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가 있어서 다행이야 (염장글 주의)
남편 흉을 보는 걸로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세상이지만
용기 내어 비밀을 고백하자면
나는 남편을 엄청 좋아한다.
10년 전 용기를 내어 그의 학교에 가서
"우리 사귀자"
라고 내가 고백했고
3년 전 헤어졌다가 다시 재결합했을 때도
"우리 내년에 결혼하자"
라고 내가 고백했다.
동갑인 남편은 내 단짝 친구고 애인이고 동반자고 룸메이트고
이제는 육아동지다.
산후조리원도 없이
도와주는 양가 부모님도 없이
퇴원하자마자 바로
타지에서 육아를 하며
힘든 순간들이 많다.
그럼에도
육아를 하며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아빠가 된 이 사람의 모습을 보는 일이다.
솔직히 애기보다 더 귀엽다.
육아를 하면서 힘든 순간이 많지만 행복한 순간도 많기에
행복한 마음도 기록해두고 싶다.
원인 모를 좌절감과 우울감으로 우울증이 왔나 의심하고 있는 때,
점심이나 먹자하며 남편과 점심을 먹었다.
일본 마트에서 야심 차게 사온 삼각김밥, 그리고 남편이 기숙사 식당에서 공수해온 점심 도시락이었다.
삼각김밥 내용물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일본어 못 읽음) 데리야끼 치킨 어쩌고가 영어로 쓰여있었으니 그 비슷한 맛의 내용물이 김과 밥 안에 들어있길 기대했다.
그런데 정말 김과 밥,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아주 약한 데리야끼 소스뿐이었다.
젠장.ㅋ.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ㅋ
남편이 기숙사 뷔페식당에서 To go 해온 점심은 3인분은 될 만큼의 양이었다.
어제부터 우울해하는 날 어떻게든 위로해주려 To go 도시락 통이 터지도록 이것저것 담았을 녀석의 착한 몸동작들을 생각하니 귀여웠다.
남편이 있어서 다행이다.
남편은
로봇인가 싶을 때가 있는 이성적인 공대생이다.
반응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늘 고민하는 화학공학도라 그런 건지 모르겠으나 일상에서도 늘 시간과 에너지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최적화하려는게 몸에 박힌 사람이다.
하지만 그도 꽤나 감성적이고 감정적이기도 하다. 감정의 폭과 세밀함은 나보다 적지만 말이다.
내가 1부터 10까지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남편은 3-7 정도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다.
문제는 3-7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 하여도 표현하는 것은 거의 이진법 수준의 표현 (좋다 싫다) 밖에 못한다는 점이다.
7년 7개월간의 연애와 2년 4개월 간의 결혼생활로,
이제는 이 사람이 이진법으로 표현해도 사실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나에게 잘해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모습이 귀엽고 그렇다. 아마도 나는 이 사람을 많이 사랑하나 보다.
20대 중반 안 좋은 일이 계속 겹쳐서 일어나 우울증 상담을 받던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생은 좋은 일이 일어나는 만큼 안 좋은 일도 일어나야 하는 거라면,
이렇게 나에게 나쁜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이유가
이 사람을 만나고 같이 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해 그 행복만큼 cancel out 할만한 불행이 필요한 거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고. 그럼 하는 수 없겠다고.
누구나 인생에서 좋은 운이 한두 번 온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나는 그중 한 번은 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쓴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