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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07. 2020

노을 구름은 맛있더라

아이가 본 노을, 나에게 시가 된 노을 구름

나는 노을을 사랑한다. 왜 유독 해질녘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순간이 포착되면 운전을 하다가도 멈추고 싶을 정도로 좋다. 하늘의 색깔이나 구름의 모양이 신비롭고 아름다워서이기도 하지만, 그냥 그 느낌이 좋다. 곧 어둑어둑 해져 밤이 되고 말텐데 그 순간이 왜 그렇게 좋을까.   


영어로 노을이나 해질녘을 찾아보면 몇 가지 유사한 단어가 검색된다. Sunset, Dusk, Nightfall.. 그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Nightfall 이다. 직역해보면 ‘밤이 내려올 무렵’인 듯하다. 나에게 Nightfall 이란 하루를 거의 다 보내고 오늘을 정리할 시간, 곧 오늘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시간, 하지만 얼마 안 남은 저녁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시간. 그렇게 하라고 하늘이 매일 색깔을 바꿔가며 황홀한 그림을 선사하는 시간.   


그러고보니 해질녘의 색깔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추억의 조각들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아파트에 살았는데 나는 우리 동 바로 앞의 놀이터에서 주로 놀았다. 동네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 놀다가 초저녁 무렵이 되면 엄마가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저 위의 집 베란다에서 손 흔들며 부르시던 때가 생각난다.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저녁밥을 먹으러 집에 돌아가는 그 시간이 좋았다. 너무 밝지도 아직 어둡지도 않은 하늘이 온갖 아름다운 색깔을 뿜어내며 나에게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 늦게 끝나거나 방과 후에 학원에 갈 때도 노오란 노을을 보면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 좋았다. 연애할 때,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가느라 어슴푸레 해가 지는 시간에 집을 나설 때도 핑크빛 노을 빛에 설레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노을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신입사원일 때는 퇴근을 늦게 해서 못 보았고, 회사를 옮겨 일찍 퇴근하게 되었을 때에는 회사 건물이 지하철로 바로 이어지는 곳에 있어서 저녁 무렵 바깥 풍경을 보기 어려웠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퇴근 후 재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하늘을 쳐다볼 여유를 잃었다. 게다가 남편은 유독 해질녁을 싫어하는 탓에, 주말에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도 해지기 전에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노을은 나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오늘 어떤 색의 노을이 어떤 모양의 구름을 비추고 있었는지, 하루에 한번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은 채로 시간은 흘러만 갔다.   


다행히도 여기 호주에 와서는 노을을 거의 매일 보는 기쁨을 누린다. 아이와 많은 것을 나누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아이도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 노을이 질 무렵에는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빨리 베란다로 나오라고. 노을이 곧 질 것 같은데 하늘이 너무 예쁘다고..  


오늘은 노을에 대한 추억 하나가 더해진 날이다. 요즘 아이가 부쩍 크는 시기인지 저녁에 밥을 먹고도 항상 배가 고프다고 한다. 놀고 있을 때는 당연히 먹을 것을 더 주지만, 씻고 잠자리에 누웠을 때 배가 고프다고 할 때는 갈등이 된다. 자기 직전에 먹는 건 소화가 잘 안되니 안 주는게 좋을텐데.. 그래도 배고프다고 하니 먹일까.. 그러다가 대부분은 간단하게 바나나를 먹거나 우유를 먹고 다시 재운다. 그런데 어제는 바나나와 사과 하나를 더 먹고도 침대에서 배가 고프다고 해서 그만 자라고 하며 얼른 재웠다. 

아침이 밝았다. 잠이 깨자마자 거실로 어기적 걸어 나오는 아이를 한껏 안아 주며 아침인사를 건넸다. 

“우리 아들, 잘 잤어? 좋은 꿈 꿨어?” 

평소에 나누던 평범한 인사였을 뿐인데 아이가 내게 들려준 말은 놀라웠다. 꿈 속에서도 배가 고팠던 아이는 구름을 뜯어 먹었다고 했다. 나는 배고픈 채로 재운 것이 뜨끔하긴 했지만 구름을 뜯어먹었다는 표현에 솔깃해서 아이의 꿈에 대해 좀 더 물어보았다. 

“맛은 어땠어? 솜사탕 맛이었어?” 

“아니 별로 맛은 없었어.” 

그리고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근데 노을 구름은 맛있더라?” 


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치며 전날 저녁에 함께 보았던 동동구름사이로 펼쳐진 붉은 노을이 스쳐 지나갔다. 시인의 시 구절 같은 그 문장은 내 가슴에 스며들며 행복한 상상을 불러왔다. 노을 구름의 맛은 어떤 맛일까!     


지금껏 나는 눈에 보이는 노을의 풍경과 색에만 감탄했을 뿐 노을의 맛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노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잊어가던 내게 아이의 꿈이 더해진 최고의 추억 하나가 쌓였다. 앞으로는 노을을 보면 어떤 맛일까 생각을 해보게 될 것 같다. 노란색 노을은 버터크림 맛 또는 바닐라 맛, 붉은색 노을은 딸기 맛 또는 석류 맛, 보라색 노을은 포도 맛 또는 와인 맛… 

다음 번 아이의 꿈 속에서는 함께 노을진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구름의 맛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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