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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꽃 바람 Feb 15. 2023

내 감수성의 원천은 무엇일까?

이기호 짧은 연작 소설 <눈감지 마라> 마음산책(2022)

지난주에 통화를 했던 친구와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친구와 오후에 2시간 정도 커피 한 잔을 하기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집안 청소를 하고, 오랜만에 옷도 챙겨 입었습니다. 동생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이를 동생 집에 맡기러 가는 길에 친구에게 어디서 만나면 좋을지 카톡을 보냈습니다.


답장 대신 전화가 온 친구는 오늘 약속을 깜박 잊었다며 지금 가족들과 밖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는 좀 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다음 주에 만나자고 합니다. 아이를 맡길 방법을 궁리하고, 2시간의 여유를 위해 분주한 오전 시간을 보낸 나의 호들갑을 친구에게 들키기 싫어서 가볍게 그러자고 얼른 대답합니다.


갑자기 약속이 취소되었는데 기분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제 가방 속에는 벼르던 소설 한 권이 있었거든요!


동생 집에 와서 조카와 아이 밥을 챙겨 주고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조카와 아이의 놀이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조용히 안방에 들어와 전기장판을 켜고 소설을 읽기 시작합니다. 등이 따뜻해서 점점 쿠션에서 몸이 따뜻한 장판으로 내려와 거의 누운 듯한 자세가 됩니다. 다음을 읽고 싶지만 따스한 낮잠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해서 안경을 벗고 까무룩 잠이 듭니다.


그러다 일어나서 동생과 협상을 합니다. 내가 점심을 챙겼으니 너는 저녁을 챙겨라, 그리고 나는 잠시 나갔다 오마. 그렇게 밖으로 나와 조금은 낯선 동생네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서 돌아옵니다.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컵 두 개에 나눠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동생과 나눠 마십니다. 동생이 차려준 저녁상에 아이들과 같이 앉았습니다. "언니랑 나랑 애들이랑 다섯이서 사는 것 같아"라는 웃픈 이야기를 하며 오늘도 우리의 육아공동체는 끈끈해집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오늘 한 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기호의 <눈감지 마라>입니다.


늘 드나드는 익숙한 장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은 죽음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누군가의 삶이 짧은 연작 소설의 형태로 이어집니다. 2017년 1월부터 2021년 크리스마스이브까지, 5년 동안 일간지에 연재했던 소설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합니다. 


코로나19로 세상에 더 넓게 퍼지게 된 언택트, 온택트는 만나지 않고도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지만, 컨택트만이 해소할 수 있는 새로운 문제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한 공간에 있지만 만나지 못하고 다른 곳에 온택트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눈감지 마라>는 이 책을 덮을 때쯤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됩니다. 나는 뜬 눈으로 눈을 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익숙한 이야기, 낯익은 죽음, 예상 가능한 비극 앞에서 "눈감지 마라". 아마 소설을 연재하는 5년의 시간 동안 이기호작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지방에서 태어났고, 지방에서 성장했으며, 지금도 지방에서 살고 있다. 그건 누구도 나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내 감수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나는 그거 하나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기호, <눈감지 마라> 작가의 말 중에    


저는 섬에서 태어났고, 섬에서 성장했으며, 지금도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문장을 읽고 보니 그것이 내 감수성의 중요한 원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창희는 "서울은 계란 노른자, 경기도는 흰자", "하고 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서 태어나가지고"라는 말을 합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경기도도 아닌 지방의 소도시는 '계란 껍데기이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사는 섬은 계란 위에 붙은 먼지쯤이 될까요?


중심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감각, 중심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모종의 압력, 중심에 대한 동경과 혐오와 실망과 무지, 중심을 외면하고 싶지만 여전히 중심으로부터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주변부라는 자각. 이런 것들이 범벅되어 저의 감수성의 원천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감수성의 원천.

감수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려 본 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감수성은 뭔가 여리고 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말랑하고 유연한 마음이라 생각돼서 그랬나 봅니다. 감수성이라고 하기엔 마음에 굳은살이 조금 박힌 것 같기도 합니다. 


'나의 감수성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죽음도 그 원천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을 보내는 몇 번의 장례식을 거치면서 약한 존재, 죽음의 위기에 처한 존재, 죽음과도 같은 이별에 대한 냄새를 잘 맡게 되었습니다. 어떤 장면이나 사건이 죽음과 이별로 읽히는 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곧 사라질 것이라는 감각은 여러 장면에 폭넓게 깔립니다. 


곧 사라질 것이라서 힘을 다해 마지막까지 시선을 두게 됩니다. 마음을 두고 조금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사라질 대상을 포착하기 위해서 부족한 언어를 쥐어짜고 감각을 곤두세워 봅니다. 


곧 사라질 것이라서 너무 크게 의미를 두지 말자고 말합니다.


곧 사라질 것이므로 큰 의미를 두고 소중히 간직하자고 말합니다.


곧 사라진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과 생각의 이유가 됩니다. 어떤 상황에도 들어맞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줍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살아야 하는 이유, 자고 나면 내일은 없을 수도 있는데 태평하게 잠이 들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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