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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 모래시계 Sep 15. 2021

시간이 멈춘 동화마을 체스키 크룸로프

붉은 뾰족 지붕 아래 그녀들의 티타임

몽글몽글한 하얀 구름을 손으로 풀어헤치면 별도 딸 수 있을 것 같은 파란 하늘에 넋을 빼앗겼습니다. 달콤한 젤라토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가락 사이로 흐를 때에야 호들갑을 떨며 정신을 챙깁니다.


야트막한 산이 언덕처럼 펼쳐져 바람을 막아주고 체코의 젖줄 블타바 강이 어여쁜 S자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며 작은 도시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세계 멋진 전망 대회 콘테스트가 열린다면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서 내려다본 이곳은 분명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입니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 왼손의 엄지와 검지를 교차하여 만든 손가락 틀 속 풍경들을 오려 모아 어여쁜 공주와 근사한 왕자를 그려 넣으면 금세 동화책 한 권을 만들어 낼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천하제일 명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에 깃든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300년 전의 시간이 빠져나갈 길을 잃어 맴돌고 있습니다. 봉긋한 소매에 허리를 개미처럼 졸라맨 치마를 입고 아리따운 여인들이 붉은 뾰족 지붕 아래 거실에서 도란도란 모여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듯한 있을 듯한 동화마을안으로 걸어갑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에서 오른쪽 왼쪽 고개를 돌려 내려다 보는 전망


잘츠부르크와 프라하를 오가는 소금길에 작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오고 가는 길이라 물건을 약탈하려는 산도적들도 들끓는 곳이었지요. 13세기에 산도적들을 소탕한 비트코비치 가문이 이곳의 영주가 되어 성을 쌓았습니다. 비트코비치 가문은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을 보호해준다는 명목 하에 세금을 거두어 부를 쌓으며 세력을 키워갑니다. 체스키는 보헤미아를 뜻하는 '체코', 크룸로프는 독일어로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당한 산자락 마을', 체스키 크룸로프의 뜻입니다. 턱없는 통행세를 징수하는 영주에 대한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도시 이름이 되었습니다. 영주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프라하 왕실은 체스케 부데요비체라는 계획도시를 만들어 영주 세력을 견제합니다.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면 기존의 세력들은 어떻게든 그 싹까지 도려내려 갖은 술수를 동원하는 힘의 작용과 반작용은 언제나 어디서나 역사의 굵은 줄기가 됩니다.

비트코비치 가문의 대가 끊기자 친척인 로젠베르크 가문이 체스키 크룸로프의 새 영주가 됩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이 가문의 통치 아래 르네상스를 맞으며 300년 동안의 전성기를 이어갑니다. 지금도 성벽에 피렌체에서 건너온 르네상스 스타일이 남아있습니다. 즈그라피토 기법인데요, 밑그림을 그린 뒤 필요 없는 부분을 긁어내어 무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상감기법과 유사합니다. 성벽이 벽돌을 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무늬일 뿐입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하인들이 살던 라트란 거리와 강 건너 구 시가를 연결하는 이발사의 다리가 있습니다. 성이 보이는 방향으로 왼쪽 다리 난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상이, 오른쪽에는 프라하 카를교에 서서 세계인들의 소원을 들어주느라 바쁜 네포무크 성인의 조각상이 서 있습니다. 블타바 강에 빠진 모든 이들의 수호성인이라 도시를 가리지 않고 블타바 강을 건너는 다리마다 성인의 조각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리게 된 슬픈 전설을 들어보시겠어요?

성 아랫마을에 마음 착한 이발사가 어여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왕실의 젊은 귀족이 마을에 소풍을 나왔다가 이발사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젊은 귀족은 이발사의 딸에게 결혼해 달라며 애원하지요. 마침내 둘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이발사는 귀족과 결혼한 딸이 행복하게 살 거라는 생각에 손님들에게 이발을 해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지요.

