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프라하의 연인
초콜릿이 듬뿍 채워진 굴뚝빵 뜨르들로를 한 손에 들고 어둠 속에 놓인 카를교를 걸었습니다. 햇살 아래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던 카를교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라면, 밤의 카를교는 바람 한줄기 들어갈 수 없도록 수도복의 단추를 꼭꼭 채워 입고 서있는 사제를 닮았다고 할까요. 느리게 걸으며 입안에서 녹여먹던 초콜릿에 누군가 프라하의 밤공기를 오래도록 간직하게 될 거라는 마법의 주문을 걸었나 봅니다.
프라하는 카를 4세(1316~1378)의 도시입니다. 체코인들은 그를 '국가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사랑과 존경으로 칭송합니다. 카를 4세는 중부 유럽의 다민족 국가체제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의 왕, 이탈리아의 왕, 로마의 왕이었습니다. 대체 그는 몇 개의 왕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는 꼬마 왕자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습니다. 삼촌인 샤를 4세가 베풀어준 조기교육으로 5개 국어를 말할 수 있어 외교에 능수능란했고 책 읽기를 즐겼으며 전쟁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중세 유럽의 왕들이 일자 무식꾼에 전쟁광이라는 원색적 평가를 받지만 카를 4세는 정치, 경제, 문화 전 방면에 걸쳐 보헤미아 왕국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보헤미아 왕국은 황금시대로 기록됩니다.
카를 4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뒤 수도를 프라하로 정합니다. 블타바 강에 홍수에도 끄떡없는 카를교를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라하를 화려한 도시로 변모시키지요. 프라하의 밤 풍경을 아름답게 수놓는 프라하 성과 비투스 대성당에도 그의 입김과 손길이 묻어있습니다.
교육의 가치를 일찍 깨달은 카를 4세는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대학을 세웁니다. 이런 분위기가 대대로 이어져 체코는 첨단기술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지요. 세계의 큰 공항에 설치된 200대의 항공기를 동시에 감지하는 레이더 시스템도 체코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침 일찍 천문시계가 째깍거리는 프라하 옛 시청광장을 거닐다 만난 치어 청소년들로 광장이 떠들썩합니다. 매시간 정시가 되면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리던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응원하는 퍼포먼스일까요? 갑자기 덜 깬 잠이 확 달아나고 어깨가 들썩입니다. 보수 중이던 천문시계의 비계가 당시에는 눈에 많이 거슬렸습니다. 이제야 소중한 것일수록 더 자주 들여다보고 쓰다듬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사진 속 푸른 비계도 꽤 괜찮아 보입니다. 천문시계가 카를교로 가야 할 시간이라고 등을 돌려세웁니다.
카를교 입구에는 양쪽에 탑이 하나씩 서 있습니다. 원래 카를교를 오가는 마차 통행료를 받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맘껏 프라하를 눈에 넣고픈 여행자들을 위한 전망대로 쓰입니다. 멀리 보이는 프라하 성채, 수많은 탑들과 붉은 지붕, 초록의 나무들 사이로 흐르는 블타바 강을 보여주기에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맘이 내키는 대로 왼쪽에 있는 탑으로 들어가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오릅니다. 탑의 꼭대기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하늘과 바람이 와락 안아줍니다. 블타바를 사랑했던 음악가 스메타나의 악보를 연주하듯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는 자신의 불행에 절망하지 않고 민족주의 옷을 입혀 <나의 조국>이라는 연작 교향시를 작곡합니다. 체코 사람들은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는 드보르작이지만, 체코를 대표하는 작품은〈나의 조국〉이란 말"로 그를 기립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니 블타바의 강물이 귓전에서 흐르고 눈앞에서 너울댑니다. 보헤미아 남쪽 작은 샘물이 들릴 듯 말듯한 플루트 소리로 졸졸 흐르다 클라리넷을 만나 점점 커다란 물줄기가 됩니다. 마침내 강을 이룬 큰 물결은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흐르다 장대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몸을 던져 웅장한 영광을 노래하는 나의 조국의 두 번째 곡 블타바. 카메라로 카를교 꼭대기에 부는 바람과 함께 블타바에 열쇠 없는 자물쇠를 채웁니다.
체코에 깃든 자연과 흐르는 역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악보에 그려나간 스메타나의 기일인 5월 12일에 <프라하의 봄> 음악제가 매년 열립니다. 개막곡은 <나의 조국>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민주화에 성공한 체코인들은 5월이 오면 '나의 조국의 영광'과 '나의 빛나는 미래'를 스메타나와 함께 연주합니다. 눈부신 봄은 그들에게 우리처럼 상처를 딛고 일어선 기억의 계절입니다.
1357년에 주춧돌이 놓인 카를교는 블타바 강에 놓인 13개의 다리 중 가장 아름답습니다.
너비 10m, 길이 520m의 카를교는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마차가 건너는 고딕 양식의 튼튼한 건널목이었던 카를교에 17세기 중반부터 바로크 양식의 조각상들이 하나씩 다리 양쪽에 세워집니다. 30개의 조각상들의 엄호를 받는 카를교는 이때부터 신비스러운 전설을 가진 프라하의 명물로 고개를 내밀고 여행자들의 옷깃을 잡아당깁니다.
