 후원자들의 종이었습니다. 후원자가 없으면 생활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지요. 그의 음악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후원했던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온 히에로니무스 대주교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습니다. 천성이 자유로운 모차르트는 이 굴레를 깨치고 홀로 생활을 꾸려나가게 됩니다. 공식적인 1인 음악기획사이자 프리랜서의 탄생이라고나 할까요.
모차르트는 많이 벌기도 했지만 벌어들인 것보다 더 많이 쓰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뭐든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했고 하고 싶은 것은 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의뢰받은 레퀴엠 작곡을 하다 숨을 거두었을 때 장례 치를 돈조차 없을 정도였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겨울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예포처럼 천둥이 치던 1791년 12월 5일 세기의 천재 모차르트는 짧고 굵직한 35년의 생애를 마감합니다.
사람들은 내 음악이 쉽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다.
그 누구도 나만큼 작곡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작곡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거듭 연구하지 않았던 음악의 거장은 없다.
음악의 신동이라 불리던 모차르트도 그려지지 않는 악보를 끌어안은 채 밤을 지새우고, 도서관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머리를 싸매고 골몰했음을 고백합니다.
시와 음악은 시인과 음악가들의 애간장을 다 갉아먹은 후에야 구슬이 되어 우리들에게 또르르 굴러오는 예술가들의 한탄 결정체가 아닐까요.
음악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어 새로운 발전과정으로 이끄는 포도주이다.
그리고 나는 인류를 위한 영광스러운 포도주를 쥐어짜내는 바커스이다.
나는 그들을 영적인 술로 취하도록 만든다.
모차르트 초콜릿 중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술을 넣어 동그랗게 빚은 초콜릿입니다. 은박으로 옷을 입혔지요. 모차르트가 남긴 말을 보고 이 초콜릿을 만든 걸까요. 초콜릿과 술을 한 번에 깨물어 녹여 먹으며 호헨 잘츠부르크 성에 오릅니다.
호헨잘츠부르크 성 (Festung Hohensalzburg) 은 11세기 잘츠부르크 대주교 게브하르트가 독일 남부 바바리아 왕국의 공격을 대비해 철벽처럼 세운 요새였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그 시대의 돈덩어리였던 소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창고이기도 했지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채는 단순하게 묵직하고 견고하게 날렵합니다. 요새와 대주교의 거주 공간이었던 성은 위치에 걸맞게 전쟁 중에는 군대 막사와 감옥 시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쳐들어오기 어렵고 빠져나가기도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가 따로 없습니다.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는 잘츠부르크를 북쪽의 로마로 만들고자 베드로 성당을 능가하는 거대 성당을 짓기 위해 갖은 애를 썼습니다. 많은 집과 자잘한 성당들을 닥치는 대로 부수어 터를 확보했지요. 잘츠부르크 사람들이 그를 파괴의 왕이라고도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 대주교의 신분임에도 그에게는 연인 살로메와 그녀가 낳은 15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교황청은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교황들이 첩까지 두어가며 자식을 낳았습니다. 종교적 직함만 가졌을 뿐 부패와 세습과 탐욕은 세속의 그것보다 더 농밀했습니다. 소금 무역에 대한 분쟁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대주교를 잘츠부르크 성에 감금한 사람은 그의 조카 마르쿠스 시티쿠스였습니다. 대주교는 5년 후 잘츠부르크 성의 감옥에서 숨을 거둡니다.
20세기 초에는 1차 세계대전의 이탈리아 죄수들과 나치 전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단순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성 안으로 들어오면 미로 투성이라 길을 잃기도 합니다. 묀히스베르크 산 정상에 지어진 성을 언덕처럼 오르내리느라 지친 청춘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나무 벤치 위에 길게 누워 쉬고 있었습니다. 성채 내부는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강건해 보였습니다. 대주교들의 거처로 쓰인 황금의 방은 세속의 왕들을 흉내 낸 듯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습니다.
마리오네트 인형들이 들어앉아 있는 유리관 속 무대 뒤편에서 누군가 실을 매단 막대를 이리저리 돌리는 듯한 환영을 본 것처럼 금방이라도 연주가 시작되고 인형극이 펼쳐질듯했습니다. 역시나 눈이 제일 먼저 찾아낸 인형들은 폰 트랩 대령 가족들입니다.
이제 전망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봐야 할 순간입니다. 레지던트 광장과 잘자흐 강이 길게 나눈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시원합니다. 눈길이 알프스 산줄기까지 곧장 닫습니다. 마리아와 일곱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던 강변과 음악제가 열리는 극장, 성당과 수도원들을 강렬한 핑크빛 우산으로 하나하나 짚어주며 현지 가이드는 이야기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여줍니다. 강 건너 미라벨 궁전에서 도레미송이 다리를 건너옵니다. 알프스 품에 포근히 안긴 잘츠부르크, 그대 오늘도 안녕한가요?
믿지 못할 것은 사람 마음이란 걸 아는 연인들이 자물쇠라도 채워 사랑이 영원하길 맹세한 자물쇠들로 내려앉을 듯한 스타츠 브뤼케 다리를 건너 이제 미라벨 궁전으로 갑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The Sound Of Music 1965>은 역사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가는 가족들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전세대를 아우르는 영화로 클래식 반열에 올랐지요. 빼어난 경관과 한 번 들어도 따라부를 수 있는 쉬운 멜로디의 노래들이 영화를 보고 또 보게 만듭니다. 도레미송은 음을 가르쳐 주는 노래입니다. 8개의 음으로 모든 노래를 할 수 있음을 유레카처럼 알려주는 마리아와 일곱 아이들을 따라 세상 모든 아이들은 라임이 기가 막힌 각 나라말로 도레미 송을 부릅니다. 잘츠부르크와 잘츠캄머구트를 여행하고 싶은 맘이 이때부터 파릇파릇 돋아나는 걸까요.
미라벨 궁전은 위에서 살펴본 대주교 볼프 디트리히가 15명의 아이를 낳아 준 그의 연인 살로메에게 지어준 궁전입니다. 미라벨 정원에서 호헨 잘츠부르크 성을 올려다보는 살로메와 잘츠부르크 성에서 미라벨 궁전을 내려다보던 디트리히 주교의 눈이 하늘에서 마추치던 날들이 많았겠지요..내로남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을 사람 마음이니까요.
분수대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올라서 노래를 불렀던 아이들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그 나이 또래의 손주들 재롱을 보며 사운드 오브 뮤직 이야기를 들려줄테지요.
미라벨 궁전 후문 계단의 끝에 서서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으며 마리아처럼 높은 도를 뽑아 알프스 산자락으로 날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