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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 May 25. 2021

영업 사원의 자세를 배워라


프리랜서가 일을 구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커리어를 잘 쌓아서 사람들이 나를 선택하게 하는 방식과,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나를 어필하는 방식.

커리어를 잘 쌓은 나는 그동안 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순조롭게 이동할 수 있었. 그러나 세계적인 그룹 BTS도 인정하듯, 인기는 영원하지 않고 끝나면 그냥 끝나는 것이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의 커리어도 마찬가지다.

한창일 때는 가만히 앉아서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려도 됐지만, 지금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미리 가서 그의 꽃이 되어야 했다.


지난주, 라는 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영업을 뛰고 왔다. 한 번의 미팅 후,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고 있는 일에 내가 적임자라고 한 번 더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영업 상대는 대학 4년 내내 함께 붙어 다녔던 친구 중 한 명. 친구는 대학 졸업 후 교육 관련 회사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지금은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아는 교육 콘텐츠 회사의 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빠지면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나는, 방송 일을 하는 동안 친구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회사로 이직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서로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연말이나 새해가 되면 올 한 해 고생 많았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인사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방송 날짜에 맞춰 살기도 바빴던 나는, 안부 인사 외에 더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말 그대로 프리 한 생활자가 되면서 친구를 포함해 대학 친구 몇몇이 모여 있는 단톡 방에 실시간으로 참여하는 여유가 생겼다. 다행히 팍팍하고 깜깜한 날을 보낼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이제야 퍼질 대포 퍼진 엉덩이를 은근슬쩍 들이미는 나를, 친구들은 내치지 않고 받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하루에도 수십 번, 구직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느라 너덜너덜해진 나에게 친구는 일을 제안했다. 그동안 했던 방송 일과는 약간의 결이 달랐지만,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마흔이 넘었는데 스무 살 때 입었던 짧은 스커트를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었다. 방송작가로 수명이 다하면 다른 글을 쓰는 게 당연했다.


일을 제안받고,즐거운 마음으로 첫 미팅을 할 때까지만 해도 금방 시작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일은 한 달이 넘도록 지지부진하게 늘어졌다. 그사이 용암처럼 끓어오르던 열정도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그러나 친구가 제안한 일이기 때문에 재촉하는 모양새를 보이거나 미팅 후 바로 써서 넘긴 샘플 원고에 대한 보상을 물을 수는 없었다. 이래서 친구나 지인과는 동업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 거구나. 새삼 깨닫기도 했다.


친구를 잃느니 차라리 일을 잃는 게 나았다. 

그래서 새로운 글쓰기에, 누구의 휴지통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나의 샘플 원고에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시 나만의 글쓰기에 집중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나갈 무렵, 친구에게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의욕은 이미 바닥이 났고, 흥미도 떨어진 상황이었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프로처럼 달려나갔다.


예전부터 그랬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의욕이 차올라, 온갖 헛짓을 다 하던 시간을 거쳐, 이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리대로 살자고 마음먹으면 운명은 불쑥, 내 팔을 잡아끌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기분을 드러내고, 현명한 사람은 기분을 감춘다고 한다.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똑같이 글을 쓰면 되지만, 20년 동안 방송 글만 써온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불안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시작은 없다.

누구나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용기도 낼 수 있는 것이다.


힘겹게 끌어올리고 있는 이 열정이 또다시 사그라들기 전에 부디, 이번에는 제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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