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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형찬 Feb 19. 2024

차와 커피에 관한 고백

건강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들 

25년 전의 여름이었다. 고향 친구인 N과 나는 방학을 맞아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었다. 전날 밤에 비가 내린 탓에, 터를 잘 잡아서 텐트를 쳤음에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옷뿐만 아니라 온몸이 축축하고 뼈마디가 삐걱댔다. 저녁밥이 눌어붙어 있는 코펠에 물을 끓여 숭늉에 커피 믹스를 타서 친구와 한 잔씩 마셨다. 

     

마침 산안개가 걷히면서 그 맨몸을 보여주는 산을 보면서 친구와 나는 마주 보며 낄낄대며 웃었다. 그 장관을 보면서 우리 둘 다 그렇게 경박스럽게 웃어댔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인생의 커피로 빨간색 봉지에 든 커피 믹스가 각인된 것은 그 날이었다. 그 이후로도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가끔 마셔봤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30대에는 차에 심취한 적도 있었다. 언제고 내 차밭을 만들어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 여행 중에 들른 차밭에서 나무 아래 떨어진 씨를 주워다 본가 텃밭 한구석에 심었다. 5월이 다 되어도 싹을 틔우지 않다가, 어느 날 아침 하나가 나오더니 며칠 새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던 날의 기쁨이 아직도 생생하다.     

 

씨부터 시작한 나무는 사람이 건들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말에 따라 퇴비도 없이 거의 방치했다. 차나무의 북방한계선보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어서 걱정했지만, 겨울이 되면 죽은 듯하다가도 봄이 되면 살아나기를 반복했고,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기 시작했다.      


심은 지 8년째 되던 날, 드디어 첫 수확을 했다. 책에서 읽은 대로 새벽에 나가 ‘일창2기’의 찻잎을 따서 대나무 소쿠리에 모았다. 그리고 그날 가스레인지 위에 작은 쇠솥을 걸고 차를 덖었다. 마지막 덖음작업을 마쳤을 때 솥에서 찻잎이 구르던 소리, 기다리지 못하고 그 차를 바로 우려 마신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로 비싸고 유명하다는 차도 마셨지만, 차가 주는 기쁨의 1위는 언제나 그날의 차다.      



좋은 경험이란 비싼 돈을 지불하고 남이 다 만들어준 것에 숟가락을 얻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를 온전히 알고 맛보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란 것을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반려동물계에 개와 고양이가 있다면 현대인의 음료에는 차와 커피가 있다. 그리고 개와 고양의 집사가 보이지 않는 파벌을 이루듯, 때론 차와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도 ‘니들이 *맛을 알아?’ 하는 은근한 자존심 싸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뉴스에 주기적으로 그 유해성과 유익함에 관한 연구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차와 커피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돈이 자본시장에서 꽤 비중이 있는 것 같다. 연구 결과인지 용역보고서인지 모를 그런 기사들을 볼 때면 길가에 핀 잡초도 저렇게 연구하면 세상에 다시 없을 불로초나 독약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 만들어진 제품을 마시기 때문에 찻잎도 커피빈도 모두 하나의 생명이고 식물이다는 점을 놓치기 쉽다. 모든 생명체는 많이 비슷하고 조금 다르다. 그 다름이 그 생명을 규정하는 이름표가 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공통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단지 그것을 하나하나 밝히고 알리지 않는 것은 그 작업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고, 자본시장은 수익을 창출하지 않는 곳에는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농담이 아니고 봄이면 지천으로 꽃을 피우는 민들레에 차와 커피에 쏟는 것 만큼 자본이 투입되어 연구와 홍보가 이루어진다면, 차밭과 커피밭은 갈아엎어지고 도처에 민들레밭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험실의 연구 결과들이 차와 커피에 관한 다양한 효능과 유해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냥 습관이 아닐까 싶다. 술과 담배 그리고 차와 커피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선택하기 때문에 기호식품이라고 말한다. 음식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들은 꼭 건강에 좋은 것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해가 된다고 해도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 크다면 기꺼이 그것을 감수한다.    


  

이런 기호식품들의 공통점은 중독성이다. 맛과 향 그리고 건강상의 효용이나 멋과 같은 다양한 이유를 들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이것들을 즐기는 것은 중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 어른들은 ‘인이 박혔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부드럽게 표현하면 길들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술과 담배는 중독에 따른 건강상의 폐해가 커서 금주와 금연을 위한 치료도 진행된다. 하지만 차와 커피는 중독되었다고 해도 웬만하면 그 자체를 끊기 위한 치료를 하진 않는다.      


기호식품의 중독성은 그 안에 들어있는 물질에 신경계 그중에서도 신경계의 총사령관인 뇌가 길들여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차와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신경계 각성 물질로, 무기력하고 머리가 멍하면서 피로감을 느낄 때 신경계를 깨어나게 만든다.      


카페인은 그 자체는 일종의 독성물질이다. 실제 신체의 해독기능을 시험할 때 카페인을 섭취하고 얼마나 빨리 처리하는가를 측정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몸은 카페인이 들어오면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력은 일시적이지만 신체기능을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일종의 동종요법인 셈이다. 

