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노라
그날, 하이델베르크의 공기는 완벽했습니다. 떨구어내지 못한 잠 기운을 확 날려버릴 정도로 차가웠지만 어깨를 웅크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만큼 다정한 온도였습니다. 하늘빛, 물빛을 있는 그대로 우리의 눈에 들여보내 하루 종일 맑음으로 하이델베르크를 즐기기에 흡족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의 뜻은 '신성한 산'이라고 하지요. 그날 하이델베르크를 휘감은 공기는 고결하고 거룩한 가운데 정겹고 고분했답니다.
네카어 강 위에 우아하게 자리를 잡은 카를 테오도어 다리 위에서 황태자의 첫사랑에 나오는 여관집 주인의 딸 캐시가 되어 하루 종일 황태자 칼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 낭만적인 하루를 보낸 하이델베르크 속으로 걸어갑니다. 카를 테오도어 다리는 '올드 브리지'로 부르기도 합니다. 올드 타운으로 가려면 꼭 건너야 하는 다리여서 그렇게 불리겠지요. 다리 아래 부분이 그려내는 우아한 곡선의 아치는 완만한 산등성이을 강 아래로 데려온듯한 느낌입니다.
붉은색 지붕의 바로크 건물이 빼곡한 올드타운을 지나 하이델베르크성(Schloss Heidelberg)이 있는 언덕을 오릅니다. 하이델베르크성은 1225년 비텔스바흐가 처음 지었을 때는 지금의 성보다 더 높은 산허리에서 네카어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1537년 낙뢰로 파괴된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이야기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성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인 '엘리자베스 문'은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7살의 프레드릭 5세는 동갑내기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왕국의 공주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와 결혼해서 일 년 중 반을 영국에서 보내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익히며 유명 인사들과도 교류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돌아오면 엘리자베스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지요. 왕비의 19번째 생일이 다가오자 프레드릭 5세는 친분이 있던 영국 왕실 건축가 이니고 존스를 불러 깜짝 생일선물을 준비합니다. 전날까지도 없었던 아름다운 문 앞에서 프레드릭 5세는 사랑하는 왕비에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했을까요. 이 문을 왕비와 같은 '엘리자베스 문'이라 이름으로 지었으니 우리 이 문처럼 아름답게 살자며 왕비의 뺨에 살짝 입맞춤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엘리자베스 문 앞에서 사진을 찍은 연인은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 떠돌자 하이델베르크 성 안의 교회에서 연간 백여 쌍의 연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엘리자베스 문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연인들이 일부러라도 하이델베르크성을 와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습니다. 엘리자베스 문에 들어서면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이 뒤섞인 건물들이 온전히 혹은 폐허로 서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지어진 이후 400년간 무너지고 다시 세우고 또 무너지며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양식들을 두르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아주 어린 나이에 선제후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삼촌이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프리드리히 4세는 바람직한 군주가 되기 위해 다방면의 스승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1591년 어느 날, 세무관리가 긴급하게 찾아와 와인을 저장할 공간이 없다며 난색을 표합니다. 이제 17살이 된 프리드리히 4세는 삼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는 거지요. 삼촌 요한 카시미어는 어린 제후에게 나라의 살림을 살기 위해선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어야 하는 재정의 원리를 설파합니다.
포도가 많이 나는 하이델베르크는 와인을 만드는 농부도 많아 세금으로 와인을 들고 오는 백성이 많았습니다. 유독 와인이 세금으로 많이 들어와 와인을 보관할 곳이 없다는 세정관의 보고를 받은 삼촌은 하이델베르크 성 지하에 거대한 와인통을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훗날 이 와인을 팔거나, 궁전 행사에 쓰면 될 것이라는 팁까지 제시하자 프리드리히 4세는 삼촌의 혜안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초대형 와인통을 사람들은 '그로세스 파스'라고 불렀습니다. 와인통은 세월이 흐르며 낡고 새는 바람에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와인통이 만들어진 시기의 섭정자나 제후의 이름을 붙였지요. 처음으로 1591년 프리드리히 4세의 삼촌 섭정 기간에 만들어진 '요한 카시미어 파스', 1664년 '카를 루드비히 파스', 1728년 '카를 필립 파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를 테오도르 파스'입니다. '카를 테오도르 파스'는 참나무판 133개로 만들었고 용량이 무려 22만 L에 이릅니다. 와인 1병인 750ML로 환산하면 293,333병의 용량이 통 안에서 찰랑대는 거지요.
