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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Dec 27. 2022

離家樂 ; 삶은 여행

여행 좋아하시나요? 다른 도시로 다른 나라도 떠나는 것이 여행이겠지만, 정지용의 말처럼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잠시 앉아 있는 것, 나를 집이 아닌 다른 곳에 잠시 두는 것 또한 생활을 잊고 나 자신과 맨 눈으로 보게 되는 세상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저 집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여행자의 눈'과 '여행자의 마음'이 있다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시인 정지용은 여행을 '이가락(離家樂)'이라 했다. 집 떠나는 즐거움.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우선 근사한 여행지를 전제하지 않아서 좋다. 그저 집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 뜻이 좋다.

  [그 좋았던 시간에] 김소연 여행산문집 32쪽


내 몸을 집이 아는 다른 곳에 잠시 두고, 내 마음이 생활에 묶이지 않도록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어깨에 긴장이 풀리고 머리가 말랑말랑 해지는 듯합니다. 그 틈새로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오고 다른 생각들이 잠시 마음에 머뭅니다. 그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매듭을 잘라 낼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이 생기기도 합니다.


집을 떠나기 전의 나와는 다른, 어깨가 가벼워지고 머리가 말랑말랑해진, 떠나기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을 떠나 좋은 시간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가면, '집'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삶 자체가 여행지를 선택할 수 없고, 동반자를 선택할 수 없는 여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여정을 정해두지 않아서 한없이 열려 있는 여행이 바로 '사는 일'인 것 같습니다.


성인으로 독립하기 전의 삶은 패키지여행 같습니다. 태어난 환경에 따라 의 방식과 내용이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벗어나고 싶고 나름의 여정을 짜고 싶지만 다른 일행들이 있어서 선택이 폭이 좁아집니다. 대신에 선택에 대한 부담과 안전에 대한 걱정이 없이 편안하게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여행기도 합니다.


독립을 하고 나며 그야말로 자유 여행의 시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 여행을 하고 나서 무용담처럼 기차를 놓친 일, 소통이 되지 않아서 했던 실수, 우연한 인연, 갑자기 찾아온 행운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독립을 하고 난 후 우리의 삶의 모습과 참 닮아 있습니다.


패키지여행을 하며 그토록 원했던 자유이지만 막상 자유도 내가 가진 것 안에서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적은 것 같아서 자유가 아니라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해'라는 강압을 느끼기도 합니다. 넓어진 세상에 대해 뻥 뚫린 상쾌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황량함과 막막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여행을 떠나면 돌봄과 머묾의 시간이 깃든 집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독립을 하면 가끔씩 패키지여행 같았던 그 시간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여행의 백미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편안함과 안도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 여행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삶은 또 여행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행을 떠나면 돌아올 수 있지만 삶은 돌아갈 수 없는 여행이네요. 시간이라는 기차에 얹어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한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여행입니다.


이 한없음에 위로라면 동행이 아닐까요? 계속 변해가는 시간과 풍경 속에서 변하지 않고 내 옆에 있어주는 존재는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알고 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 것 같습니다. 각자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지만 같은 기차를 타고 가며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맞출 수 있는 동행이 있다면 두 발로 땅을 힘차게 디디며 나아갈 수 있겠지요.


<원피스>에서 루피가 여정을 떠나며 동료들을 끌어 모으듯, <포켓몬스터>에서 지우가 친구들과 함께 시련의 순간마다 "이건이 우리의 전력이다!"를 외쳤던 것처럼 동행을 만들어가며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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