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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Dec 03. 2022

그때 그 사람

대학교수가 있었다. 아직 정교수가 되지 않아서인지 수업을 꽤 많이 맡아서 했으며 말끝에 칼날 같은 것이 있었다. 칼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칼로 매일 성실하게 수업을 들으며 착실하게 학점을 챙기려 하는 학생들을 자주 찔렀다. 과제를 많이 냈으며 점수를 박하게 주었으며 결강에 대한 보강을 저녁 6시에 하기도 했다. 


명사 뒤에 성(性)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붙여 감탄사처럼 쓰기도 했다. 흔하지 않았던 저녁 6시 보강 수업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 밤性"이라며 창 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그날 수업은 푸코의 '몰아-세움'에 대한 내용이었다. 학생들은 다른 이유와 감정으로 창 밖의 어둠을 응시했고, 어둠이 깊어지는 9시를 향해 치닫을수록 피로가 짙어 갔다. 기-승-전-과제로 끝나는 그 교수의 수업은 과제를 선언하는 마지막에 극도의 긴장감에 다다랐다. 그날의 수업도 밤性과 과제를 남겼던 것 같다. 


https://youtu.be/gYSRrer6iO8


흡연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달랐던 때라서 뒷산을 배경으로 자판기가 한 대 놓여 있던 출입구는 종이컵을 들고 담배를 피우는 곳이기도 했다. 주로 복학생, 복학생과 친한 학생들이 옹기종기 보여 하나밖에 없는 벤치주변에 앉고 서서 커피와 담배를 양손에 쥔 채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 그 교수는 가끔 나타났다. 쾌적한 연구실을 두고 하필 그곳에 나와 학생들이 담배와 종이컵을 든 채 어색한 인사를 하고 불편한 공기를 마시게 했다.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판기에서 블랙커피를 뽑았다. 마음에 칼날을 품은 사람이라 그런지 달달한 밀크 커피는 마시지 않나 보다 했다. 


블랙커피를 한 손에 쥐고 뒷산을 바라보며 학생들이 양보한 벤치에는 앉지도 않고 계단 끝에 섰다. 찬 공기를 만나 뭉게뭉게 뜨거운 김으로 피어오르는 커피를 입에 대지 않고 향기만 맡았다.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에 코를 대고 눈은 뒷산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다가 한 모금도 먹지 않고 다 식어버린 커피를 버리고 돌아갔다.


웃음기 없이 늘 인상만 쓰던, 다 식어버린 블랙커피 같던 교수는 정교수가 되었고 학과장이 되었다. 대학에 다시 가 보지는 않아서 여전히 가슴에 칼날을 품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그의 가슴의 칼날이 무뎌져 있다면 조금 슬플 것 같기도 하다. 


그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파편 같은 기억밖에 없지만 그 교수는 뭔가 어떤 캐릭터가 되어 나의 세계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업데이트할 필요 없이 안정적으로 나의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의 변화를 알게 되어 안정적이고 괜찮아 보였던 캐릭터의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싶지 않다.  


기억 속에 알던 사람을 다시 만날 때 반갑고 궁금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이유. 

아마 그 사람이 기억하는 과거의 나를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내 기억 속에 안정적으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그 사람의 기억을 보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소설 속의 인물처럼 기억 속의 인물들도 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야기가 인물, 사건,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인물이 바뀐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새로 써야 한다. 기억 속에 어떤 추억과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인물의 특성이 바뀐다면 그 에피소드는 훼손되고 만다. 부유하는 파편의 재료들로 편집하고 구성하여 내 기억 어딘가에 하나의 세계로 자리 잡은 이야기를 그대로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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