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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Dec 18. 2020

마지막을 함께 한 작약 (Peony)

나의 피오니 이야기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꽃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작약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몽글몽글한 꽃송이도 예쁘지만 활짝 피어날 때 페스트리가 부풀어 오르듯 겹겹이 등장하는 꽃잎도 얼마나 신비로운지!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꽃송이나 꽃잎의 모양이 예뻐서 좋았다면 지금은 조금 다른 의미로 좋아한다.   


몇 해 전에 집에 그림을 걸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꽃 그림을 한참 찾던 차에 딱 내 맘에 드는 그림을 발견했었다. 그림 제목은 Peony (작약). 아쉽게도 그 꽃 그림은 품절 상태인 데다 가격도 꽤 있어서 선뜻 살 수 없었고, 바쁜 일상에 서서히 잊히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꽃시장에 갔다가 흰색과 분홍색 작약들 틈에 혼자 색깔이 독특한 작약을 발견했다. Peony Coral Tasmania. '타즈매니아 산 코럴색 피오니인가 보네'. 진한 코럴빛 색깔과 동그란 모양이 귀엽기도 하고 꽃이 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져서 나도 모르게 한 다발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 계산할 때 알고 보니 일반 작약보다 비쌌다. 다섯 송이가 들어있는 한 다발이 호주달러로 25불 (한화 약 2만 원 정도)이었다. 도매가격인데 한 송이에 무려 4천 원인 셈이다. (역시 난 비싼 걸 알아보는 눈은 탁월하다. 헛헛.) 미리 가격이 붙어있었으면 고민을 좀 했겠지만, 이미 들고 나온 걸 다시 물리기도 그렇고 마음에도 들어서 그냥 구입을 했다.  


하필이면 30도 이상으로 오르는 더운 날씨가 찾아와서 꽃이 피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밖에 잠깐 나갔다 들어와 보면 아까보다 피어있고, 저녁 먹을 때 슬쩍 보니 더 피어있고 하더니만, 결국 이틀 만에 만개해서 꽃들이 서로 부딪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할 수 없이 꽃 하나를 다른 꽃병으로 옮기고, 기존 꽃병에는 꽃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각자의 자리를 확보해주었다. 활짝 핀 작약의 꽃잎은 어느새 내 손바닥 크기를 넘어서더니, 아이의 얼굴보다도 더 커졌다. ‘오.. 이젠 쫌 무서운데?’ 하는 사이, 저녁쯤에는 뒤로 젖혀질 정도로 완전히 펴지더니 어느 순간 작약이 아니라 부처님이 앉아있을 것만 같은 연꽃이 되었다. 이렇게까지 펴지는 작약은 처음 보았다. 아니 작약이 원래 이런 건가? 

  

크기와 함께 색깔도 변했다. 진한 코럴빛에서 분홍빛이 스며든 파스텔 톤으로 변하더니 점점 색이 빠져서 마침내 연한 노란빛이 되었다. 연 노란색으로 완전히 펴진 꽃잎들은 드디어 그날 밤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학교 과제가 있어서 밤 11시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보통 때는 음악이나 드라마라도 틀어놓았을 텐데, 그날따라 얼른 해치우고픈 마음에 조용히 그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조용하지만 선명한 ‘툭’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인가 싶어 비가 오려나 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또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보니 바로 꽃잎이 떨어져 테이블에 부딪쳐 나는 소리였다. 그 이후로도 계속 이따금씩 툭 소리가 들렸고, 자고 일어난 아침에는 밤새 하나씩 떨어진 꽃잎들로 화병 아래가 연노랗게 변해있었다.  


떨어진 꽃잎들도 아직 부드럽지만 무게감 있게 내려앉은 모습이 왠지 좀더 존중해 주고 싶어서 한동안은 그대로 더 두고 보았다. 우연찮게 삶의 마무리를 지켜본 그 날 이후 작약은 나에게 그전과는 다른 이미지로 남아 있다. 끝까지 조용히 고상함을 잃지 않은 작약을 보면서, 사람의 마무리도 저렇게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핏 했던 것 같다. 찰나의 예쁜 꽃으로만이 아닌, 죽어가는 광경마저 아름답게 보여준 나에게 좀 더 특별한 꽃으로 남았다. 


음악에 추억이 담기듯, 꽃에도 담긴 추억이 있다. 이렇게 작약은 사고싶었던 예쁜 꽃 그림 대신 뭉툭한 소리를 내며 늦은 밤 나에게 말을 걸었던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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