카를교 위의 조각상 중 가장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은 별 다섯 개를 매단 둥근 후광을 머리 뒤에 달고 있는 성 네포무크의 청동 조각상이 있는 자리입니다.
왕비의 불륜을 의심한 왕이 왕비가 고해성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왕비의 고해성사를 받은 네포무크를 불러 왕비가 무엇을 고했는지 말하라며 윽박지릅니다. 그는 고개를 젓고 입을 다물지요. 죽어서라도 지켜야 할 사제의 규율이니까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왕은 네포무크의 혀를 뽑아내고도 성에 차지 않아 블타바 강물에 그를 던져버립니다.
이렇게 성 네포무크는 물에 빠진 사람들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성 네포무크 이야기 속 장면이 조각상 아래 동판에 조각되어있습니다. 강물에 던져지는 성인의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마구 믿고 싶어 지는 이야기로 전해 내려옵니다. 거꾸로 물에 떨어지기 직전인 성 네포무크와 왕비의 옷자락이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간절한 손길로 빛나고 있습니다. 소원은 눈으로 말하고 손짓으로 간절해지는 세계 공통어입니다. 부디 이 소원들이 날개를 펼쳐 훨훨 날아 손길의 주인에게 다가가기를 거듭 소원합니다.
카를교를 지나 프라하 성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붉은 지붕과 초록의 포도나무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숨을 쉬고 있어 다정한 길이었습니다. 프라하성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성채 단지'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습니다. 중세의 기운을 간직한 가장 큰 성채입니다. 9세기부터 통치자들의 궁전이었다가 지금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터라 프라하 성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공항 검색대처럼 소지품들과 신분증을 꼼꼼히 검사합니다. 경복궁을 대통령 관저로 만들어 경회루에서 세계 정상들이 소주 잔을 높이 들어 세계 평화를 약속하는 건배를 해도 멋스럽고 의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예술적으로 탁월하고 자손들에게 물려줄 문화유산도 전시만 하는 것은 박제한 날짐승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다시 프라하로 돌아옵니다.
검색대를 통과하면 성 비투스 성당이 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성 비투스 성당은 이탈리아 최고의 건축가 비투스가 설계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프라하에 재현하고픈 카를 4세의 야심작입니다. 첫 삽을 뜨고 600년 간 짓느라 고딕 양식 건물에 바로크 양식의 종탑을 얹어 완공합니다.
체코 출신 화가 알폰소 무하 (Alfons Mucha 1860~1939)가 그린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에도 마법이 걸려있을지도 모릅니다.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요. 익숙한 모자이크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니라 새롭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그려내던 화가의 붓길을 따라가다 눈이 멀지도 모릅니다. 숨 넘어가게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창이 4개나 되다 보니 성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를 이곳에서 다 보낼 수도 있지요. 아래쪽에 제작을 지원한 회사들을 깨알같이 홍보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광고판 스테인드 글라스를 놓치지 마세요.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섰는데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자의 슬픔 한 자락이 저무는 햇살에 풀어집니다.
해가 떠오를 듯 말 듯 망설이는 시간과 질듯 말 듯 주저하는 길지 않은 시간은 사진을 찍는 이들에게 골든타임으로 불려집니다. 카를교에서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서있는 언덕을 바라보니 어찌하여 세상 사람들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적인 야경이라고 치켜세우는지 알아버렸습니다.
카를 4세는 그 시절에 비투스 성당을 어느 방향으로 앉혔을 때 지는 해가 성당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지 고민했다지요. 그는 해 질 무렵 카를교에서 프라하 성이 있는 언덕을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 같습니다. 성당은 황금빛 저녁 햇살에 포근히 안겨 잠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려주는 불빛이 넓은 성채를 쓰다듬고 블타바 강물 속으로 던져진 노천 식당의 노란 조명은 길게 물속에 흔들리며 잠깁니다. 어둠이 짙어지면 하늘은 무채색으로 뒤로 물러나고 노란 조명들이 대지와 강물 속에서 별빛으로 떠오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고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이 장면을 함께 본 사람들이 어떻게 프라하를 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프라하는 연인들의 도시가 되었나 봅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카를교에 붉은 드레스와 검정 턱시도를 입은 연인이 나타났습니다.
프라하 연인의 밤 웨딩촬영.
어둠 속에서 사진가가 카메라 석대를 목에 건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능숙하게 렌즈를 교체하고 있습니다. 프로의 경지에 올라있는 손놀림입니다. 곧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셔터를 누르며, 조명판을 든 조수에게 각도를 낮추라 지시하고, 예비 신랑 신부에게 포즈를 주문합니다.
카를교 다리 위의 조각상이 허공에 떠 있는 주례가 되고, 연인은 서약을 위해 두 손을 모으기 직전입니다. 엄숙한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쭈뼛대며 양해를 구하고 찍은 사진입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있던 자리로 돌아와 쪼그려 앉아 찍은 B컷이지만 프라하의 연인으로 저장되어 가끔 그날의 카를교를 추억하는 친구 같은 사진입니다. 작은 소리로 Be happy and good luck이라 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 돌들이 휘감아도는 프라하 골목길에 밤이 흐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