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챙김의 굴레

나를 챙기는 엄마를 챙기는 나를 챙기는 엄마

by 신호사



화요일에 이사를 했는데, 본가에 다녀오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다. 화, 수, 목, 금, 토. 자그마치 닷새 내내 본가를 들락날락거린 거다. 갈 때는 빈 손으로, 올 때는 어깨가 무너져 내리도록. 어제 샤워할 때 보니까 오른쪽 어깨에는 실핏줄이 터져가지고 벌겋게 멍들었더라. 근력도 없는 주제에 연약하기만 한 내 몸뚱이. 더 아껴줘야겠다. 이제 내 몸뚱이 챙겨 줄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수요일에는 일이 있어, 잠시 신촌에 다녀왔다. 일찍 끝날 줄 알았는데, 12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평소라면 집에 언제 오냐고, 전화가 올 법한 시간이었다. 핸드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찍혀있지 않았다. 아, 이래서 내가 자취를 하려고 했던 거 같아. 스무 살 때 처음 느낀 해방감과 비슷한 결이었다. 이제 내가 새벽 3시에 들어가도, 어? 막 까치발하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막, 더 자고 싶어도 일단 밥 시간 맞춰서 일어나야 하는 그런 짓 안 해도 되고. 조용히 귀가해서 조용히 씻고 조용한 자취방에서 조용히 테레비를 돌려보다가 조용히 잠드는 하루. 슬슬 자취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더라.

목요일에는 뮤지컬 보러 간답시고 옷 갈아입으러 잠시 집에 들렀다. 거대한 드레스룸이 생긴 기분이었다. 근데 이제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야 하고, 4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야 하는, 아주 접근성이 바닥을 치는 그런 위치의 드레스룸. 매일 출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금요일에는 엄마가 찾아왔다. 너 이거 두고 갔어, 하고 내민 까만 봉다리에는 버리려고 책상 위에 내버려둔 노트북 케이스와 함께 간장, 참기름이 들어있었다. 기분이 진짜 이상했다. 차마 이거 버리려고 했던 거다, 하는 말을 못 하겠더라고. 고맙다 하고 말았다. 사실 나도 이제 좀 어른이 하고 싶어서, 나도 나 자신을 좀 책임져보고 싶어서 나온 건데. 여전히 나는 뭘 자꾸 흘리고 다니고, 두고 다니는구나. 엄마는 여전히 그런 나를 챙기고 있구나. 것도 집에서 10분 정도 걸어야 하고, 4.5층 높이의 계단을 올라서까지. 응.

이실직고하자면 금요일이 되도록 자취방에서 먹은 거라곤 우유와 시리얼뿐이었다. 왜냐하면, 고심 끝에 주문한 주방세제가 도착을 안 하더라고.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거리가 생기는데, 설거지할 인간이 있고 수세미가 있어도 주방세제가 없으면 설거지를 못하니까! 더는 못 참겠어서 그냥 퐁퐁을 하나 사자 싶어 나가려는데 저렇게 엄마가 덜컥 찾아와 가지고. 결국 같이 마트에 갔다. 목표는 퐁퐁과 햇반. 야무지게 쇼핑백도 챙겨 나섰다.

엄마는 나와 같이 온 김에 포인트 카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엄마 명의로 만드는 건데, 마트 직원 분은 자연스레 아이패드 같이 생긴 걸 나에게 내밀더라. 그래 봤자 복잡한 거라곤 실명 인증 같은 것뿐이었지만, 그냥 문득 자취방에 가계약 걸어놓고 나오던 길에 엄마가 나한테 한 말이 생각났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운 데로 내보내서, 엄마가 안심이라고. 나는 와, 내 나이가 몇인데 물가에 내놓은 애 취급을 하다니! 하고 감동받았었는데. 실은 그 반대가 아니었을까 싶은, 그런. 응. 엄마도 내가 필요하구나. 엄마가 나를 챙기는 것처럼 나도 엄마를 챙겨야 하는구나. 마트 포인트를 확인할 수 있는 어플을 깔아주고, 쿠폰 야무지게 먹여서 신동진 쌀과 고시히카리 10kg를 주문해줘야 하는구나 하는. 그냥, 그런 생각.

토요일인 오늘. 엄마가 점심 나절부터 고기 구워 먹자고, 집에 오라고 꼬셨다. 목살 꾸워준다 해서 좋다고 또 달려갔다. 아빠는 놀러 나가구, 집엔 엄마뿐이었다. 둘이서 상추 씻고 고기 꾸워 먹는데, 엄마가 쫌 귀여웠다. 나는 내가 독립했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그냥 내 방이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밥 먹어라, 부르면 어! 하고 10분 후에 도착하게 되는, 그런. 근데 여기다 약간 애틋함을 추가한, 그런. 왜냐하면 나 먹으라고 샤인 머스캣도 세 송이나 사다 뒀더라고. 그동안은 한 송이도 안 사줬으면서! 맙소사. 류가 원래 가족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거라고, 그래야 애틋해지는 거라고 할 때마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애틋해서 뭐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었는데. 그 애틋함이 샤인 머스캣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고 본다, 나는.

이제 나는 퐁퐁도 있고 다진 마늘도 있고 프라이팬도 있는 사람이니까 밥 해 먹어야지! 먹고 설거지도 해야지! 내일은 택배 박스 분리수거하고 밀린 영화도 봐야지! 한 닷새 만에 일상으로 서서히 복귀하는 기분이다. 행복한 게 맞나 싶지만, 일단 지금은 행복해.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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