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왜 동그란 거죠?
친구는 축구교실에 다닌다. 몇 번 놀러 오라고 했지만, 내향성인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물론 운동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도 있다. 안 그래도 힘든 인생, 굳이 힘든 일을 해야 하나 싶으니께. 아휴, 건강을 위한 거? 좋지, 좋지. 응. 그래도 머리로 아는 거랑 내가 직접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공부 열심히 하면 좋은 거 알아도, 모두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아니니께. 내 적성 아니면 조금 나 몰라라 할 수도 있는 거니께.
그럼에도 오늘 축구교실에 갔다. 음, 어. 친구가 나의 어떠한 결과물을 보러 친히 신촌까지 와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 이라고 하면 좀 웃기지만 어쨌든 이번엔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지만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 내가 일요일에 과음을 하게 될 줄은. 허엉. 집에 들어오니 새벽 5시였다. 씻고 누우니 6시. 깨어보니 12시. 친구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시간과 축구교실 장소가 적혀 있더라. 그 순간 감히 공수표를 날린 지난날의 내 명치? 아주 쎄게 치고 싶었다. 그래도 낙장불입. 내가 겨우 지키고 있는 나으 마지막 신념, 약속은 어기지 말자. 일 때문에 절절매다가,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고민이 됐다. 친구가 놀러 오라고 했는데, 이 '놀러 와'의 의미가 제대로 파악이 되질 않았다. 구경꾼인가? 깍두기인가? 것도 아니면 하루 무료 체험 뭐 이런 건가? 물론 옷 같은 거 막 입고 다닌 지 한 오십 년 됐다. 그래도 뻣뻣한 바지 입고 갔는데 공 차라 그러면 곤란하고, 추리닝 풀착장으로 갔는데 구경하라 그래도 머쓱해지잖아. 한참 고민하다가 결론은 반반으루. 위에는 반팔에 바람막이를 입었지만 바지는 꺼멓고 헐렁한 바지 채택. 버스로 20분 정도를 달렸다.
결론은 하루 무료 체험 뭐 이런 거였다. 이미 친구는 나를 위한 옥수수수염차까지 준비해놓고 있었어. 오늘 그거 나의 생명수. 없었으면 잔디에 맺힌 이슬이라도 빨아먹었어야 했을 각. 생각보다 본격적인 야외 축구장이었는데, 파릇파릇한 인조잔디 위로 강한 조명이 쫙 들어오더라. 신기했다. 늘 매체로만 접해오던 장소에 내가 들어와 있으니 겁나 리얼한 VR 같은 느낌. 현실감 제로였단 뜻이다. 그때라도 정신 차리고 도망갔어야 하는데. 코치가 둘이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의 정체를 묻지 않고 공 들고 오라 그래서 공 들고 갔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그거 있잖아, 그 강백호가 지 다리 사이로 공 주고받고 하는 그 루틴. 그거 했다. 그 외에도 온갖 해괴망측한 자세로 공 다루는 스트레칭을 했는데. 와. 공은 대체 왜 동그래서. 이 미친놈이 자꾸 어디로 굴러가는 거다. 안다. 그러라고 동그란 거 나도 아는데. 걔는 꼭 이상한 데로만 굴러가더라고. 방향은 늘 일정하게,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만. 데구루루. 크기도 뭔가 겁나 얄미운 크기였다. 뭔가 쏙 빠져나가기 좋은 딱 그런 크기.
그러다 사람들 반씩 나눠서 경기장 양 끝에 세워놓고, 교차해서 드리블 연습을 했다. 짧게, 새끼발가락 쪽으로 차는 거라는데, 될 리가 있나. 될 리가 없는 걸 아는데! 이게 또 머리로 이해하는 거랑 나으 심장이 시키는 것이 달라가지고. 엉엉. 공이 자꾸 한참 앞으로 가는 거다. 남들은 짧게 잘하는 거 같은데, 나 너무 승질 급해가지고 한 번 차고 우다다다 달려가서 잡고, 또 한 번 차고 우다다다 달려가서 잡고의 반복. 그때부터 내 폐가 고함을 지르더라. 너 진짜 돌았냐고. 마스크가 진짜 역동적으로 내 입에 붙었다 튀어나왔다 난리부르스를 춰대는데, 죽을 거 같았다. 그렇게 지옥문을 붙들고 파로마 시작. 코로나 시대의 매너 있는 지성인으로서 마스크 함부로 벗으면 안 된다는 거 알지만, 와, 이건 뭐 코로나로 죽기 전에 산소 부족으로 죽겠더라고.
와중에 코치는 휘슬을 계속 불었다. 그럼 남들은 튀어나가. 나도 나가야 돼. 근데 안 돼. 몸이, 서서히 파업을 해. 아웃라인으로 돌아서 공을 잡고 다시 돌아오라는데. 예? 아웃라인이 뭐조. 일단 돌아오라니까, 휘슬 불면 가던 공 붙잡고 돌아왔다. 물론 열 번 중에 한 세 번 정도만 성공했다. 일곱 번 정도는 공이 아주 해맑게 튀어나가더라고. 거의 그 순간만큼은 불꽃슛 수준으로 빠른 건 왜일까. 진짜 얄미워. 내가 찼는데 내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그 아이러니 때문에 욕도 안 나왔다. 와중에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도 확인하라는데. 아아. 죄송하지만 저는 핸드폰 보면서 계단도 못 내려가는 사람이라고요. 엉엉. 그 와중에도 마스크는 계속해서 쭈그러들었다 팽창했다, 흡하흡하. 끝날 때쯤엔 폐가 거의 만신창이가 돼서 목에서 슬슬 쇠맛이 감돌았다.
