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리 준비해 놓은 양 착착 진행되었다
여자는 아이가 초1이 되면 쓰려고 아껴둔 육아휴직을 회사에 신청하면서, 1년 후에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이 무슨 변화가 생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비자를 받기 위한 신체검사에서부터 엄마와 아이의 학교 입학 신청, 해외 이사, 이사 갈 집 계약, 의료 보험 등 처리해야 할 것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왔지만 모든 준비를 하나씩 차근차근 진행했다. 여자는 해외 출장이나 여행은 많이 가 보았어도, 해외에서 살아본 적은 없었기에 모든 것이 0에서 시작했다. 유학원 사람도 신기해했지만 모든 것이 미리 준비된 듯이 무사통과되었고,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다. 결혼을 할 때 운명처럼 모든 상황이 한 곳을 향해 이끌고 가는 것처럼, 누가 어서 가라고 밀어주듯이 헤어짐으로 가는 길도 평탄하게 열리고 있었다.
여자는 낮에는 회사에서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저녁에는 이주 준비를 하면서, 이사 가기 2주 전까지 회사를 다녔다. 근무 마지막 날에는 짐을 챙기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회사 자리에도 10년이 넘게 묵은 짐과 먼지들이 있었다.
부부 상담을 마치고 나서 여자는 자신이 혹시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생각 못한 실수가 있을까 봐 (어쩌면 그러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가장 가까운 지인들 몇 명에게 조언을 구했었다. 가족, 친구, 지인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 비슷한 사람, 여자, 남자, 이혼한 사람, 부부관계가 좋은 사람 등 되도록 여러 다른 각도에서 이 상황을 비춰보고 싶었다. 그들의 의견은 이혼에 대해서는 당장 해야 한다, 보류해보라는 두 가지로 나뉘었지만, 해외에 가서 일단 1년간 쉬라는 의견에는 모두 일치했다. 안식년처럼 가서 쉬다 오라는 사람도 있었다. 안식년. 정말 안식만 하다 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하나, 특이한 대답이 있었는데 바로 이런 반응이었다. ‘그래도 혹시 그냥 납작 엎드려서 잘못했다고 빌어 보셨어요? 저는 그랬거든요. 이혼은 안 된다고요.’ 바로 비슷한 성향의 남편을 가진 그녀의 동서의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니, 그런 방법은 생각 안 해봤는데. 근데 내가 뭘 잘못했지..? 잘못한 것도 없고 게다가 난 충분히 억울한데 왜 빌지? 난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서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르겠다. 그 동서는 이후에 다시 부부관계가 좋아졌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안개 같은 상황 속에서도 제 양심을 속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뭔가 그녀에게만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이번에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삶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에, 솔직히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두려웠다. 남들이 보면 너무 용감하고 어찌 보면 무모한 결정 같기도 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그 길을 향해 걸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사를 가던 날. 아니 출국하던 날. 여자는 그동안 자신의 가족으로 여기고 지낸 시부모님에게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로, 좋지도 싫지도 않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출장 가듯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전했다. 부디 건강하시라고. 어르신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손주는 열심히 키울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리고 부모님에게는 아무 미움도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