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을 마련했습니다. '언젠가 필요하겠지'하고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어떤 날은 조금씩 어떤 날은 한 뭉텅이씩 비워내고 나눔 하여 마련한 공간입니다. 움직임을 멈추면 방을 갖을 수 있는 기회가 흐지부지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열심히 묶고 옮기고 나르느라 팔이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미니멀리즘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고 실천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비움에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방을 마련하며 비움이 아니라 '공간'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간'을 생각하면 비움은 저절로 실천되는 것이더군요. '공간'이 간절해지니 그동안 망설여졌던 '비움'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공간을 가지게 되니 비울까 말까 고민했던 아까운 물건들에 대한 아쉬움이 전혀 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전에 그 공간을 가득 채우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 너무 빨리 잊어버렸습니다.
멀쩡히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공간을 어지르듯 부산을 떠는 모습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먼지가 날리고 구석구석 쌓여있는 상자에서 물건들은 토해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가족들의 불평 속에서 고군분투하여 책상 하나 들어갈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치워진 공간에 맞는 저렴한 테이블을 주문했습니다.
조립식 컴퓨터를 판매하는 곳에 연락하여 컴퓨터와 프린터를 주문했습니다. 예전에 친구에게 선물받아 고이 모셔두었던 기계식 자판의 타자감을 가진 키보드를 연결하고, 동료들과 함께 공동구매로 구매한 옵티컬 마우스도 연결했습니다.
창가에 컴퓨터를 설치하니 들어오는 볕이 뜨거워서 집에 있던 테이블보를 커튼처럼 창가에 달았습니다.
그렇게 방이 생겼습니다. 등 앞쪽으로는 온전히 저의 공간인 컴퓨터와 라디오, 그리고 창 밖의 하늘이 있는 공간입니다. 등 뒤쪽으로 옷과 잡동사니 상자들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켜는 순간 등 뒤로 '엄마'와 '주부'라는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물건을 버리고 얻은 이 작은 '자기만의 방'이 주는 위력은 어머어마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이 주는 위안이 어떤 것인지 알 겁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이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기에 오직 나만을 위한 곳이 없는 긴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만의 공간이 있었다 해도 나만의 시간이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간을 가지게 되니 알았습니다. 자기만의 방이 있었다면 일과 가사에 힘들어서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간 사이에도 나만의 시간을 가졌을 거라는 걸. 어쩌면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있어도 그 시간의 나만의 시간으로 가지지 못했던 걸. 제가 이 공간을 좀 더 일찍 가졌더라면 '내'가 없었던 그 많은 시간들 속에서도 틈틈이 '나'를 가꾸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이 공간을 가지게 되어 참 다행입니다.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30분 남짓한 시간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브런치'도 그런 나만의 방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