그렇게 지옥문을 아흔 번쯤 들락날락한 후. 코치가 물 마실 시간을 줬다. 나는 친구가 줬던 옥수수수염차를 논스톱으로 절반쯤 들이켰다. 물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거였나. 그래, 내 몸이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는 걸 깨닫게 된 건 즐거운데. 아니. 폐가 너무 아파. 가슴 미어져. 주말드라마 이별 씬은 갖다 댈 것두 아닌 고통. 필라테스 그런 거, 진짜 내 몸에는 사치였더라. 사람은 자고로 유산소를 해야 한다. 내가 쉭쉭 대면서 숨을 들이켜고 있는데 친구가 와서 내 몰골 확인하더니, 정 못하겠으면 살짝 빠져나가도 된다고. 순간 그럴까, 싶었는데 코치가 휘슬을 불었다. 8대 8로 나누어서 패스 연습을 한다 그래서 나 살짝 울었다. 하하. 아니, 왜, 짝수가 딱 맞고 난리. 이제 와 발도 못 빼고 패스 연습했다.
여덟 명이 한 팀이 되어 패스를 돌리는데 7번 성공하면 1점이랬다. 상대편에서는 수비수가 세 명 내려오는데, 패스를 막거나 장외로 걷어내면 원 아웃. 두 아웃되면 공수 교대. 나는 진짜 내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공이나 사람들 발이 마구잡이로 들어오면 순간 진짜 최선을 다해 나의 몸을 보호하게 되더라. 응. 말이 좋아 보호지, 밖에서 봤으면 겁나 쫄아붙어서 아주 볼 만했겠지. 아. 너무 수치스러워. 공은 내 맘대로 안 굴러가는 와중에 공간 선점은 아주 잘해서, 자꾸 치열한 핫플에 내가 끼어있게 되었다. 덕분에 여기서 까이고, 저기서 맞고. 아니, 사람들 스파이크 너무 아파. 진짜. 나는 폭신폭신 하얀 운동화인데요. 엉엉. 다리에 힘 풀려서 발목은 두 번이나 꺾이고, 와, 이대로 죽나 싶을 때 또 휘슬을 불더라.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물 마시는데, 나는 정말 그 수업 끝난 줄 알았다. 갈 준비 했다고. 근데 빨리 와서 일렬로 서라 그래서. 친구한테 이거 몇 시간 하냐 그랬더니 1시간 30분이라는 비보 접수. 그때까지도 1시간 30분이 안 지났다니. 약간 목까지 눈물 차오르더라.
마지막은 미니게임이었다. 패스 돌리는 거 7번 성공하면 1점, 골 넣어도 1점. 골키퍼는 2분씩 돌아가면서 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마지막, 8번. 그 순서까지 안 돌아올 수도 있다는 친구의 말에 안도하며, 게임을 시작했는데. 오늘 꿈에 주황색 조끼가 나올 거 같다. 내 앞을 현란하게 누비던 그 여덟 명의 주황색 조끼들. 그들의 풀착 앞에서 내 바람막이가 너무 보잘것없어 보였구. 내 발재간은 더더욱 형편없었구. 후반부로 갈수록 체력이 바닥을 보여가지고 분명 공이 오는데! 내가 발을 뻗으면 닿을 거 같은데! 진짜 세상 얄미운 축구공 크기. 절대 안 닿아. 뒤에서 코치는 걷지 말라하는데. 아니, 어떻게 사람이 뛰기만 하나요. 와중에도 골은 터지고, 사람들은 자빠지고, 온 군데 공 맞고, 내 다리는 어느 이름 모를 분들의 스파이크에 다섯 번쯤 까이고. 친구의 말과 다르게 내 차례는 착실히 다가와서, 마지막으로 골키퍼 하는데 진짜 절로 방언이 터지더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오지 마라. 안돼, 걷어내 걷어내 걷어내. 여차하면 몸빵 할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공으로 맞는 일은 없었다. 감사해요. 오늘 우리 팀 최고의 플레이어, 형광 연두 티셔츠를 입은 여성분. 잘하는 사람은 진짜 잘하더라고. 이게 짬바인가 싶고. 3대 1로 진 거 같긴 했는데. 왜 이렇게 어물쩍 대충 말하냐 하면, 몰라. 뭐가 어떻게 들어갔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결국 게임 종료되고, 남은 물 반 통 원샷하는데 친구가 묻더라. 재밌지 않냐고. 재밌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축구에 환장하는지 어렴풋이 알 거 같기도 하고. 뭣보다 내 이 재활용 불가한 몸뚱이도 어설프게나마 공놀이가 가능하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했고.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고 하니까 함 해볼까 싶었는데. 코치가 마지막으로 사람들 다 모아놓고 얘기하더라. 4만 원이었던 회비 가격이 다음 달부터 50% 인상되어, 6만 원이 되었다고. 와. 너무 비싸. 그냥 6만 원만 들었으면 아아, 하고 넘어갔을 건데 원래는 4만 원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비싸! 친구랑 돌아오는 길에 6만 원, 너무, 응. 하고 머뭇거리니까 돈 많이 벌면 오라고 덕담해주더라. 오라는 얘기인지 말라는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재밌긴 했다. 왼쪽 새끼발가락 신명 나게 짓밟혀서 어? 피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집에 와서 확인하니 멀-쩡! 얄미워. 으으. 다 얄미워. 내일은 내일의 할 일이 있는데, 몸살 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