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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25. 2023

앤 섬에서 자전거 타기

2023.08.17.목요일

오늘은 늦잠자기로 작정한 날이다. 꿈도 안꾸고 깊이 자고 나서 눈을 뜨니 창밖이 밝았다. 그래봤자 8시다. 좀더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다가 일어나서 간단히 씻고 어제 남았던 만두를 데워서 먹으면서 오늘은 많이 걷지 말고 릴렉스하자고 생각했다. 이렇게 느긋하게 일어나 샬럿타운의 시내를 한바퀴 돌고 맛있는거 먹고 쉴 생각이었다. '이었다'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제 늦은 오후에 생각보다 추웠던 생각이 나서 날씨앱을 열어서 기온을 확인하는데 내일 비가 온단다. 비올 확률이 70%다. 나의 계획은 오늘은 푹 쉬고 내일은 그리니치 파크라는 곳으로 놀러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 본다면 내일 푹 쉬고 오늘 그리니치 파크에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작정하면 비를 맞으면서도 가려면 가겠다만 그건 좀 미련한 짓인 것 같다. 오늘 가는게 좋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리니치 파크로 가는 대중교통 방법을 못 찾아서 오늘 시내에 가서 내일의 투어를 신청할까 했다는 점이다. 오늘의 투어를 바로 신청해서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저번에 알아본 방법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기 버스 중에는 그리니치까지 가는 버스는 없다. 여러 버스 노선의 버스 정류장을 구글맵에 일일이 넣어서 비교해서 찾아보았다. 덕분에 이 동네 지리 공부를 제대로 했다. 그리니치 파크의 가장 가까운 마을은 세인트 피터스인데 거기 가는 버스가 하루에 3대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근접한 곳에서 내리면 그리니치 파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시간 상으로 이미 첫번째 버스는 늦었고 다음 12시 버스를 타면 1시 도착. 마지막 버스가 4시니까 3시간의 시간이 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갈 수는 있겠다 싶다. 급하게 12시와 4시 왕복 버스를 예약했다. 12시까지 여유가 있어서 느긋하게 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버스는 역시 이번에도 근처의 환승터미널에서 탄다. 이러다가 환승터미널에 정들겠다. 여기에는 커다란 몰이 있어서 구경하면서 시간 보내기도 좋다. 일찍감치 가서 구경하면서 너무너무 맘에 드는 옷이 있어서 좀 샀다. 내가 이토록 쇼핑 중독자였단 말인가? 여기 캐나다에 와서 나는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놀란다.

아직 버스시간은 여유있어서 한번 더 길을 채크하려고 구글맵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뭐지? 버스에서 내려서 그리니치까지 걸어가는데 1시간 50분이 걸린단다. 아까는 검색했을 때는 1시간이었는데, 아니 1시간이라고 보았는데 이상하다. 아무리 봐도 1시간 50분, 때로는 1시간 48분이란다. 내가 뭔가에 홀린 건가? 아니면 1시간이기를 바란 건가? 1시간이라 해도 내 걸음으로는 1시간 30분이다. 그런데 1시간 50분이면 왕복은 불가능하다. 걸어서는 불가능하지만 자전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 자전거를 어디서 빌리지? 보니까 그리니치 파크는 자전거로도 많이 가는 장소라고 안내되어 있다. 갑자기 머리가 너무 복잡해진다. 지금이라도 버스를 취소하고 여행사를 알아봐서 내일 갈까? 아니면 일단 버스를 타고 가면서 물어볼까? 여기도 스쿨버스나 뭔가 그런 버스일텐데 혹시 그리니치까지 갈 수 없냐고 물어볼까? 최소한 자전거 빌리는 곳이라도 알려달라 해볼까? 온갖 생각이 떠올랐으나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버스가 왔다. 



