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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Nov 03. 2020

호주의 도시락과 점심시간

급식이 없네요

호주에 오고 난 이후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나의 일과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도시락 싸기이다. 한국에서는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급식을 제공해주는 것이 당연해져서 도시락을 싸는 일은 소풍 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없었다. 소풍 도시락 마저도 부모에게 부담이 갈까 봐 점점 안 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호주에서는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학생까지 전부다! 도시락을 싸간다. 심지어 직장인이나 대학생들도 점심으로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오는 일이 흔하다. 


도시락을 거의 안 싸 본 데다가 서양식 도시락을 접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처음에 아이 도시락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학교 도시락 하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국과 밥에 반찬이 들어간 보온도시락인데 말이다. 주변 지인들에게 사전 조사를 해본 결과 일단 보온 도시락은 아니었다. 호주에서 도시락이란 식사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가볍게 빨리 요기할 수 있으면서도 건강을 고려한 ‘끼니 때우기용 먹을거리’였다. 내 머릿속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졌다. 간단히 쉽게 먹을 수 있으면서도 건강한 음식이 뭐지? 그렇다고 아이는 한국식 식단에 길들여져 있는데 빵을 줄 수는 없잖아?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볶음밥과 샌드위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야채와 고기가 골고루 들어간 볶음밥을 작은 보온 죽통에 넣어주고 다른 작은 통에는 과일을 넣어주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가장 낮은 학년인 프렙 (Prep. 1학년보다 전 단계로 보통 만 5-6세부터 시작한다)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처음 일주일은 다행히 엄마가 학교에서 오전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드디어 다른 아이들의 도시락을 엿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것은 문. 화. 충. 격.! 도시락의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선 우리가 메인이라 할 수 있는 ‘밥’이 무척 빈약해 보였다. 모닝빵처럼 생긴 빵조각 또는 치즈만 넣거나 잼만 바른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대신에 그 외에 과일, 생야채 (파프리카, 당근, 오이, 방울토마토 등),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 과자처럼 보이는 스낵과 요플레나 주스까지 건강한 음식이 골고루 들어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아이들 lunch box 용으로 나온 건강한 과자의 종류가 아주 많다. Non-GMO 옥수수를 사용해서 기름에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운 팝콘이라던가, 김이나 깨를 넣은 얇은 비스킷, 현미나 흑미를 뻥튀기처럼 만든 비스킷에 딸기 크림이 발라진 것 등 가지각색이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아이들이 도시락을 점심시간에만 꺼내먹는 것이 아니다. 오전 쉬는 시간에 바깥놀이를 하고 와서 간단히 야채나 스낵을 먼저 먹고, 나머지는 점심시간에 먹는다. 점심시간에 다 못 먹은 아이가 있으면 오후 책 읽는 시간에 먹을 시간을 더 주기도 한다. 아이는 언제부턴가 도시락을 다 못 먹으면 자기도 속상하다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볶음밥이나 죽 같은 것을 싸주면 불평하기 시작했다. 손에 휙 집어 들고 남는 시간에 뛰어놀아야 되는데, 계속 앉아서 한 숟갈 한 숟갈 떠먹느라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주로 주먹밥이나 김밥, 샌드위치로 바꿔주었다. 그랬더니 시간이 남는지 처음에는 잘 먹지 않던 오이나 견과류도 이제는 곧잘 먹는다. 친구들이 당근이나 파프리카 등의 야채를 생으로 먹는 걸 보고 신기했는지 자기도 싸달라고 한다. 


모든 엄마의 마음이 다 그렇겠지만, 아이가 싹싹 비우고 온 도시락통을 볼 때면 그렇게 뿌듯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거기에 ‘엄마가 싸주는 밥은 다 맛있어!’하는 코멘트까지 듣는 날은 날아갈 것 같이 기쁜 마음에  뽀뽀 세례를 퍼부어 주기도 한다. 학교에서 하루에 세 번씩 바깥에 나가서 놀고 오는 데다 요즘은 초겨울이라 날씨도 쌀쌀하고 코로나 때문에 손도 자주 씻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 손이 예전보다 많이 거칠어지고 색깔도 어두워졌다. 하지만 거칠어진 손에 로션을 발라주며, 바지와 양말 속에 가득 담겨온 모래를 털어내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엄마는 네가 맘껏 뛰어놀 수 있어 다행이고 건강한 먹을거리에 적응해가서 기쁘다고. 할 수만 있다면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자라는 동안 내내 그렇게 해주고 싶다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학창 시절 도시락도 떠오른다. 아이 셋의 점심, 저녁 도시락까지 싸느라 많을 때는 하루에 다섯-여섯 개의 도시락을 쌌던 우리 엄마. 매일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뭇 놀라우면서도, 그런 노고에 감사하기는커녕 반찬 투정을 했던 내가 새삼 후회된다. 도시락의 문화는 다를지언정, 그 속에 담긴 정성은 한결같다. 엄마의 마음이 보온밥통에서 샌드위치로 바뀌더라도, 김과 계란말이 대신 견과류와 스낵이어도, 도시락에는 먹는 사람에 대한 따듯한 마음이 담겨있다. 내가 지금까지 엄마의 도시락을 기억하듯, 내 아이도 나의 도시락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 마음속 도시락의 온기는 그래서 여전히 따스하고, 오랫동안 남을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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