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상담사
상담은 우선 각자 개인 상담을 두세 차례 받고, 이후에는 함께 부부 상담을 몇 차례 더 받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여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상담사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해 털어놓기로 했다. 여자도 10년간의 결혼생활이 편하지는 않았었기에 어느 정도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상담사는 연세가 꽤 있어 보이는 여자분이었는데 깔끔하면서도 다정한 말투에 왠지 신뢰가 갔다. 여러 부부의 고민을 들었을 텐데, 그중에 그들의 사례는 어떤 범주에 들어갈지 그에 따른 해결책이 무엇일지 사뭇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서 들었던 말 ‘상담사는 적절한 질문을 던질 뿐이지 방법을 찾는 것은 상담을 받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적극적으로 임하자 다짐했다.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자가 본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을지 무척 궁금했다. 여자에게는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 뭔가가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이혼사유를 늘어놓을 리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느꼈던 인간으로서의 이질감을 자신만 느끼는 것인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여자는 성실하게 상담을 이어갔고, 남자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개인 상담을 한 번만 받았다. 여자의 절실함에 비해 남자는 왠지 상담에 형식적으로 임하는 듯했다. 여자가 원하는 대로 상담을 해치운 뒤, 그래도 바뀌는 것이 없을 거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하는 것 같았다. 결국 상담사는 남자에 대해서 성격 테스트 결과 이외에는 별다른 것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도 부부상담은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감정 상태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며 연신 미안함을 느낀다고 이야기했기에, 여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의 감정상태를 확인하는 것일 뿐, 남자의 이혼에 대한 의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명제처럼 박혀서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이 상담조차 제대로 효과가 없다면 그다음은 이혼이라는 낭떠러지만 남은 것 같아서 여자는 상담이 끝나갈수록 불안해졌다. 만약 상담사가 ‘남편은 다른 여자가 있는 것 같으니 좀 기다려주는 게 현명할 겁니다’라고 한다면, 모른 척 그럴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 대해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산 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끝내 상담은 여자의 불안, 분노, 두려움 등의 감정만 확인한 채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날은 남자가 일이 있어 못 오는 바람에 여자는 상담사와 둘이 앉아 마지막 상담을 하게 되었다. 상담사는 마치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충고처럼 현실적으로 말해주었다. 그 와중에 여자는 상담사가 숨기려고 했지만 숨길 수 없었던 난처한 표정을 보았다. 부부상담을 하는 상담사로서 어떻게든 부부의 결합을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얘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남편 분이 굉장히 독특한 분이세요. 이런 유형의 분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마음먹은 것을 당장 막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내분이 능력도 있으시니 말씀하신 대로 1년 정도 휴직하고 해외에 나가서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해보세요. 다음 직업을 위해 앞으로 10년 정도 투자하신다고 생각하셔도 좋을 거예요. 남편 분은 중년에 겪는 사춘기 같은데, 보통 이런 경우 2-3년 지나면 돌아오더라고요.”
상담을 시작하면서 내심 ‘아 그랬어요? 제가 모르던 게 있었군요!’하는 것이 있기를 기대했으나, 그런 건 아무 데도 없었다. 단지 여자가 그에 대해 느낀 그대로를 제삼자의 입으로 다시 한번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말이 귀에 꽂혔다.
“남편 분에게 휘둘리기보다는 본인에게 더 집중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두 달 넘게 이어진 상담 후, 상담실을 나오며 그녀는 생각했다. ‘이제 울지 말자. 냉혹하지만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자.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 상황에서 나와 아이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지를 생각하자. 그동안 혼자 생활비도 알아서 벌었고 남편의 도움을 받지 못할 때는 싱글맘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순간도 많은데, 많이 연습했다고 치자.’
직장과 살림, 육아로 힘들 때마다, ‘퇴사’라는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종지부를 가슴에 품고 지냈던 그녀였다. 언젠가는 멋지게 은퇴할 날이 오겠지 하며 버텼는데, 종지부를 채 찍기도 전에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전혀 다른 삶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