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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1. 2020

여자의 이야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둘 다 첫째였고 양가에서 첫 손주였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닌데도) 그녀는 격하게 환영을 받았다. 아래로 동생이 두 명 있었는데, 막내로 태어난 남동생보다도 더 사랑을 받고 자랐던 것 같다. 공부도 외모도 성격도, 동생들보다 나아서 그녀는 항상 집안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래서인지 왠지 모를 부담감을 마음 한켠에 안고 자랐다. 부담감은 그녀에게 계속 열심히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것이 성적이든 부모님의 사랑이든 보상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착실히 사는 대가로 받는 ‘인정’이라는 보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또 그것을 누구에게서나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아주 시간이 많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학교를 여러 번 옮겨 다녀야 했다. 6학년을 지내는 동안 학교를 총 다섯 군데나 다녔으니 말이다. 어린아이가 그렇게 계속 변화하는 환경에서 친구들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이별하는 순간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친한 친구나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또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 좋은 친구도 사귀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녀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사색에 빠지는 것을 좋아해서 옆에 누가 굳이 없어도 외롭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초등학교 때 그렇게 적응 훈련을 했던 탓에, 그녀는 환경이 바뀌거나 사람이 바뀌어도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매우 뛰어났다. 이렇게 터득한 적응력은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지만 여자는 왜 계속 참고 살았을까? 싸울 때는 싸워야 건강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데 말이다. 그게 내내 궁금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녀는 싸움하는 연습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동생들이 아닌 친구나 다른 사람들과 싸운 적이 없다 (물론 동생들과도 별로 싸우지 않았다). 싸울만한 원인을 잘 만들지 않았고, 혹여 누가 싸움을 걸려는 낌새가 있으면 금방 알아차리고 적당히 잘 피해 갔다. 게다가 나쁜 기분을 오래 가져가는 것이 싫어서 하루 이틀 지나면 어렵지 않게 다시 일상에 적응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세월 별 탈 없이 지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었으므로, 남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녀는 여자 친구들처럼 편하게 대했다. 하지만 문제는 남자친구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연애를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싸울 시기가 왔을 때 (보통 그녀는 3년 정도는 무난하게 참는다) 싸우는 법을 모르는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헤어지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남자와 결혼을 하고 나서는 그렇게 헤어질 수가 없었다. 한번 이야기를 해서 안 먹히더라도 다시 시도하고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냥 더 짊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그것이 그녀의 최대의 단점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사람마다 인생에 굴곡이 있고 모두가 어떤 산을 하나씩 넘어가는 거라면, 어린 시절 행복하게 잘 살았으니 지금은 골짜기 아래를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만 이 험난한 골짜기만 잘 넘으면 다시 올라가는 길이 있을 거라고. 끝내 희망을 안고 살기로 했다. 다행히 곁에 아이가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그 누구도 아닌 남편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노력했지만 끝내 그녀를 인정해주지 않은 것은 남편뿐이었다. 전투적인 자세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생을 나와 함께할 사람을 고르려면 나와 맞는지 철저하게 알아봤어야 했다. 아무리 남자가 결혼을 하자고 졸라대어도 그 ‘철저히 알아보기’ 시간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전의 연애를 통해서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단점을 극복해 놓았어야 했다. 남들은 단지 남자 보는 눈이 없었다고 치부해 버리지만, 그녀는 지금도 자신이 없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해 놓았다고 치자. 결혼 10년 후에 180도로 변해버리는 남자를 어떻게 10년 전에 예상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다부지게 할말 다 하는 빨간머리 앤이 참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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