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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May 12. 2021

나를 뒤흔든 세상의 문장들 3

숨 쉬러 나가다 Coming Up for Air - 허윤희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온 뒤 날도 좋아한다.

얼어있던 대지를 촉촉히 깨우는 봄비부터,

더운 여름 시원하게 쏟아지는 장대비까지

비에 대한 감상은 언젠가 따로 표현해보고 싶을 정도로

내게 비는 사랑이다.

온몸으로 물을 먹고 세상 처음 태어난 듯 싱그러워진 풀잎들과,

비 오는 날만 맡을 수 있는 빗물과 흙과 풀잎에서 뒤섞여서 나는 그 특유의 비 냄.


오래간만에 내린 비로 깨끗해진 온 세상,

오늘 아침엔 꼭 풀 보러 가야겠다 마음먹고 나선 길.

왠지 비 맞은 갖가지의 온 종류의 풀을 보고 싶어 동네 수목원으로 향했다.


어린 왕자의 바오밥 나무를 보고,

지혜의 상징 올리브 나무도 보고,

사막에서도, 고산 지대에서도 꿋꿋이 자라나 피운 선인장 꽃이 유독 눈에 들어왔던 날.

지나가는 길에 어느 작가의 전시회가 열려있길래 들어가 보았다.

허윤희 작가의 '나뭇잎 일기'
허윤희 작가의 하루 한 장의 <나뭇잎 일기>

전시장 가득 작가가 그린 나뭇잎과 연필로 꾹꾹 눌러쓴 그 날의 단상들이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저 나뭇잎이 사진인가 실물인가 하며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정성 들여 쓴 글들도 궁금해서 한 장 한 장 따라 내려가다가

작가의 무심한 글들이 왠지 그만 나를 뒤흔들고 말았다.  


공명이었을까.

참고 참던 무엇이 터져버렸는지 한동안 발을 멈추었고,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만,

사소하나 진실해보이는 그녀의  차곡차곡 쌓인 글과 그림 위에 내가 느끼는 온갖 감정들이 겹쳐졌다.


이 세상의 어떤 존재 - 그 존재란 사람일 수도, 사람이 아닐 수도 - 와 내가 만났을 때

나를 흔들 수 있는 건,

아마 그 명체가 오롯이 겪었삶의 숱한 계들이

지금의 내 세계와 만날 때  일어나는 그 무엇이 아까.


작가가 타지에서 홀로 지내는 그 시간동안의 외로움과 깊이와 적막함을 왠지 다 알 것 같아서였을까.

내가 지금 보내는 이 시간들을

이 세상 다른 어딘가에서 누군가도 보냈구나 하는 생각에 드는 공감과 위로였을까.

또는 내안에 누군가가 건드려주길 바라는

복잡하게도 뒤섞인 무언가가 쌓이고 쌓여

그 순간 임계점을 넘었던 것일까.


기쁘거나 슬프거나 그냥 그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설명하자면 그 감정들이 더 빛을 못 볼 것 같아서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풀들이 비를 흠뻑 맞듯 나도 그저 그 감정들을 그대로

오롯이 느끼고 온몸으로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언젠가 오늘 내가 만난 이것을
훗날 누군가가 나로부터 느꼈으면 좋겠다는
욕심아닌 작은 욕심을 고이 마음 속에 품어 보았다.

작가의 일기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철학가 등의 이름들이 많이도 보였다.

그녀가 쓴 문장들로 어떤 면에서 나와 결이 비슷한 분이겠구나 라는 것을 그냥 알 수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예술과 삶은 맞닿아있다는

작가의 신념대로라면 그 일기가 그대로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페트리코 Petrichor

우리말엔 없지만 영어에는 있는 좋아하는 영어단어.

아마 굳이 번역하자면 싱그러운 비 냄새가 아닐까.

비가 오면 식물들은 기름을 분출하고 흙이 만드는 지오스민이 만나 분출되는 냄새로 추정하는 비 냄새.

페트리코 Petrichor는 그리스어로 돌을 의미하는 '페트라(petra)'와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들이 흘린 피를 뜻하는 '이코(ichor)'를 합쳐 만든 말이다.

왜 돌과 피를 합쳐서 이 단어를 만들었을까.

바위 위에 신들의 피가 떨어지는 풍경이 떠올라서일까.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비가 올 때 식물들이 분출하는 그 기름은

특히 '발아하는 씨앗과 성장을 시작하는 어린 식물들'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비가 오면 온 세상의 갖가지 어린 나무와 싹들이

봐달라는 듯 더 푸릇푸릇하고 싱그러워 보이는 것인가 보다.

어린 식물들이 빗물을 마시고

바위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견디고 버틸

단단한 나무가 되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려나

혼자 말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상의 유추를 해보았다.

 

숨 쉬러 나가다 Coming Up for Air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닥트린 인간의 심리, 생각, 극복의 태도를 그린

조지 오웰 George Owell의 소설 제목처럼,

지금과 오버랩되는 현재의 우리에게

허윤희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처럼,

코로나로 우리는 분명 거대한 시대의 전환을 맞고 있고,

그 낯설고 어려운 시간 속에 시대의 흐름을 거쳐

지금의 이 시간들 우리에게 어쩌면

비 온 뒤의 또 다른 세상을 가져다줄 빗물일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만난 허윤작가의 그림전.

그녀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과

스스로를 위로하며 산책하는 시간에 만난

나뭇잎 한 장을 그린 그림들.

그것들이 빗물이 되어 내게 왔고,

이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나만의 petrichor를 마음껏 분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엔 어린 새싹같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가 무엇이 중요하냐며,

길고 긴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나는 아직 어리다며,

깨어나는 것은 씨앗만은 아니며

씨앗을 품은 꽃은 지고 또 피는 거라며.    

 

아무리 거칠어도
삶을 표현하고 위로하는 예술이
시공간을 넘어
빗물처럼 우리를 관통하는 한,
살면서 우리가 맞는 비는
살아있는 생명을
끊임없이 움틀거리고 자라나게 하는
피 같은 젖줄이리라.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Wendell Berry


세상에 대한 절망이 마음속에 자라날 때,

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어찌될까 두려워

한밤중 아주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걸어가 몸을 누이네,

야생 오리가 물 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려놓는 그곳에.

큰 왜가리가 사는 그곳에.

When despair for the world grows in me

and I wake in the night at the least sound

in fear of what my life and my children's lives may be,

I go and lie down where the wood drake

rests in his beauty on the water, and the great heron feeds.


나는 야생 피조물들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네,

새들은 슬픔을 앞질러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괴롭히지 않으니,

나는 고요한 물의 존재에게로 가네.

그리고 느낀다네, 내 머리 위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제 반짝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지상의 은총 속에 쉬고 나면

는 자유로와지네.

I come into the peace of wild things

who do not tax their lives with forethought

of grief. I come in to the presences of still water.

And I feel above me the day-blind stars

waiting with their light. For a time

I rest in the grace of the world, and am free.


오늘 산책길에 만난 봄비 온 뒤 신비한 무지개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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