세상에서 가장 큰 와인통 옆에 커다란 열쇠가 달린 끈을 어깨에 메고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난쟁이가 '페르케오'라고 쓰인 이름표 위에서 있습니다. 페르케오는 '카를 루드비히 파스'시절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 북부 살로르노라는 도시에 '판케르트'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키에 낙천적인 성격으로 달변가였지요. 당시 이 도시를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총독 카를 3세는 우연찮게 그를 만난 후 그의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에 매료됩니다. 카를 3세는 단추를 만들던 그를 총독 관사로 불러들여 손님들의 여흥을 담당하는 일을 맡깁니다. 선제후가 된 카를 3세가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옮겨가자 판케르트도 그를 따라갑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난쟁이가 각종 연회에서 재치 있는 입담과 웃음을 폭발하는 어릿광대 놀이로 손님들을 즐겁게 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며 그는 하이델베르크의 유명인사가 되지요. 연회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들은 큰 웃음을 준 판케르트에게 고맙다는 의미로 술을 한잔씩 건넸습니다. "판 게르트, 내 술 한잔 받겠나?" 연회 참석자가 물으면 판게르트의 대답은 언제나 "페르케오"였습니다. 페르케오(PERKEO)는 영어로' Why not'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거지요.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와인이나 따라 달라며 외쳐대는 그를 사람들은 '페르케오'라고 부르며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 대신 '페르케오'로 불립니다. 애주가였던 페르케오는 아예 그로세스 파스 관리인으로 임명되어 인생 전체를 술통에 푹 담그며 80대까지 장수했다고 합니다. 페르케오에게 와인은 물이자 술이고 음료였습니다. 늙어 병든 그에게 물약 한 병을 처방했던 의사는 다음날 그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환생을 한 것이라 해도 믿을 지경입니다.
독일을 무대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두 종교가 사생결단으로 싸웠던 30년 전쟁(1618~1648) 때 하이델베르크 성은 양쪽 진영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습니다. 피해가 채 복구도 되기 전 이번에는 나폴레옹의 공격을 받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하이델베르크 성을 점령하자마자 지하실에 있다는 커다란 와인통으로 몰려 갑니다. 기함할 정도로 큰 와인통을 앞에 두고 그들은 술잔치를 벌일 생각에 마음이 급하지요. 꼭지를 돌릴 찰나의 여유조차 없이 준비해 간 도끼로 통의 아랫부분을 찍어댑니다. 와인이 흘러나오기는커녕 텅텅 약 올리는듯한 소리가 나지요. 그때서야 통에 달린 꼭지를 틀어보니 콸콸 쏟아져야 할 와인이 단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프랑스 군대가 와인통으로 몰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성의 관리인이 부랴부랴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이제는 사람들이 더 이상 와인으로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통에는 와인이 없다고 읍소하지요. 와인을 흥청망청 마셔댈 생각으로 힘들게 성까지 올라와 조바심을 치던 병사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와인통을 부숴버리겠다며 들고일어납니다. 그때, 프랑스군 장교가 어르듯 그들을 달랩니다. 나폴레옹 황제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나 유물을 부수는 것을 삼가라 (빼앗아 프랑스로 가져가야 하니 조심하라는 말의 다른 뜻이겠지요.)하셨으니, 이 거대한 통을 부수는데 힘 빼는 대신 성 아래 술집에 가서 진탕 마시는 게 낫다고 그들을 내려보냅니다.
1840년 하이델베르크 성을 다녀온 빅토르 위고는 <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가장 우울하고 서글픈 일은 이미 죽고 사라진 왕자와 왕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어릿광대다>라고 편지에 씁니다. 편지 말미에 < 버려진 하이델베르크 성의 빈 술통 옆에서 우리는 이 불쌍한 어릿광대를 생각한다>라고 하지요. 빅토르 위고는 하이델베르크 성의 지하실에서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묵묵히 이겨낸 와인통에 깃든 페르케오의 영혼을 엿보았던 것일까요.
하이델베르크 성 전망대에서 강 건너편 언덕을 보면 가느다란 '철학자의 길'이 보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헤겔이 즐겨 걸었던 길이라고 합니다. 괴테,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 내로라하는 독일의 학자들도 이 길 위에서 네카어 강을 무심히 내려다보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폐허가 되어버린 성을 올려다보았을 테지요. 그러면서 소설을 구상하고 인간 본성을 깊이 파헤치며 학문적인 성과를 올렸을 겁니다. 정해진 시간마다 '철학자의 길'을 산책하는 칸트를 보고 사람들이 고장 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정작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평생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독일 철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칸트가 이곳에 살았더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철학자의 길'로 놀러 오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와전되어 굳어진 이야기겠지요. 하여튼 철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하이델베르크에서 하룻밤을 묵는 여행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거리두기'라는 하나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여행과 철학이라는 같은 듯 다른 열매의 맛을 볼 수 있는 하이델베르크는 매력적인 도시가 분명합니다.
괴테에게는 아주 많은 뮤즈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적든 많든,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가리지 않고 그의 예술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여인들은 모두 사랑했다지요. 1815년 어느 가을날, 예순을 훌쩍 넘긴 괴테는 한 여인에게 사랑의 시를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안네 폰 빌레머. 괴테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데다 남편까지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은밀하면서도 위태롭게 둘의 사랑은 커져갑니다. 가끔 먼 곳까지 여행을 하던 두 사람은 이곳 하이델베르크 성에서도 애틋한 마음을 나누었나 봅니다. 그녀는 성의 낡은 담벼락에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노라'라는 글귀를 남겨 하이델베르크 성에 로맨틱이라는 형용사를 선사했습니다.
저녁이 내리는 하이델베르크 올드 브릿지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황태자이자, 캐시입니다.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니 황태자요, 황태자는 떠났지만 제자리에서 자유롭고, 따뜻하게, 무엇보다 즐겁게 살아가야 할 여행자이니 캐시이기도 합니다. 황태자와 캐시의 첫사랑은 대단한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그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