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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26. 2023

Deep Cove 산책

2023.07.30.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뭘할까 생각해보았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거릴까, 게임이나 실컷 할까, 도서관 가서 책이나 읽을까, 그러다가 Deep Cove 딥코브에 가기로 결정했다. 밴쿠버 북쪽 지역에서 구경할만한 곳으로 세 군데가 있는데 그 중 하나다. 가벼운 트레킹 코스도 있고 예쁜 항구도 있다. 우리 식구들이 적극 추전했던 곳이다. 그래 가보자. 

간단히 검색해서 정보를 좀 수집하고 나서 주먹밥을 쌌다. 놀러가는데 도시락이 없으면 섭하지. 저번에 해 두었던 냄비밥에다가 참기름을 조금 넣고 참치캔, 썰은 김치, 치즈 등으로 간단하게 주먹밥을 만들었다. 구운 김이 있으면 금상첨화일텐데 아쉽다. 다음에 한인마트에 가서 김을 좀 사와야겠다. 


주먹밥이 마무리 되어갈 때쯤, 우리 집에 새로 이사온 멕시코 친구 K가 나와서 인사를 한다. 굉장히 명랑하고 영어도 되게 잘하는 친구다. 나에게 커피를 좋아하냐고 묻길래 좋아한다고 했더니 지금 자기가 커피를 내릴건데 마시겠냐고 한다. 땡큐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잠시, 아니 거의 한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다. 물론 내가 그녀의 말을 다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K의 이력이 놀랍다. 어쩐지 엄청 미인이다 싶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TV에 출연했던 배우란다. 자신이 출연했던 드라마 사진도 보여주었다. 내가 그녀의 범상치 않은 머그컵에 관심을 보이니까 멕시코 현대 미술가 프리다 칼로의 모습이란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초현실주의 화가다. 그런데 K가 자신의 엄마도 미술가란다. 엄마의 작품 사진을 보여준다. 딸은 배우고 엄마는 예술가다. 멋진 집안이구나.

나는 취미가 여행이라니까 어디어디 가봤냐고 물어서 쭈욱 불러주었더니 놀란다. 나이가 얼마냐고 물어서 알려주었더니 아이가 있냐고 묻는다. 없으니까 여기 왔지. 그랬더니 자기 나라에서는 나이가 들면 왜 아이를 갖지 않느냐고 사회적 압박이 심해서 자기는 불편하다고 한다. 헉. 그래? 한국도 그런게 있는데 요즘은 조금 변하고 있다고 했다. 멕시코에도 그런 문화가 있다니 좀 놀랍다. 물론 자기 엄마는 그렇지 않은데 사회적인 압박이 좀 있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까 한 시간이나 지났다. 좋은 대화여서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나는 주먹밥을 챙겨서 딥코브로 출발했다. 슬슬 걸어가서 학원 근처에서 버스를 타면 한번 만에 갈 수 있다. 걸리는 시간은 약 40분 정도. 비교적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버스에서 내리니까 여기가 종점이다. 사람들이 다 거기서 내린다. 

공원에는 피크닉 나온 가족들이 한가득이다. 지도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우루루 올라가는 길을 따라 가니까 트레킹 코스다. Quary Rock 쿼리 록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어떤 후기를 읽어보니까 20분 정도 거리인줄 알고 갔다가 1시간 걸렸다고 투덜댄 내용이 있었다. 내 걸음으로는 2시간 걸리겠지. 어차피 도시락도 있으니까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다. 

그런데 입구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2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겠다. 게다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가 또다시 올라갔다가 하는 산길이 이어진다. 이건 가벼운 트레킹이 아니라 완전한 클라이밍 등산이다. 그래. 인생 자체가 그렇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연속. 오늘 내가 생각한 그림은 가벼운 트레킹을 하고 바위에 앉아서 느긋하게 주먹밥을 먹고 천천히 내려와 공원에서 쉬는 것이었는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등산을 하고 있다니 역시 인간은 한치 앞을 모른다.



굉장히 오래 등산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1시간 만에 쿼리 록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등산이라 체감 상 시간이 더 오래 걸린 듯 느껴졌나보다. 바위에 오르니 딥 코브 전경이 보인다. 멋진 경치다. 그런데 태양이 너무 강하다.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에 앉아있지? 아주 조금 그늘이 드리운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주먹밥을 먹었다. 

슬쩍 앞을 보니까 한 가족이 바위에 나란히 걸터 앉은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구도가 괜찮은 것 같아서 얼른 스케치를 했다. 기초 작업이 끝나갈 때쯤 그 가족은 일어나서 내려갔다. 아슬아슬하게 기초 작업이 끝났다. 물론 사진을 찍어두긴 했지만 그래도 느낌은 다르니까... 그런데 나머지 작업을 하기에는 햇살이 너무 강하다. 해가 닿는 모든 부분이 익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 땡볕에 앉아있는지 정말 불가사의하다. 




내려가는 길은 왔던 길이 아닌 단거리 코스로 선택했다. 예상했던 대로 단거리인 대신 가파르다. 윽! 내 무릎 살려. 어떤 구간은 내려가기 좀 무서운 곳도 있었다. 등산스틱을 가져왔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이다. 겨우겨우 산을 내려와 도로를 따라 걸어서 공원으로 다시 왔다. 

잠시 다리를 쉬어주고는 이곳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Honey Doughnut 가게로 갔다. 역시 줄이 엄청 길다. 그래도 여기를 다시 올 것 같지 않으므로 먹어보자. 줄은 길지만 회전율이 빨라서 금방 줄어들었다. 오리지널 허니 도넛 하나를 사서 먹어보니 괜찮다. 생각보다 너무 달지 않고 기름지지 않아서 좋다. 다만 한번 먹어본 것에 만족하는 수준이다. 


아까 내렸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으려니까 바로 버스가 온다. 종점이라 앉아갈 수 있어서 좋다. 버스 안에서 엄청 졸았다. 그래도 귀소본능으로 집에 가까워지니까 눈이 떠졌다. 이 귀소본능은 외국에 나와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집으로 와서 씻고나서 불꽃놀이 세 개에 대한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교사 S가 농담으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만들어서 이메일로 보내보면 뭔가 반응이 있겠지. 어차피 이런 것을 준비하면서 영어공부가 되는 거니까 밑져야 본전이다. 아니 본전 이상이다. 간단한 PPT지만 동영상도 첨부해야 해서 영상편집에 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영어로 말할 것까지 생각하려니까 막막하다. 난 절대 못 외운다. 최대한 말할 내용은 줄이고 영상으로 보여주자. 그럭저럭 만들어서 이메일로 보냈다. 

이번 주말은 여러 가지 일을 한 것 같다. 어제는 도서관에도 가고 영어회화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났고 마지막 불꽃놀이도 보았다. 오늘은 멕시코 친구 K와 친해졌고 등산도 하고 발표 자료도 만들었다. 정말 보람찬 주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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