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남자는 뭔가 심각하거나 무거운 주제를 꺼낼 때는 늘 여자가 평소보다 기분이 좋거나 신나 있을 때를 노렸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 패턴을 몇 번 겪은 다음부터는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생기면 왠지 불안해졌고, 어떨 땐 좋은 티를 많이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날도 그러했다. 오랜만에 간 가족 여행이었고 아이가 자는 틈을 타서 와인도 한 잔 했기 때문에 여자는 알딸딸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아이가 커갈수록 이렇게 조금씩 여유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며 인생의 어느 한 계단을 올라 딛고 있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방식대로 맞추어 살고 있지만 그것도 시간이 흘러 적응이 되었고,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 생긴 남자와의 거리감도 조금씩 좁혀질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생길 것 같고, 더 잘하고 싶어 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따뜻한 공기를 깨고 남자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과 살고 싶은 인생을 찾았어. 그런데 그러려면 나는 싱글로 살아야 할 거 같아. 지금 환경과는 맞지 않아서. 나는 좀 고독한 사람인 것 같고, 그게 내 숙명인 것 같아.”
여자에게는 너무 창의적인 이야기라서 반쯤 흘려들었던 것 같다. 에이. 아이도 있는데 각자 살자니. 거짓말. 말도 안 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어리둥절하다가 뒤이어 묵묵히 슬펐다. 이제 좀 살만하다 싶었는데 다시 골짜기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아 그날은 눈물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여자는 직장생활과 육아를 오가며 바쁘게 보냈고, 남자도 그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왠지 전보다 더 활기차고 밝아졌다. 얼마 후에는 결혼 10주년이 되니 둘이서만 해외여행을 가자고 예약도 했기에, 여자는 이제 그 생각은 거의 잊어버렸다. 그런데, 그 창의적인 이야기를 꺼낸 날로부터 몇 달 후, 또 여자가 기분 좋은 어느 날, 남자는 그 이야기를 다시 좀 더 구체적으로 꺼내어 쐐기를 박았다.
“요즘은 결혼의 방식이 다양하잖아. 앞으로는 더 그럴 거고. 나는 우리가 서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거 같아. 네가 원한다면 너도 너의 인생을 찾도록 도와줄게… 난 사실 몇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해왔어."
벚꽃이 절정에 달해 흐드러지게 핀 날이었다. 그동안 빚진 돈을 갚느라 맘고생한 남편에게 주려고 남몰래 불린 결혼 10주년 기념 비상금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남자와 살면서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 10주년 기념 해외여행과 이혼은 너무 매치가 안되었다. 남자는 혹여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할까 봐 날이 갈수록 태도가 공격적으로 변했다. 소송이라도 불사할 태세였는데, 도대체 소송해서 이길 만한 이혼사유가 있기나 한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혼을 원한다면서 가족에게는 모르게 하자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심오한 데가 있는 사람이니 심오한 뜻이 있나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억지스러웠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천만 원은 그에게서 날아갔다. 여자의 마음속에서는 그 돈들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여자는 생각했다. ‘저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에게 왜 이러는 거지? 이건 우리 둘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해. 부부상담을 받아야겠어. 제삼자의 눈과 입을 거쳐 서로를 바라보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자는 얼마 후 상담소에 연락해서 부부상담을 예약했다. 상담을 받는 것에 남자도 흔쾌히 동의했기에 여자는 또다시 그 망할 놈의 작은 희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