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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Feb 12. 2023

김영하, 이야기의 힘을 말하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북 콘서트 후기

토요일에 김영하작가의 북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주제였습니다. 김영하 작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야기의 힘'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운 이야기들이라서 제가 적은 노트를 바탕으로 요약해보려고 합니다. 


1) 인간은 왜 이야기를 좋아하는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진화적으로 더 유리했다. 이야기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고, 이 메시지는 생존에 유리한 오랜 시간에 걸친 지혜이다.


메시지를 단순한 정보의 형태로 전달했다면 쉽게 잊혔을 것이다. 감정이 담긴 지혜의 메시지는 이야기의 형태로 오래, 널리 전달되었다. 또한 이야기는 정보와 달리 한 가지의 지식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상징이라는 모호함을 통해 여러 상황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원숭이 보다 더 나약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허구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야기도 일종의 허구이며, 신화나 옛날이야기들은 구전으로 전승되는 허구이다. 인간이 믿는 허구에는 국가, 화폐, 기업, 신용, 신, 법 등이 있다. 이러한 허구에 대한 믿음은 대규모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고 그것이 인류의 힘이다.



2)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을까?


사람들의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상실, 고난, 선한 본성과 노력, 조력장의 등장, 성장, 문제의 해결, 행복과 같은 일정한 구조가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겪은 고난이나 혹시 겪게 될까 불안한 최악의 상황을 간접 경험하고 반복적으로 학습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 시도했다면 위험할 수 있는 일들을 안전하게 시험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일종의 정신적 보험이라고 할 수 있다. 


f-MRI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이야기로 경험한 것과 실제 경험은 거의 동일하게 뇌에 작용한다. 그렇게 실제 경험처럼 읽은 이야기의 경험은 일종의 부작용으로 '나'가 '타인'과 동일시되는 현상을 만든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게 하는 일종의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19C  이전 소설에는 감정 표현이 거의 없다. 19C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이고 시민사회가 되면서 소설에 감정이 드러난다. 도시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이해할 수 없는 미친 사람들을 이해할 필요가 생겼다. 이 때는 모두가 모두에게 미쳤다고 말하는 시대였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언어화된 이야기를 읽으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강한 사람은 감정을 폭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언어화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는 용감한 사람이다. 언어화하지 못한 극단적인 감정이나 상황에 대해 용기 있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영원히 억눌리지 않고 어디선가 반드시 터진다. 이때 언어화된 글을 읽으며 감정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지 않을 수 있다. 잘 쓰인 감정표현은 지구상의 누군가를 구한다.


소설을 읽을 때 찾아야 할 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나'의 감정이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나의 감정을 찾으며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통합하는 것이 소설 읽기의 핵심이다. 소설을 읽다가 밑줄을 긋는 순간은 바로 그런 나의 감정을 발견했을 때이다. 


3) 언제 작가가 되는가?


유창성의 함정(유창성 효과)이 있다. BTS가 추는 춤을 10번 보면 자신도 그 춤을 따라 출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중학교 때 오헨리의 단편선을 읽다가, 이 정도 단편은 나도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단편 소설을 썼다. 


노트 말고 A4 용지 같은 종이에다 감정을 가감 없이 써라. 가감 없이 쓴 그 글을 몹시 위험하다. 그러니 찢어서 버려라. 감정을 가감 없이 쓰면서 감정이 언어화되는 쾌감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을 찢어 버릴 때도 역시 쾌감이 있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며 어느 순간 '아, 이번 글은 나중에 다시 보고 싶은데. 찢기 아까운데' 할 때가 있다.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하면 자신의 부족함이 느껴진다. 나의 언어의 부족함이 느껴지는 순간이 바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저는 특히 "언어화"의 힘에 대한 부분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읽기를 통해 통합되어 간다는 이야기가 참 좋았습니다.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라는 노랫말처럼 내 경험이나 감정에 이름이 없어서 답답하고 모호했을 때 적당한 이름을 붙여준 글을 읽을 때 청량한 해방감을 느낍니다. 말로 담을 수도 없고,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었던 감정과 상황을 이야기를 통해 만났을 때 이해하지 못해서 검은 장막으로 덮어두었던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과거의 장막을 걷어내야 더 또렷하고 온전하게 현재를 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를 모르고, 그러니 내가 뭘 쓸 수 있는지를 역시 모르고, 다 쓰이고 난 후에야 그것이 내가 쓰려고 했던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고, 좀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을 무슨 운명으로까지 여기게 되고, 또한 그 책의 저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또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쯤 되면 이미 발표한 소설이 가진 힘을 두려워하는 지경이 된다.

                                     <검은 꽃> 개정판을 내며에서 김영하의 말 중에서


김영하작가도 쓰면서 알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니 위로가 됩니다. 저도 글을 쓰기 전에는 내가 뭘 쓸 수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쓰고 나서야 뭘 쓰고 싶었는지 알게 됩니다. 어떤 때는 처음에 쓰려고 했던 글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서 일단 임시 저장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글은 끝까지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결국 그냥 지워버리게 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이런 혼란의 시간을 지나 어떤 글을 남기고, 글을 읽는 사람 역시 읽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글과의 접점을 찾아 어둠을 더듬는 마음으로 글을 읽습니다. 그런 두 혼란이 만나는 무한 카오스 속에서 먼지가 보여 빛나는 별이 되듯이 어떤 발견과 알아감의 질서가 탄생할 때가 바로 '감정의 언어화'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을 쓰는 사람도 자기의 손 끝에서 무엇이 탄생할지 모르는 그 미스터리함이 쓰기의 묘미이고, 그 미스터리함을 이어받아 자신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이 읽기의 묘미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서 자꾸 책을 사게 됩니다...김영하작가의 책은 <여행의 기술>밖에 읽지 못했는데 이번 북토크를 통해서 <검은 꽃>의 일부를 읽고, <작별인사>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도 읽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 책에서 만나게 될 나의 감정의 언어들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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