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해'협에서 '철'학을 하다

by 연꽃 바람

무한궤도가 등장하던 순간을 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1988년 대학가요제에 무한궤도가 등장하여 멋진 전주와 함께 <그대에게>가 울려 퍼졌던 그때의 충격을 <응답하라 1988>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죠.

https://youtu.be/TPoDCVSK1wA


제게 신해철이 깊숙이 다가온 사건은 대학 때 만났던 5살이 많아서 항상 "내가 너 보다 5살이 더 많아"라며 우리의 고민을 이미 5년을 앞질러 겪고 있다고 말했던 언니 덕분입니다. 언니는 90년대 학번을 가지고 전공과 대학을 바꿔가며 폭풍 방황을 거친 세 번째 대학이라 그런지 대학과 학점에 대한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해가 떠 있던 수업 시간보다는 해가 진 저녁 시간에 더 정신이 맑아지고 말도 많던 사람이었습니다. 과제와 수업량이 많기로 유명했던 대학이었지만 학점 관리에 목메지 않고, 이수 기준은 맞춰주는 줄다리기를 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요.


언니의 자취방에 처음 놀러 갔던 날 언니의 책상 위에는 클리어 파일에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끼워진 인쇄물이 있었습니다. 강의 자료나 리포트가 아니라 한글 프로그램에서 직접 타이핑하고 직접 프린트한 신해철의 가사들이었습니다. 공부도 뒷전인 그 언니는 신해철학을 부전공으로 삼은 듯 신해철의 가사를 그렇게 모아둔 것입니다. 그래서 '들은' 것이 아니라 '읽는' 것으로 신해철과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다가 막차가 끊기면 언니의 자취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학교가 아니라 번화가에 가까웠던 언니의 자취방에서 창문을 열고 다시 술을 마시며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이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조금 낯선 '반말 진행'이 낯설었고,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칭하는 진행자가 많이 오그라 들었습니다. "we are the children of darknesss"라는 오프닝은 더더욱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말로 '신며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신해철의 목소리와 전해주는 이야기, 다른 라디오에서는 만나기 힘든 언더그라운드 밴드를 게스트로 초대해서 음악 이야기를 하는 모습들이 참 좋았습니다. 여기서 만난 이진원(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님에게도 빠져들어 앨범을 사서 듣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셨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무한궤도(1988), 신해철, N.EX.T(1991-1997), 노땐스(1996), 비트겐슈타인(2000-2002), N.EX.T(2002-2013), 2014.10.27. , 시월(추모밴드)을 거치며 대중들 곁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했었고, 지금도 명백히 존재감을 잃지 않은 신해철의 음악 가운데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봤습니다.


N.EX.T는 New EXperimemt Team의 약자입니다. 새로운 실험을 하는 팀이며 현재를 노래하지만 현재에 멈추지 않고 항상 다음(Next)을 바라보는 팀입니다. 이름이 곧 이 팀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2014.10.27. 이후에도 NEXT를 향해 멈추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마무리가 힘들었던 이유는 바로 신해철의 음악이었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곡을 다시 듣고, 다시 들어보니 더 좋은 곡을 한번 더 듣고, 그의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찾아서 듣다 보니 '듣기'의 시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행복했습니다^^


두서없이 이어진 신해철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가 또 이야기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1. 민물장어의 꿈

https://youtu.be/BtXGZ4ZPKBI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 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신해철은 '삶'에 대한 진한 생각이 담긴 곡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물론 사랑도, 청춘도, 이별도 '삶'이 아니할 수는 없겠지만 신해철이 말하는 '삶'은 성별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는 모두의 이야기, 모두의 외로움, 모두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신이 디딘 그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시간의 힘과 그 시간이 키운 경험으로 성숙해져 가는 미래의 나를 기대하기에는 오늘의 내가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하고 자잘하여 과연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질문은 스무 살 청년도 환갑의 어른들도 던지는 질문일 것 같습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는 존재라면 누구나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이르고 싶은, 한 번만이라도 이르고 싶은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 지점을 지나왔음을 나중에 깨닫기도 하겠지요. '화양연화'처럼. 닿지 못할 그곳을, 안간힘을 쓰며 닿으려고 애썼던 그곳에 이를 수 있다면 미련 없이 삶의 여행을 끝낼 수 있을까요.


