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에 너무 인색하네요
멜버른에 도착한 건 봄이었다. 이왕이면 꽃이 피는 가장 싱그러운 계절에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조금 다르게, 꽃이 피긴 했지만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강한 바람이 자주 불었고, 헤이 피버 (Hay Fever.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한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그깟 알레르기쯤이야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사정이 좀 달랐다. 몇 해 전에는 11월 말에 뇌우 천식(Thunderstorm Asthma. 번개와 천둥으로 인해 발생하는 천식)으로 9명이 사망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봄이 되면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10월 중순이 되자 아이가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목에서 기관지로 염증이 생기는 듯하더니 기침이 밤에서 새벽까지 무섭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GP (General Practitioner, 동네 일반 병원 의사)에게 가면, 염증 증상이 없으니 괜찮다며 물 많이 마시게 하라는 뻔한 말만 듣고 왔다. 두 번째 갔을 때는 혹시 그래도 심하면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기침 물약을 사서 먹여보라고 했다. 결국 아이는 기침이 더욱 심해져 밤에 누우면 기침하다가 토하고 잠을 도저히 잘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항생제 한 방이면 될 것을 이렇게 애를 고생시키나 싶어, 내일은 꼭 의사에게 가서 따지고 말리라 다짐하며 영어로 할 말들을 정리하고 외워두었다.
드디어 세 번째 간 날, 아이가 밤에 너무 힘들어하니 의사에게 항생제를 좀 써달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돌아오는 것은 택도 없는 소리라는 표정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는데 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었다, 아이가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약하다, 집안 내력에 천식도 있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심각한 표정을 지어가며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제야 의사는 극약 처방이라도 내리는 듯한 심각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항생제를, 그것도 아주 소량으로 처방해 주었다. 다행히 항생제를 먹고는 증상이 좀 호전되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항생제 구애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내가 기관지염 증상이 있을 때마다 애처롭게 얘기해도 결국 항생제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평상시에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목이 칼칼해지는 날이면 아침저녁 소금물로 가글을 하고 물을 많이 마시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아이도 열이 나면 하루 정도 39도를 넘기다가도 열이 내리고는 바로 좋아졌다. 이후로 2년이 지나오는 동안 다행히도(?) 우리는 항생제 없이 잘 버티고 있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호주에서는 항생제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 후시딘도 항생제가 들어있어 처방을 받아야 살 수 있다고 하니 어떻겠는가. 아이들이 콧물이 나거나 기침을 하는 등의 감기 증상이 있을 때는 면역 시스템이 생기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부모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콧물을 흘리고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이런 증상이 있으면 아예 학교를 안 나오지만 말이다. 호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떤 학부모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기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40년 동안 한 번도 항생제를 맞은 적이 없다고 했다. 평생 다양한 항생제를 맞아온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우리는 감기에 걸리면 당연히 항생제를 처방해 주지 않는가. 특히 열이 나면 무조건 항생제였는데, 이곳은 열이 나도 자연적으로 내릴 때까지 우선 기다려본다. 그래도 며칠 동안 열이 안 내리면 파나돌(Panadol. 호주에서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진통해열제. 타이레놀과 유사.)이라는 물약을 주고 쉬게 하는 것이 전부다. 그러다 보니 당장은 아프더라도 아이들의 면역력이 자연스럽게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단 항생제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각종 비타민 등의 영양제를 챙겨주는 한국과 달리 호주 아이들은 영양제를 잘 챙겨 먹지 않는다. 일례로 약국에 간 김에 아이 비타민제를 사주려고 물어봤는데, 약사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가 밥을 잘 안 먹느냐고 물어보더니, 밥 잘 먹고 별 이상이 없으면 비타민제는 안 먹는 게 낫나고 하는 것이다.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영양제를 먹어서 면역력을 보충해줘야 한다는 생각도 과한 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호주산 영양제를 출장 때마다 사 와서 아이에게 먹였었는데, 정작 호주에 사는 사람들은 그 영양제를 잘 사지 않는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많은 호주 사람들이 사시사철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쟤네들은 저러고도 춥지 않은 걸까.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항생제 없이 자가 면역력을 키우며 살았다면 가능한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아이가 열이 좀 나도, 내가 목이 약간 칼칼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약이 아닌 자연적인 방법을 먼저 찾는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각종 감기약, 위장약들이 유통기한이 지나고 그대로 남아서 대거 처분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약에 최대한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면역력으로 건강하게 살아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