     

차나 커피를 마시면 소변을 자주 보게 되는 것도, 이런 해독작용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이전에는 하루 몇잔을 마시거나 오후 늦게 마셔도 잠을 잘 잤는데, 최근 들어 수면에 영향을 받는다면 본인의 해독능력이 떨어진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신경계의 각성에도 동종요법에 의한 활력의 부활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차나 커피를 과도하게 마시는 환자들에게 이것은 미래에 쓸 에너지를 미리 당겨쓰는 일종의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잔고를 채우지 않고 계속 대출을 받으면 원금과 이자가 불어나서 파산한다.      



카페인도 마찬가지다. 끌어다 쓴 후 휴식을 통해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재충전하지 않으면 피로와 긴장의 누적으로 만성피로나 번 아웃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이전보다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또한 이전과 같은 정도의 각성을 위해서는 더 많은 카페인이 필요하므로, 더 많이 마시거나 때론 고용량 카페인 음료나 약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커피와 차를 많이 마실 때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점이다. 이런 환자들에게 ‘차는 차고, 물은 물이다’ 고 말하는 이유다. 차와 커피는 물이 아니다. 음식이고 음료다. 위장에 들어가면 고형의 음식물 정도는 아니지만 소화반응을 일으킨다. 또한 소변도 더 자주 보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차는 차처럼 마시고, 기본적인 수분의 섭취는 맹물을 통해야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커피파’인가 ‘차파’인가 하면 시시때때로 왔다 갔다 하는 ‘박쥐파’다. 이제부터 나는 왜 이도 저도 아닌 취향을 가졌는가에 관한 변명을 해보려고 한다.      


사람들이 커피와 차를 마실 때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은 맛과 향일 것이다. 거기에 하나 더해진다면 다양한 브랜드 스토리 일 것이다. 원산지는 어디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고, 누가 즐겨 마시고 와 같은 것들이다. 거의 모든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렇듯, 이렇게 덧씌워진 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꺼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게 만드는 요술을 부린다. 스페셜티 원두가 유행하고, 한편에 수백· 수천만원이 호가하는 차가 팔리는 이유다. 그런 이미지를 걷어 내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을 때 결과들은 아마도 파리의 심판 만큼이나 흥미로울 것이다. 아, 물론 이런 말은 내가 아직 그런 명품의 세계와 가치를 몰라서 하는 신포도 같은 말일 수도 있다.      


내가 박쥐가 진짜 이유는 차와 커피가 일으키는 몸의 반응 때문이다.      


사람들은 차와 커피의 맛과 향 그리고 이미지와 그것을 소비하는 공간의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입장, 몸 안의 흐름을 중시하는 한의학자로서 보면 차와 커피는 좀 다르게 해석된다. 커피와 차는 둘 다 각성효과를 내지만, 그것이 몸 속에 들어왔을 때 일으키는 파문은 확연하게 다르다.   


   

커피를 마셨을 때 몸의 반응은 심장을 쥐어짜듯 해서 내부의 흐름을 머리 위로 올린다. 마치 뇌에 카페인을 주입해서 강하게 각성시키는 느낌이다. 반면에 차는 도리어 흐름을 아래로 끌어 내린다. 머리 속을 탁하게 하는 것을 가라앉히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힘을 이용해 머리로의 흐름을 활성화 시킨다. 이 둘의 작용은 마치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는 해와 바람의 시합 같기도 하고, 시소의 원리 같기도 같다. 힘을 주어 한쪽을 올릴 수도 있지만, 한쪽을 내려서 반대쪽을 올라가게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큰 흐름은 이와 같지만 차와 커피의 종류에 따라 각기 그 길과 지렛대로 삼는 작용 부위가 다르다는 점이다. 차를 마시면 녹차와 백차 그리고 우롱차와 잘 익은 보이차가 주로 작용하는 부위가 모두 달랐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차와 커피를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고 즐긴 것은 그 맛과 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처럼 우리 몸안에 들어와서 일으키는 파문의 결이 다 다르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기의 흐름을 중시하는 한의학의 관점에서 차와 커피를 바라보면 더욱 그렇다.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일으키는 병적인 흐름에 맞춘 차와 커피를 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좋은 약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물질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시간이 지속될수록 과학에 인간이 길들여지고 있단 생각이 든다. 기억하고 생각하는 힘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먹는 음식은 식품공학에 따르고, 몸의 움직임은 스포츠과학이 제시하는 방법을 따른다. 사랑조차 호르몬이 만들어내는 환상으로 해석된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더 합리적이거나 과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과학이 제시하는 틀에 맞춰 살아가면서 점점 본래 갖고 있던 감각들은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제공된 정보들과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에 중독되어 가는 것 같다. 내 상태가 어떻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것까지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생각의 여유를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도 크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좋다는 것을 소비하고 따라 해도 어쩌다 운이 좋아 맞아떨어진 경우가 아니라면 진정한 만족에 이르기란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뭔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퇴화한 몸과 마음의 본래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가 필요할 때는 나에게 맞는 차를 마신다. 살다 보면 커피 한 잔의 각성이 절실한 순간도 있다. 내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산패되지 않았다면 더 좋은 차, 더 좋은 커피란 없다. 나에게 필요한 차와 커피가 있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몸과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느끼는 시간이 필요하다. 들뜨고 혼란하고 잃어버린 본래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진정한 차 한 잔의 여유,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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