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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Dec 23. 2022

크리스마스에 묻힌 다른 이야기

크리스마스가 다가옵니다. 12월 달력을 펼치는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이 12월 25일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이 듭니다. 12월 25일이 지나면 부풀었던 바람이 빠지고, 빠르게 흘러가던 시간의 쏠림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리의 음악들과 불빛들, 무엇인가를 사고 먹고 즐겨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광고들 속에서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뻗다가 어느 순간 멈칫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때 보았던 만화 <플랜더스의 개>의 영향일 수도 있고, 언젠가 읽었던 <행복한 왕자>를 읽었던 순간의 내가 나의 손을 잡기 때문입니다. 


그 두 이야기를 알고 난 후로 '크리스마스'하면 마냥 행복하고 신나기보다는 슬프고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듭니다. "파트라슈~"라는 외침으로 시작하는 주제곡이 흐르고 초록색 들판 위로 우유를 배달하는 파트라슈와 네로의 모습을, 네로와 아로아의 알콩달콩 우정에 몰입하며 보다가 도달한 결말의 충격이란! 네로와 파트라슈와 네로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루벤스의 그림 아래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채 발견된 장면은 만화이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과 해피엔딩만을 보여주는 여느 만화와 다르게 마음에 어떤 세상의 비밀을 새겼습니다. 


나이 든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강아지가 죽을 수 있다는, 모두가 즐거운 한 때에 누구보다 슬프고 아픈 존재가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비밀이었습니다. 네로만큼이나 어렸던 저는 당시 그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거나 기다리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네로와 파트라슈를 닮은 세상의 누군가에 대한 어떤 부채감이 생겼습니다. 


http://www.nyculturebeat.com/


<행복한 왕자>는 슬픔과 더불어 답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질문을 남긴 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자신을 깎고 희생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왕자의 곁을 지키기 위해 봄을 찾아 떠나지 않고 도시에 남은 제비의 선택 또한 사랑일까? 객관적으로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 처한 누군가가 자신은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돕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되는 것일까?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데 내가 공감할 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은 불행이라고 단정 지어도 되는 것일까? 모두의 행복이 다 다르다면 행복의 정의는 대체 무엇인가?



<행복한 왕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즐거운 감정과 상태라고 생각했던 '행복'이라는 것에 대한 감히 대답할 수 없는 거대한 질문들만 남긴 책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발 밑에서 죽은 제비를 보며 깨져버린 왕자의 조각은 행복한 도시의 선명한 불행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하필 크리스마스의 슬프고 어두운 면을 마음에 담았었네요. 그런데 크리스마스의 오직 행복하고 풍성하고 신나는 면만 마음에 담고 있는 한 집에 사는 어린 사람이 있어서  네로와 파트라슈, 행복한 왕자와 제비는 잠시 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어린 사람은 조금 천천히 '행복'이라는 질문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린 사람은 돌봄을 받지 못한 어린 사람의 존재를 조금 천천히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어른들이 '행복'에 대한 질문에 더 깊이 파고들어 조금 나은 답들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어린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고 지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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