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rfect is the enemy of the good.
나에게 완벽주의가 있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꽤 걸렸다.
그 전에도 "일할 때 약간 완벽주의가 있어" 정도는 인정했지만, "난 완벽주의의 덫에 빠졌어. 완벽주의가 나를 갉아먹고 있어. 이걸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인지가 늦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1) 살면서 주변에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어우 저게 완벽주의지, 나는 저 정도는 아니야'라고 생각)
2)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할 때 빼고 생활에서는 매우 헐렁하고 덜렁댄다
3) 전문가인 분야에선 일에 완벽을 기하는 게 마땅한 책임이 아닌가 생각했다
4) 학창 시절 완벽주의를 고쳤다고 믿었다
피아노 콩쿨 준비: 완벽주의의 시작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아노를 열심히 쳤다. 전국 콩쿠르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콩쿠르를 준비하는 과정은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이었다. 음 하나하나 고민하며 연주하고 녹음해서 듣고 고치고 연습하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으면 될 때까지 다시. 피아노를 그만뒀지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은 내 몸에 새겨졌다.
수능 준비: 학창시절 전교 1등이었다 (재수없지만 익명이니까). 최상위권에서 결과는 실수를 얼마나 하느냐가 좌우한다. "실수 노트"를 손에 들고 다니며 자주 봤는데, 거기엔 내가 한 자잘한 실수들 (문제 잘못 읽음, 숫자 착각, 계산 실수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다신 이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머리에 박아 넣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완벽주의는 점점 체화되어갔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완벽하고 싶은 욕심은 좋은 결과물을 가져왔다. 완벽주의가 나를 피곤하게 하긴 하지만 이걸 극복해야 한다고 느끼진 못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시도했고, 그 도전에서 열심을 다했다. 이게 장점인 줄 알았다.
나는 미국 대학원 유학 과정에서 완벽주의의 "덫"에 빠졌다.
그 "덫"은 실패/실수에 대한 공포로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상태다.
초반 언어 장벽이 컸다. 영어로 말하고 쓰면서, 이걸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나 매번 생각하고 체크해야 했다. 한국어를 쓰는 원어민끼리는 내가 대충 말해도 (예: 거시기 저기 좀 가서 거시기 좀 가져와) 문화적 경험적 공통점으로 이해하지만 (예: 부엌에 가서 요리에 넣을 간장을 가져옴) 내가 영어로 대충 말하면 사람들은 ???? 표정을 지으며 알아듣지 못한다. 타인에게 받는 부정적 피드백, 좋게는 응? 정도의 표정이지만 어떨 땐 욕이나 공격적인 말 (예: 니 발음 못 알아듣겠으니 스펠링으로 말해봐, 니가 쓴 말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으니 싹 다시 쓰고 에디팅 받아서 와) 같은 부정적 피드백을 자주 받으면 사람이 위축된다. 그리고 말하거나 쓰기 전에 강박적인 스스로 필터링을 거치고, 결국 입을 닫게 되고, 아무것도 시작을 못하게 된다.
그렇게 난 덫에 걸렸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된 부분은 생산성이다.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해도 마치지 못하고,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우연히 참석한 "Perfectionism" 워크숍에서 완벽주의를 관리하는 것이 지금의 내가 당면한 중요 과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래 내용은 워크숍에서 들은 내용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완벽주의를 관리한다"는 것은 완벽주의의 순기능을 극대화하고 역기능을 최소화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삶이 힘들지 않도록 한다.
1. "Good Enough" 개념 정립
"Good enough" 면 그만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성공 (success)과 실패 (failure)를 나눈다. 예를 들면,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3번을 읽어도 논리적으로 안 맞는 곳이나 문법상의 오류가 없으면 성공, 그렇지 않으면 실패. 자, success와 failure 사이에 good enough를 넣어보자. 1번 읽어도 딱히 걸리는 부분이 없으면 good enough인 거다. 그리고 목표를 good enough로 설정하는 거다.
일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개인적으론 80%면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good enough!라고 여기고 그 일에 대해서는 그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로 했다.
2. Stop moving the goal posts
처음에 설정한 목표를 이루면 맘껏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기뻐하기.
처음 목표를 이루었는데도 그것을 맘껏 기뻐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에이 뭐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지. 이것보단 더 잘할 수 있어야지'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엔 처음엔 건강하게 졸업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졸업을 했을 땐 목표를 이룬 나에게 칭찬을 퍼부어 주기보다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졸업하면 뭐해..."
졸업하면 뭐해.. 좋은 직장 잡은 것도 아니고 여전히 계약직으로 미래 고민해야 하는데. 졸업하면 뭐해.. 논문도 별로 없는데. 졸업하면 뭐해.. 여전히 혼자 논문도 못쓰는데 블라블라.
이걸 골대를 옮긴다고 표현한다. 슈터가 되어서 골을 넣기 위해 고민해서 왼쪽 구석으로 팍 찔러 넣었는데! 아뿔싸! 골대가 오른쪽으로 2미터 이동한 게 아닌가? 원래의 위치에 골대가 있었다면 느낄 환희와 기쁨은커녕 노골의 좌절을 느낀다. 이러지 말라는 거다. 내가 원래 목표한 걸 이루었다면, 맘껏 기뻐해야 한다. 내가 해냈어!!!!!!!!!!!!!!!!!! 스스로 칭찬해준다. 아 진짜 고생했어!!! 잘했어!!! 나놈!!!!!!! 너 고생한 거 내가 알아!!!! 잘했다 정말 잘했어 잘했어!!!!!
3. Two-goal approach
어떤 사람들은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는 게 내키지 않는다 (그래 나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우면 그걸 이루는 과정에서 내가 달성은 못해도 어느 정도 발전이 있을 것 같은데 현실적인 목표에는 매력을 못 느끼는 거다 ("the goal is not demanding enough").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면 (it's okay you are not alone) two-goal approah 가 대안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하나는 현실적 목표 (realistic goal) 다른 하나는 이상적 목표 (stretch goal). 예를 들면 현실적 목표는 하루에 10분 영어 읽기, 이상적 목표는 하루 30분 영어 공부하기.
현실적 목표를 이루었다면 you can feel ok! 만약 목표를 초과 달성했거나 이상적 목표까지도 이루었다면 that is just a bonus!
4. Selective perfectionism
내 완벽주의 스위치를 켤 영역을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프로젝트 제안서에 가장 앞부분에 올 요약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문장 하나하나에 완벽을 기하지만, 그 외 제안서 내용은 모든 문장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설정하는 식이다. 내가 어떤 부분에 예리하게 완성도를 높여야 하고 어떤 부분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지 구분하는 지혜가 중요하다.
워크숍에서는 위 4개의 전략 중 자신에게 맞는 1-2개를 선택해서 시도해보라고 했다. 나에게는 1번과 3번 전력이 특히 와닿았다.
나는 여전히 완벽주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완벽주의의 덫"과 싸우고 있다.
만약 당신도 완벽주의의 덫과 싸우고 있다면, 건승을 빈다.
그리고 그런 완벽주의를 갖고 있는 것은 당신이 그동안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온 흔적이기도 하다고, 당신은 멋있는 사람이라고도 말해주고 싶다.
The perfect is the enemy of the good. - Voltaire
Better to do something imperfectly than do nothing perfectly. - Robert H. Schu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