그런데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이발사의 딸과 결혼한 젊은 귀족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며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이 수군댑니다. 이발사는 믿지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소문에 안절부절못하며 딸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잠을 자던 딸이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는 겁니다.

이발사는 귀족 사위에게 따져 묻지도 못하고, 의심을 거두지도 못하며 시름시름 앓지요.

이 와중에 젊은 귀족이 자신의 아내를 죽인 자를 잡겠다며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 고문으로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마을에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고 피비린내 나는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더 지켜볼 수 없던 이발사는 귀족 사위를 찾아갑니다.

자신이 딸을 죽였다며 거짓 자백을 한 이발사는 처참하게 죽게 됩니다.

이발사가 딸을 죽일 리가 없는 걸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다리를 만들고,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렀다며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동화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뒷목을 잡을 이야기가 다리 이름에 걸려있어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발사의 다리에서 바라본 흐라데크타워 전망대와 늦은 밤 기타 선율이 들려오는 이발사의 다리 Photo by 푸른모래시계



이발사의 다리를 지나 계단길을 오르면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성 체스키 크룸로프 성으로 들어갑니다.

왕실의 프라하 성이 보는 사람을 압도할 웅장함을 보이기 위해 한껏 치장을 한 성이라면 영주 소유였던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입니다.

곰들이 살고 있는 해자를 건너 성안으로 들어서면 계곡 사이에 높은 성벽을 쌓아 만든 망토 다리가 보입니다. 성채의 위아래를 연결하는 다리의 모습이 마치 망토를 두른 듯해 망토 다리로 부르는 이곳이 체스키 크룸로프 성의 상징입니다. 망토 다리의 반달 프레임 속 작은 동화마을에 그림으로 그린 하늘이라니. 이렇게 성을 오르다 내려다볼 수 있는 틈새마다 기막힌 전망들이 펼쳐집니다. 해가 질 무렵 조명으로 빛나는 망토 다리를 올려다보니 벌써 애틋해지고 그리워지는 마음이 몰려옵니다.


망토 다리에서 내려다 본 체스키 크룸로프. 그 곳에서 올려다 본 밤의 망토다리. Photo by 푸른모래시계


걸음마다 쫓아오는 햇살이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절벽 위의 호텔 루제로 돌아갑니다. 호텔 루제는 종교전쟁 후에 예수회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호텔룸 바닥에 깔린 카펫이 무색하게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납니다. 혹여 마룻장 아래 자고 있던 병사가 전쟁이 끝난 것을 모르고 삐걱대는 소리에 일어나 십자가가 그려진 방패를 들고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까치발로 걸어 다닙니다. 수도사들이 머물던 곳이라 생각해서인지 고요하고 차분해집니다. 세월이 옷장에도 침대 머리맡에도 말 그대로 떡칠이 되어있는 호텔에서 더위만 가시려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푹푹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개운해진 몸과 맘으로 다시 동화마을을 만나러 갑니다. 목에는 스보르노스티 광장 뒤편 기념품점에서 마련한 집시풍 머플러를 둘렀더니 찬 밤기온에도 끄떡없습니다.


시청사가 있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은 시대를 달리하는 오밀조밀한 건물들이 사방으로 물러 앉아 네모난 광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흑사병을 물리친 (전쟁을 치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기념으로 세운 마리아 탑을 반환점 삼아 사방으로 뻗어있는 작은 골목들을 걸어봅니다.

아기자기한 공예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 주인이 close로 팻말을 돌리려다 우리를 보고는 open 글씨가 보이도록 돌려세웁니다.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성이 그려진 잔을 하나 집어 듭니다. 한 모금의 물도 다 담지 못할듯한데 자꾸만 그 작은 잔에 눈길이 갑니다. 개미만큼 작아진 엘리스가 그 작은 잔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동화마을이라 그런 걸까요.


체스키 크룸로프의 밤이 파랗게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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