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의 <인생의 역사> 독서 모임 후기
<인생의 역사>는 5부로 구성된 책이다. 2016년 한 해 동안 한겨레에 '신형철의 격주시화'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던 글들을 묶어서 낸 책이다.
1부 고통의 각
2부 사랑의 면
3부 죽음의 점
4부 역사의 선
5부 인생의 원
독서모임에 참여한 문장의 이유님은 이 질문을 밤늦도록 고민하셨다고 했다. 나름의 생각을 내놓기 위해서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하여 이야기하신 내용이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그 이야기가 파문이 되어 내 생각에 헐거웠던 부분을 단단한 박음질로 이어주셨다.
기억나는 대로 옮겨 적으며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저는 고통의 각은 어떤 꺾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역사의 선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가다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꺾이는 지점이 바로 고통의 각이 아닐까요. 가려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꺾이는 순간 각이 만들어집니다. 꺾임의 지점에서 다시 선을 그리며 나아가고 그러다가 또 어떤 고통을 만나 꺾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궤적이 꺾이고 나아가고 반복하며 멀리서 보면 인생이라는 하나의 원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다. 각과 점과 선이 원으로 나아가는 장면이었다. 흐릿했던 어떤 생각이 또렷해지고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수학 시간에 배웠던 각의 의미가 새롭게 되살아났다. 수학 책에 박제되어 수학문제의 답을 찾을 때만 떠올렸던 그 생각들이 나의 삶과 연결되며 가장 들어맞는 삶의 공식으로 다시 나타났다.
어떤 고통은 이제까지 걸어왔던 선을 되돌아갈 만큼 큰 힘으로 작용하여 예각(Acute Angle)이 된다. 또 어떤 고통은 나아감의 방향을 휘게 하는 정도의 둔각(Obtuse Angle)을 만들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인생의 굴곡이라는 것이 고통의 각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죽음의 점은 그런 점에서 어떤 멈춤이라고 생각했어요. 각을 만들 수도 선을 만들 수도 없는 멈춤과 끊김이 죽음이 아닐까요. 또 그런 죽음의 점들이 모여 역사의 선이 생기는 것 같아요."
점은 있지만 없는 도형이다. 점은 면적이 없다. 어떤 한 지점을 이야기하고 사실을 눈으로 보이게 할 수 없는 값이다. 죽음과 너무나 닮아 있다. 분명히 죽음은 있지만 없다.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 눈으로 볼 수는 없고, 다만 죽음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점'의 속성과 닮았다.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의 피날레가 되도록 해.
유일한 황제는 아이스크림의 황제니까.
<아이스크림의 황제> 윌리스 스티븐슨의 시 중에서
한 생애를 통해 다양하게 존재했던 '보임'이 아주 단순하고 투명한 '있음'으로 축소되는 순간이란 언제인가. 바로 장례식이다.
<인생의 역사> 146쪽
신형철이 책에서 말했듯이 다양한 보임이 '있음'으로 축소되어 하나의 점으로 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이다. 어떤 죽음은 다른 죽음으로 연결되어 역사의 선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점이 역사의 선이 되기 위해서는 두 점을 연결하는 힘이 필요하다. 과거에 머물러 있던 죽음의 점을 오늘에 연결될 때 비로소 그 어떤 죽음은 사라지지 않고 역사가 된다.
황지우의 시들은, 광주와 서울 사이에 있어야 할, 그러나 끊어져버린 어떤 선을 연결하는 일에 집요하게 바쳐졌다. <인생의 역사> 183쪽
인간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고통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욥처럼 무죄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질 신이 없는 무신론자들은 어떻게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역사> 97쪽
신을 믿지 않는 인간이 고통의 각을 감싸기 위해서 발명한 것이 사랑의 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고통이 되기도 함을 우리는 안다.
고통, 사랑, 역사, 죽음을 각, 면, 선, 점으로 나누어 담았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인생이라는 원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특히 죽음을 이야기하는 시를 말하며 우리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잠언 가운데 하나가 메멘토 모리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개선문을 통과하는 개선장군이 탄 가마에는 가장 비천한 신분의 노예가 함께 탔다고 한다. 그 노예의 역할은 개선장군에게 계속하여 귓속말을 하는 것이다.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이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개선장군에게 노예는 "memento mori"를 속삭이다. 삶의 절정에서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이야기를 하며 느낀 점은 '삶'이 읽기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시는 다르게 읽혔다. 어찌 보면 바로 그 지점이 함께 이야기를 하는 의미이다. 자신의 상황과 시가 만나 공명하며 누군가에게는 한 줄의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다. 오래 그 문장에 머물며 그 문장과 대화를 나누었고 위로받았다. 그 이야기를 함께 듣는 것만으로 나 또한 처하게 될 삶의 비슷한 국면에서 그 문장이 나에게 다가와 메시지가 되어 줄 것임을 예감한다.
그러나 내 몸을 구했네, 왜 내가 그 방패를 염려하랴?
가져가라지. 그에 못지 않은 것을 나는 다시 가지리라.
<방패 때문에> 아르킬로코스의 시 중에서
헤르만 플랭켈이 "무의미해 보이는 순교적 희생"을 거부하는 "난폭할 정도의 솔직함"이라고 지칭한 것이 다음 다섯 글자에 짜릿하게 응축돼 있다. "가져가라지."
<인생의 역사> 167쪽
세렌디피티님도 "가져가라지"에서 그 짜릿함을 느끼셨다고 했다. 그 문장에서 어떤 메시지를 느꼈다는 것은 그 시를 쓴 아르킬로코스의 무거운 짐을 짐작할 수 있는 요즘을 살고 있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중에서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당신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라니!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요즘 흐트러진 나의 정신을 다시 가다듬게 되는 메시지였다.
세 명이 함께 얼굴을 마주하고 <인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 시간은 참 진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 권의 책이 있어서 깊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 참 많은 '나'들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순간들이 있었고 포착된 생각과 사라진 생각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