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반대인 이유
무의식이라는 대단한 존재 때문인지, 별 일 아니란 듯이 넘기고 싶어도 넘기지 못하고 악몽이 되어 꿈에 나타날 때가 있다. 그것이 남편이나 시댁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뒤틀리고 왜곡되어 나타난다. 현실에서는 잘 넘겼는데 무의식에서 다시 던져준 공 때문에 다시 현실로 깨어나면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한번 더 곱씹게 된다. 사라지라 해도 절대 사라지지 않고 주위를 맴도는 유령처럼 그렇게 한동안은 내 근처를 떠돌다 간다.
밤잠 예민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잔다는 것은 거의 잠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조금이라도 잠을 잘 시간이 주어지면 뇌도 딴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육아의 피곤도가 증가할수록 꿈을 꿀 확률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게다가 자다 일어나서 옆에 곤히 누워 자는 아이를 보면, 이불을 덮어주고 살펴주느라 자연스럽게 꿈에 대한 생각은 그리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는 일어나서도 바로 스토리가 기억날 만큼 선명한 꿈을 꾸었다. 너무 현실 같아서였는지 약간 눈물도 흘렸나 보다. 눈을 뜨니 아이가 말똥말똥 내 눈을 마주치고 바로 옆에 누워 얼굴을 맞추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나쁜 꿈 꿨어.
아이: 그래? 그럼 좋은 거야.
엄마: 왜?
아이: 좋은 꿈 꾸면 나쁜 거고 나쁜 꿈 꾸면 좋은 거야.
엄마: 그래? (꿈은 반대야 라는 반응을 생각하고 있었음)
아이: 응 봐봐. 좋은 꿈 꾸다가 깨면 그게 아쉬워서 나쁘잖아, 근데 나쁜 꿈 꾸다가 깨면 그게 다행이라서 좋잖아.
엄마: 와~ 정말 그렇네!
‘그래, 현실이 아니고 그저 꿈일 뿐이라서 다행이고 네가 예쁜 눈으로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더 안심이 된다’ 속으로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나쁜 꿈은 현실에서 킥 아웃되어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일상에 파묻힌 단어와 문장들을 다시 꺼내어 재배열해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리고 대화가 어느 정도 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육아가 귀여움과 사랑스러움 뿐만 아니라 재미있음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심지어 어떨 때는 아이가 하는 말이 너무 귀엽고 독특해서 원래 의미나 소리를 일부러 바로 알려주지 않고 한참 즐기다가 알려주기도 한다 (써놓고 보니 좀 변태스럽지만 사실이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아이들이 시옷 발음을 가장 어려워해서 이응이나 히읗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탕’을 ‘아탕’이라고 하거나 ‘시럽’을 ‘히업’라고 할 때이다. 또는 소리보다 자신이 원래 알고 있던 의미대로 결합해 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립스틱’을 ‘입스틱 (입에 바르니까)’이라고 하는 것이다. 언어의 유희가 즐거운 나로서는 그런 새로운 단어를 발견할 때마다 보석 같아서 쉽게 지워버리고 싶지가 않다.
암튼 꿈 이야기도 기존의 ‘꿈은 무작정 반대인 것’이 아니니, 앞으로는 좋은 꿈을 꾸든 나쁜 꿈을 꾸든 단지 아쉬울 뿐이고 다행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