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저. 노영희 옮김. 양철북
한 번에 5권이나 같은 책을 구입한 적이 있습니다. 3권은 가까운 친구에게 선물해 주었고, 1권은 마음껏 밑줄을 그으며 읽었고, 1권은 깨끗하게 보관하였습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줄 책"은 참 많지만 문득 이 책이 떠올랐습니다.
[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은 코르착의 문장들을 엮은 책이자, 한 편의 시집이기도 합니다. 문장이 함축적이고 아름답습니다. 또한 코르착에 대한 헌시이기도 합니다.
야누슈 코르착은 '아이'를 어른이 되어가는 중간적 존재가 아닌 이미 완성된 존재로 보았습니다. 지금 적용해도 손색이 없는 '어린이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철학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코르착과 함께 시간을 보냈던 아이들은 사랑과 자존감으로 빛이 났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요즘 학교에서 시도하고 있는 앞서 가는 교육 모델인 '어린이 자치'를 일찍이 시작했습니다. 어린이가 스스로 참여하여 법을 만들고 지키게 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어린이 법정을 열어 어린이 스스로 판결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제대로 된 보살핌이나 교육을 받지 않아서 '약탈과 속임수'를 세상의 언어로 알고 자란 고아들과 함께 고아원에서 말입니다.
1878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1905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러일 전쟁이 일어나서 징집되어 됩니다. 전쟁에서 돌아와서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고,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시설에서 봉사를 하게 됩니다.
1912년 평생의 동료인 스테파와 함께 유대인 고아원을 직접 설계해서 '고아들의 집'을 엽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다시 러시아 군인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나갑니다. 러시아 키예프에서 만난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그때의 경험으로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씁니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했고, 코르착인 다시 '고아들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1924년 국제연맹이 발표한 인권 선언문에 대해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 호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 어린이 신문 <작은 비평>을 창간합니다. 전국의 아이들의 신문에 질문과 고민 사연을 보내면 글로 엮는 것입니다. 이 신문의 편집장은 코르착과 여자아이 1명, 남자아이 1명이었고 이 주간지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발행되었습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1942년 8월 6일 '고아들의 집' 어린이 192명과 코르착, 10명의 교사들이 나치에게 끌려갑니다. 어린이를 상징하는 초록색 깃발을 앞세우고, 트레블린카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열차에 탔습니다. 그리고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야누시 코르차크] 필립 메리외 글. 페프 그림. 윤경 옮김. 도토리숲(2022) 참고
야누슈 코르착은 3번의 전쟁을 겪습니다. 말 그대로 광풍의 시대를 살다 간 것입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모두가 '독립'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달음질 칠 때 때 '어린이'를 말했던 방정환선생님의 모습도 생각납니다. 그 격변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가장 보잘것없는 존재이며, 부나 명예를 줄 수도 없는 존재들을 향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랑을 실천했다는 것. 그리고 매 순간 그들의 향한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만으로도 벅찬 일들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는지, 그 마르지 않는 선의와 열정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는 미래를 살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언젠가는', '내일'의 사람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이미 '완성형' 인간이라는 말도 있지요. 어린이는 '어른'이라는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가는 중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인간입니다.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 '어른'인 건가요? 언제부터 내일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의 사람이 되는 '어른'이 되는 걸까요?
아이들의 지각 능력에 놀랄 때가 많은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이 문장을 읽고 얼마나 뜨끔했는지 모릅니다. "어쩜, 어린애가, 대단하다!"라는 감탄 안에는 사실은 '어린애'라고 얕잡았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가 죽음에 대해 말하거나 삶의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질문을 할 때 그저 '재롱'으로 여기거나, 상상의 비유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사랑받고 존중받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UN은 1979년을 '아동의 해'이자 '야누슈 코르착의 해'로 정하고,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그로부터 44년이 지났지만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나 어린이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선언이 나오기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곳에서 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받고 존중받을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고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이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그 이야기들에 '자극적'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이미 폭력과 억압이 만연합니다.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상 속에서 거리낌 없이 일어나는 어른이라는 권위의 횡포는 더 많을 것입니다. 그 권위에 눌려 그렇지 않았도 작고 약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더 작게 만듭니다.
신이여, 아이들을 가장 편한 길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
어린이들은 야누슈 코르착이 살던 시대 보다 조금 편안한 길을 걷게 되었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길'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야누슈 코르착 글과 삶으로 보여줬던 아름다운 길이 있어 다행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아이들만을 위한 길이 아니라 분명 모두에게 아름다운 길일 것입니다. 그 길의 동반자로 아이들을 존중하고 믿고 사랑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