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좋아하세요?

Turn on the radio

by 연꽃 바람

라디오. DJ. 주파수. 안테나. 음악. 이야기. 광고.


라디오를 좋아합니다. 꽤 즐겨 듣고 틈만 나면 켜 두고 싶어 합니다. 잠깐의 설거지를 할 때 주방에 달아둔 라디오를 켭니다. 혼자 방에서 작업을 할 때는 안테나를 쭉 당겨 대체 주파수 어디쯤인지 모를 다이얼을 돌려서 주파수를 맞추는 구형 라디오를 켭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거실에 있는 컴포넌트에서 라디오를 켭니다. 자동차를 타면 시동을 걸자마자 라디오가 흘러나옵니다.


CD나 음악 앱에서 듣던 노래도 라디오에서 들으면 다른 맛이 납니다. 같은 음식도 담긴 접시에 따라 달리 보이듯이 라디오에서 들으면 예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예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맛보게 되면 없던 미각이라도 동원하여 그 정성스러운 음식의 진미를 맛봐야 하는 사명감이 드는 것처럼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면 내 기억과 청각의 깊은 곳에 그 음악이 노크를 하며 어서 깨어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새벽 1시 30분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노래입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삽입되었던 곡이지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장동건, 손지창의 농구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마 혼자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이 노래가 나왔다면 열창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https://youtu.be/obDwomyhfjk


DJ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특히 DJ의 말투가 제게는 중요한 청취 기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지영님의 부드럽고 군더더기 없는 말투는 참 상쾌합니다. 아나운서답게 낱말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문장과 문장 간의 호흡이 적당하여 이야기를 듣는 순간 목넘김이 좋은 맥주를 마시는 듯 상쾌하고 걸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연을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가 참 좋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작게 만들거나 흠집을 내는 법이 없이 오히려 사소한 이야기에도 광택을 내는 그 전달력이 정말 탁월합니다. '정지영의 오늘 아침'은 광고 없이 24시간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n_LDu81uIR4


배철수 DJ의 말투도 좋습니다. 까끌까끌 아빠의 수염 같은 말투입니다. 부드럽거나 다정하지는 않지만 엄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까칠함과 올곧음이 좋습니다. 문장과 음악 사이의 적당한 쉼이 좋습니다. 급하지 않게 음악을 전달하는 디스크 쟈키! 음악을 자르지 않고 음악에 감탄하고 라디오 부스에서 청취자의 귀까지 음악이 안전하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까칠함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그리고 6시 30분에 나오는 '철수는 오늘'이라는 코너를 참 좋아합니다. 배순탁 작가님의 글인지도 모르겠지만 배철수 DJ의 담담하지만 꼭꼭 눌러 담는 목소리에 나오는 삶과 세상,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https://youtu.be/EWdEjjN2HoY


매체의 범람 속에서도 굳건히 가장 오랜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미디어로 우리 곁에 있는 라디오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현대적인 미디어입니다. 영화관에서는 4D 영상까지도 나오는 이 시대에 소리밖에 없는 라디오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감이 다 열려서 모든 것을 낱낱이 보게 될 때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고 감각이 마비가 되는 것처럼 너무 많은 자극이 동시에 주어지는 미디어의 세계에서 오직 소리만 들린다는 것이 더 현실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짧은 시간에 많은 정보를 보여 주는 영상과 미디어가 주는 피로감과는 달리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청각의 자극만 주어지는 라디오는 피로감이 적고 통제 가능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오히려 소리만 있기 때문에 더 집중하게 됩니다. 소리만으로 채워지지 않은 부분은 나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채워가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매체보다 더 진하고 깊이 있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소리가 아닌 나머지 부분은 나의 머릿속과 가슴속에 있는 무언가가 메꾸어야 하기 때문에 그 경험이 진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같이 앉아 있어도 편안한 친구처럼 듣는 듯 듣지 않는 듯 그냥 켜 두어도 부담되지 않습니다. 라디오는 분주한 화면의 전환과 색깔들로 제발 자기를 봐 달라고 말하는 듯한 스크린의 압박도 없이 그저 자기 주파수의 소리를 내며 그 공간에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귀를 기울이게 되면 나의 머리와 가슴을 두드리는 성찰의 시간과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라디오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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