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음악처럼

지금, 라이브 단상

by 연꽃 바람

노벨 문학상. 김혼비 작가의 책 <전국 축제 자랑>에서 이 단어를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조정래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만들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밝히며 '작가 조정래 노벨상 수상을 위한 발대식'을 거행하는 장면에서요. 제1회 조정래 문학상 시상식에서 1억의 상금을 거머쥔 수상자인 성석제 작가님의 글을 읽은 적은 있으나 아직 조정래 작가의 작품은 그 유명한 <태백산맥>마저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지라 그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전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인상적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2명입니다. 한 명은 수상을 거부한 장 폴 사르트르,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2016년 대중음악 가수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입니다. 밥 딜런의 수상은 화제가 되었지만 저는 당연하고 어찌 보면 왜 이제서야 라는 반문을 던지게 하는 당연한 수상이었습니다. 음악이 시이고, 시는 음악이라고 교과서에 나와 있듯이 밥 딜런의 음악이 한 편의 시이며 문학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득, 음악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데 왜 시는 소비되지 않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시나 음악에 '소비'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천박하고 물질주의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창작에 대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누군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없는 창작물을 만드는 일은 지속하기 어려운 노동일 것입니다.


음악은 시를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들려주기 때문에 더 빈번히 소비되는 것 같습니다. 시가 말하는 그 심상이라는 것에 운율이 극적으로 더해진 음악은 정말 그 장면으로 그 심상으로 우리를 데려가잖아요? 눈앞에서 그 장면이 그려지고 창작자가 의도한 운율대로 시를 함께 소리 내어 부르면서 청각적으로도 풍부한 감각을 구현하기 때문에 어떤 날엔 그 음악(시)을 내가 쓴 듯 그 속으로 온전히 들어가게 되기도 합니다.


시를 만나게 되는 곳은 서점, 도서관 정도이지만 음악은 도처에 있습니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매장에 음악을 틀기 시작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음악은 어디서나 들립니다. 어디서나 들리고 자주 듣다 보니 오히려 취향을 강제받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꾸 듣다 보니 가사와 멜로디가 익숙해져서 어느 순간 흥얼거리고 그러다 보니 내 음악이 되어 버리는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내가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음악은 많지만 내 음악은, 진짜 내 음악은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반면 시는 정말 내가 취향을 가지고 정성껏 읽고 심상을 부여하고 마음으로 읽지 않는 한 내 것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는 깊은 취향을 갖지 않고서야 읽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 입시를 위해 외우며 강제로 심상을 입혔던 그 시들 이후에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비되지 않지만 누군가는 시를 쓰고 있겠지요? 얼마나 외로운 싸움일까요? 독백처럼 누군가에게 가닿지 못할, 가슴을 가득 채운 언어들을 씨줄과 날줄로 느리게 엮어가는 그 노동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밥 딜런의 음악처럼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넓게 불렸다면 누군가의 가슴을 촉촉하게 하고 먹먹하게 했을 시들이 얼마나 많이 활자에 갇혀 있을까요? 입시를 위해 읽었던 일제 치하의 시들, 광복을 말하며 님을 부르고, 광야에서 외쳤던 그 시들 말고도 우리말로 된 좋은 시들이 여전히 많을 텐데 어떻게 닿을 수 있을지 몰라서 읽지 못한 시들과 작가들에게 미안해집니다.

시가 음악처럼 널리 소비되기를!

음악이 시처럼 좀 더 아름다워지기를!


https://youtu.be/hZhxYzYCcmw


https://youtu.be/9TS2BB-gA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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