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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Nov 29. 2022

명사를 잊는 시간

비디오테이프로 영화를 보던 시절, 부지런히 영화를 봤습니다. 주로 유행이 지나 대여비가 별로 비싸지 않았던 영화를 빌려 봤었는데 어느 날은 헤드윅을 빌려서 봤습니다. 영화 헤드윅에는 시선을 강탈하는 많은 이야기와 영상이 있었지만 지금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Origin of Love"를 부르는 붉은 입술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 사랑의 기원이었습니다. 그 노래에서는 태초의 인간은 모두 3 부류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붙어 있었는데 어느 날 신의 번개가 내리쳐져 그들은 둘로 갈라졌고, 원래의 서로의 짝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기원이라고 합니다. 


https://youtu.be/_zU3U7E1Odc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많은 신화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천지왕 본풀이'에 대해 최근에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헤드윅에서 했던 이야기와 '천지왕 본풀이'의 이야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분리'와 '분화', '변별'을 통한 '질서'를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지왕은 두 아들은 세상을 두고 내기를 합니다. 세상이 탐났던 소별왕은 내기에 이기기 위해 속임수를 쓰게 되고 결국 이승을 차지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혼란, 오만, 탐욕, 속임수가 가득하게 된 이유라고 합니다. 이승을 다스리는 자가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속임수를 썼기 때문에 그가 다스리는 세상 또한 그리 된 것입니다. 


이승이 탐나 세상에 오게 되었지만 소별왕이 만난 세상은 온갖 것이 구분되지 않은 무질서 자체였습니다. 사람과 짐승, 나무들이 말을 하고, 해와 달이 두 개씩 떠 있어 시간의 구분이 없으며,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여 였었습니다. 


소별왕은 대별왕에게 도움을 청하고 대별왕은 활을 쏴서 해와 달을 하나씩 떨어트려 낮과 밤의 구분을 바로 잡습니다. 가루를 뿌려 짐승과 나무의 입을 굳게 하여 말을 하지 못하게 하여, 오직 인간만이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구분합니다. 영혼의 무게를 재어 가벼운 자는 저승으로 무거운 자는 세상에 남도록 하여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눕니다. 


이러한 구분이 곧 질서가 된 것입니다. 언어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닌 것들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명명하여 그들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명사'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름 붙여졌다는 것은 인간의 인식 속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은 사실 이름이 붙여진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이름이 A 이든 B 이든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습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가장 먼저 명사를 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운 말은 명사일 텐데 가장 먼저 명사를 잊는 것입니다. 세상을 둘러싼 사물의 이름들을 먼저 잊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 덜 중요한 언어가 명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잊는 것이 '동사'라고 합니다. 동사를 잊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먹다, 자다, 걷다, 뛰다, 씻다, 입다를 빼면 인간은 '살다'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사'를 좇아 삶을 불태우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남들에게 불려질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형용사와 동사를 버리는 것입니다. 지위라는 것은 결국 나에게 붙여진 '명사'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분 지어지는 명사를 얻기 위해 '삶'에 가장 필요한 동사와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형용사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명사를 많이 갖지 못한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장기하의 노랫말처럼... 부럽지가 않습니다.


결국 가장 먼저 잊힐 명사가 아니라 삶이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할 형용사와 동사를 붙잡는 시간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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