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이어 한국전파진흥협회에서 4주간 진행하는 '포맷 아카데미' 수업을 듣고 왔다.
한창 프로그램할 때는 관심도 없고, 관심 둘 여력도 없다가 다음 프로그램으로 도약하기 전 한껏 움츠리고 있는 시기인 건지, 얼마 전 찾아간 점쟁이 말처럼 이제 방송과의 연은 끝났으니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는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기인 건지.
아무튼 시간과 에너지가 남고 남아, 뭐라도 배우면 언젠가는 쓸모가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열심히 듣고 있다.
이번 주 주제는 '나의 창작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였다.
해외 사업자들은 포맷의 최초 창작진(오리지널 제작진)을 높이 평가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사는 강조했다.
한 마디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계약서 잘 쓰라는 말이다.
계약서에 대해서도 할많하않이지만, 창작 권리라는 말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사실, 강의를 진행한 포맷 전문가도 예능 피디 출신이고, 포맷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야도 교양보다는 예능이다 보니 뼛속까지 교양 작가인 나는, '좋은 말이기는 하나, 과연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교양은 포맷보다 아이템을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가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다.
한 방송사에서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였다.
예능에서 초안 아이디어를 작가들이 짜는 것처럼 교양에서 아이템을 잡는 건 주로 작가들이다. 다큐 같은 경우 피디가 먼저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사례와 구성을 후에 작가와 함께 고민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함께 일했던 피디는 다큐 제작이 처음이었다.
프로그램 경력은 짧았지만 젊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 말은 아이템을 보는 눈도 짧아 처음부터 작가 의존도가 높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내 자랑은 아니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내 자랑이지만)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 최선을 다하자가 모토인 나는 열심히 아이템을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아이템'이 전부인 아이템과 '기획' 아이템, 총 두 개를 잡아냈다. '기획'은 주제와 구성 흐름까지 잡아주었다. 예능으로 치면 오리지널 창작자의 포맷 바이블까지 완성해 준 셈인데 안타깝게도 문서가 아닌 구두로 한 거라 나중에 창작 권리를 주장하기가 다소 애매했다.
담당 작가인 나는, 두 아이템 중 어느 것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피디는 아이템으로 승부 보는 아이템을, 프로그램의 책임자는 기획 아이템을 주장했다. 결론은 '세상을 보는 피디의 시각이 중요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피디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라고 해서 아이템으로 승부 보는 쪽을 제작하기로 했다.
후에, 그 아이템으로 (내 자랑은 아니지만) 여성가족부 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 나머지 기획 아이템은 어떻게 되었을까.
최초 창작자인 나에게 다시 돌아와야 정상인데 프로그램의 책임자는 나도 모르게 한 외주 제작사에게 아이템을 넘겨 버렸다. 심지어 나는 그 사실을 뒤늦게, 다른 사람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 책임자 입장에서는 우리가 버린 아이템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담당 피디가 아이템을 전달 할 때, 최초 창작자가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면 책임 피디와 담당 피디는 한 회사 사람이니까 굳이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나는 눈 앞에서 창작 권리를 도둑맞은 셈이 되었다. 더 안타까운 건 한 마디 항의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예능의 어느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변호사를 대동하고 방송국을 찾아갔어야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 상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내가 당한 일은 어쩌면 애교에 가까울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모든 아이디어를 문서로 만들고 확인이 가능한 날짜를 계속 표기하고, 내 기획안을 누구에게 전달했는지 수시로 행적을 남기는 것 등이 중요하다고 강사는 수업 시간 내내 강조했다.
방송 일이라는 게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작업이다 보니 사고가 나도 누구의 잘못인지, 흥행을 해도 누구의 공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났을 때는 목소리가 가장 작은 사람이 뒤집어쓰기 쉽고, 흥행했을 때는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이 독차지하기 쉽다.
그러나 계속해서 방송작가로 남고 싶다면, 나의 콘텐츠를 인벌브하고 싶다면, 나의 포맷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한번 쯤 고민해 보고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언제나 나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