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것이 곧 '살림'인 것 같습니다. 공간은 물건으로 채워지고, 어딘가에 놓이고, 뭔가에 쓰이고,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는 당연한 일상의 흐름 속에 '살림'이 있습니다. 혼자이건 둘이건 관계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림살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가끔은 '살림'이라는 녀석이 독자적인 생명체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질서에서 벗어나 날뛰는 야생마처럼 순식간에 무질서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또 세심하게 살피고 적재적소를 놓치지 않고 가꾸어 주면 손안에 잡힐 듯 꽤 얌전히 규칙과 질서의 세계가 도래한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합니다. 라면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유지태 님의 절규처럼 "어떻게 살림이 변하니?"라는 배신감이 착각을 비웃듯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는 것이 문제이긴 합니다.
별것 아닌 듯 별것인 것이 "살림"의 묘미 아닐까요? 못하면 대번에 티가 나고, 그럭저럭 하는 것은 티도 나지 않지만, 또 굉장히 탁월한 살림'꾼'들의 살림살이는 고수의 경지입니다. 가끔 유튜브에서 경쾌한 음악과 함께 정갈한 살림살이를 한 편의 영화와 멋진 퍼포먼스를 보듯이 감탄하며 보기도 합니다. 감탄을 연발하는 본인의 집은 엉망입니다. 정갈한 다른 집 살림살이를 넋을 놓고 보다가 뒤죽박죽 내 집을 보며 깜짝 놀라 어떻게 좀 치워볼까 머리로만 궁리하다가 그럭저럭 타협점을 찾아 마무리하고 조금 미안한 듯하게 '살림'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서기도 합니다.
살림'꾼'은 아니지만 살림살이를 해야 하루가 살아지는지라 줄을 서듯 내 앞에 당당히 '나 좀 어떻게 해봐'를 방백으로 내던지며 동시 다발적으로 밀려드는 일들 가운데에도 내 눈에 조금 예뻐 보이는 해봄직한 일들과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저의 원픽은 언제나 '정돈'입니다. 정리가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는 비교적 결단의 에너지가 많이 드는 작업이라면 정돈은 제자리를 찾아주는 손이 많이 가지만 손을 내려놓았을 때 뿌듯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제자리를 찾아주었다는 뿌듯함은 정돈한 물건을 다시 찾을 때 어디에 있는지 머리를 쥐어짜야만 떠오를 때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내가 이러려고 정리 상자를 사고 요리조리 자로 재가며 정성껏 테트리스를 한 것은 아닌데....
그리고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일은 단연코 쓰레기 버리기입니다. 쓰레기가 쌓이는 속도는 무서운데 쓰레기를 치우기는 더 무섭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수, 금, 일 단 3일만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 처리 건물로 가져가야 하는데 꽤 꼼꼼하신 어르신들이 낮시간에는 매의 눈으로 검수를 하십니다. 멋모르고 들어섰다가 아직 재활용의 지혜가 매우 부족한 풋내기를 훈수하는 어르신들의 일장연설을 듣고 주섬주섬 쓰레기를 다시 들고 와야 하는 일을 겪은 후로 낮에는 절대 그 건물로 들어서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이 퇴근을 한 밤 시간을 공략해야 합니다. 그런데 밤에 엘리베이터에서 부스럭부스럭 쓰레기 봉지를 들고 탔다가 아래층 분들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그 공기가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습니다. 반갑게 느껴지는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재활용 건물로 들어서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재활용의 지혜가 부족해 보이는 분들을 마주치게 되어 또다시 멋쩍은 공기를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쓰레기는 나의 살림이 아니라는 확신이 선 뒤 이 일은 다른 이에게 일임하였습니다. 그 일이 너무나 피하고 싶은 '살림'이기에, 나머지 살림은 모두 다 떠안아도 좋을 만큼 피하고 싶은 '살림'이기에, 극적으로 타결되기 어려운 살림살이 가르기 전쟁의 종지부를 찍고 가정의 평화도 찾게 되었습니다.
살림을 도와주는 많은 기기들 덕분에 살림살이가 한결 나아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청소기도 가끔 '청소'해 주어야 하고, 세탁기도 가끔 '세척'을 해주어야 하며, 설거지를 끝내면 싱크대도 '설거지'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그는 참 나아지질 않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업데이트가 잔뜩 밀린 컴퓨터처럼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그래도 10년을 넘게 두드리며 살았더니 지금은 한 50%쯤 업데이트가 되어 두 번에 한 번은 살림'꾼' 흉내를 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새로운 업데이트와 밀린 업데이트를 부지런히 하며 살림살이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