**신해철이 직접 했던 <민물장어의 꿈> 해설도 있습니다!

https://youtu.be/i8vXW43n5YQ



2. Lazenca, Save Us

https://youtu.be/exLMaUmnNJM

강철의 심장 천둥의 날개 펴고 결단의 칼을 높이 든 자여
복수의 이빨 증오의 발톱으로 우리의 봄을 되돌려다오
이미 예언된 미래조차 지킬 의지 없이는 허공에 흩어지는


<영혼기병 라젠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삽입곡입니다. 애니메이션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세기말 구원을 위한 라젠카라는 로봇과 그 로봇을 작동시키는 소년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왠지 진혼곡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람의 죽음뿐만 아니라 희망과 의지의 소멸,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절의 모습 속에서 구원을 섣불리 약속하지는 않는 라젠카를 향한 외침은 심장을 떨리게 합니다.


신해철의 낮고 깊은 음색은 패색이 짙은 전장에 패잔병들을 이끌고 마지막 전투에 나서는 늙고 지혜로운 왕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깊은 고요 속에서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의연히 패배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그럼에도 구원을 바라며 하늘을 향해 소리 없는 외침을 보내는 왕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영혼기병 라젠카> 오프닝 곡 <해에게서 소년에게> 영상입니다.

https://youtu.be/WVmp_CBGLmw



3. The Dreamer

https://youtu.be/nIEz24aENU4

난 아직 내게 던져진 질문들을
일상의 피곤 속에 묻어 버릴 수는 없어
언젠가 지쳐 쓰러질 것을 알아도 꿈은 또 날아가네
절망의 껍질을 깨고 이제는 쉽게 살라고도 말하지
힘겹게 고개 젓네 난 기억하고 있다고


'난 기억하고 있다고'라는 가사가 마음을 울립니다. 연속성을 가진 삶을 사는 우리이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에 단절은 없습니다. 이제 쉽게 살아보려고 해도, 이제 그만 질문을 멈춰 버리려고 해도, 분명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또다시 힘겹지만 고개를 젓고 '기억'하는 대로 꿈꾸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The Dreamer는 사실 The Rememberer 아닐까요. 꿈을 좇는 사람도 꿈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결국은 잊지 않고 기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생생한 경험이기도 합니다. 잊지 않은 일은 이루게 되더라고요. 원래 생각했던 완벽한 모습으로 이루지 못하더라도 꽤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한 신해철의 이력 때문인지 신해철이 쓴 곡 가사에 대해서 '개똥철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 겉멋에 들린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민물장어의 꿈> 해석 영상에서 신해철이 이야기했듯이 모든 예술 작품의 해석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향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매번 달리 해석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해철의 가사 역시 누군가에게는 '개똥철학'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경험이 다르고, 지향이 다르면 해석도 다르겠지요. 맞다,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의 문제입니다. 신해철이 내놓은 작품들은 다른 해석으로 많은 뮤지션들을 통해 다르게 해석되어 재생산(리메이크) 되고 있고, 그의 가사에 대한 다른 생각들이 글이 되고 노래가 되어 또 다른 해석본으로 꾸준히 세상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해철이 <민물장어의 꿈> 가사를 쓸 때 떠올렸다고 장정일의 단편소설이 생각과 감성의 어딘가에 녹아내렸다가 이미지로 떠올랐다고 한 것처럼 분명히 신해철의 음악과 삶과 선택들도 누군가에게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떠오르리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외국인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납니다.

"You'll be rememered."

그때도 이 문장이 굉장히 마음을 울렸습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가 아니라 '너는 기억될 것이다'라는

의미가 더욱 온전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너'라는 존재가 내 안에서 씨앗이 자라서 꽃이 피듯이 제 스스로 '생명'이 되어 박제된 '기억'이 아니라 '존재'로 있을 것이라는 예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 안에 '있을 것'이다는 확언처럼요.


이제 이 말을 신해철에게 전합니다.

"당신은 기억될 것입니다."

기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 머리와 가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히 당신은 내 안에 기억될 것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할 때 들으면 '필'이 오는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