예상대로 시내버스와 다른 형태의 버스다. 무슨 관광버스인 것 같다. 예매한 티켓을 휴대폰으로 보여주고 탑승했다.  승객은 5명 뿐이다. 다들 앞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 눈치를 슬쩍 보다가 앞 자리의 승객에게 뭣좀 물어봐도 되냐고 말을 붙여 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여기가 처음이라며 자기보다는 자기 앞자리의 여자에게 물어보는게 낫겠단다. 그래? 잠시 자리를 옮겨 구글맵을 보여주면서 내가 여기서 버스를 내릴건데, 여기까지 말하니까 여기 승객 중에 3명이 거기서 내린단다. 나는 여기가 목적지가 아니라 그리니치 파크에 가고 싶다,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갸오뚱하더니 버스는 없다면서 택시를 타는게 좋겠단다. 택시가 가능하겠니? 그녀는 버스 기사에게 혹시 그리치니까지 어떻게 가냐고 묻는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은 걷는 것 밖에 없단다. 혹시 자전거 빌릴 곳은 아니? 그녀는 모른단다. 그리고 뭐라뭐라 하는데 아마도 자기 동네는 아니라는 것 같다.

일단 현재까지는 어쩔 수 없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첫째 이 버스가 목적지(거기가 종점)에서 돌아서 다시 샬럿 타운으로 나가므로 그대로 철수한다. 둘째 일단 목적지가 무슨 스파 리조트니까 거기서 자전거를 빌려 본다. 셋째, 목적지 전 정거장쯤에 약간 시내로 보이는 곳이 있으므로 거기서 방법(택시나 자전거)을 찾아본다. 넷째, 이도저도 안되면 그냥 그 동네 산책이나 좀 하고 돌아온다. 좀 궁색하지만 내 잔머리로 최대한 아이디어를 짜보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어느 지점에서 버스기사가 무슨무슨 캠핑장이라며 지난다. 버스 노선 중에 있던 지명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지명이 눈에 익다. 그 다음 정류장은 내가 이 동네 시내라고 인식한 곳이다. 무슨무슨 대학 연구실(랩실)이라며 여기 내릴 손님이 없으니까 지나가겠단다. 그런데 버스가 지나는 순간, 나의 눈에 포착된 것은 자전거 빌려주는 가게다. 역시 여기 있구나. 

지금 내리기에는 이미 늦어서 일단 지나서 종점이라는 스파 리조트에 간다. 혹시 거기서 자전거 빌기기가 가능하면 거기서 빌리는게 더 낫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것은 아님을 직감했다. 비포장 도로에다가 낮은 건물 몇 채가 있는 공간에 버스가 섰다. 우리나라의 스파 리조트를 생각하면 안된다. 그냥 작은 규모 팬션 정도다. 거기가 목적지라던 손님 3명은 내리면서 버스 기사에게 자기들은 내일 아침에 여기서 버스를 탈거라면서 내일 이 자리에서 버스를 타면 되냐고 묻는다. 기사는 맞다면서 시간도 한번 더 이야기해준다. 그들이 내리고 나자 버스기사는 나에게 그리니치에 갈거면 자기가 요앞 언덕에서 내려줄까라고 묻는다. 이 버스는 이대로 다시 샬럿타운까지 가야 하므로 그리니치까지 데려다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아까 자전거 빌려주는 가게를 봤다, 아까 말한 대학 연구실 정류장에 내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당연히 가능하다며 버스를 돌려 나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보더니 자전거 가게를 보고 그 맞은편 가게 앞에 차를 세운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이따가 내가 여기서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이 자리에서 타면 되는지 물었다. 나의 오후 버스 표를 보여주니까 버스기사는 잠시 기다리라면서 무전기를 켜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그는 표에 적힌 나의 이름을 말하면서 오후 버스의 기사에게 너의 승객이 지금부터 자전거를 타고 그리니치에 갔다 올 건데 이따가 네가 버스를 이 가게 앞에 세울 수 있는지 묻는다. 여기서 세울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러면 이따가 그녀를 잊지 말고 여기서 태우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서 타면 된다고 말해준다. 너무 고마운 버스기사다. 여기의 시외 버스 시스템이 독특한 것 같다. 유연하지만 명확하지는 않은, 불편하지만 친절한, 참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뜻밖의 장소에서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나는 거의 10년만에 자전거를 타는 듯하다. 호기롭게 자전거 가게를 찾았으나 좀 떨린다. 일단 보증금 대신 카드번호를 적어주고 (나중에 별일 없겠지?) 자전거를 빌렸다. 내 키에 맞게 안장을 조절하고 헬멧도 나에게 맞는 것으로 받았다. 몇 차례 가게 앞 공터에서 시운전하고 나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출발하였다. 

처음부터 언덕이라 도저히 안되겠어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그러나 곧 평탄한 구간이 나와서 신나게 달렸다. 그러나 신나게 달리면서 여기는 약간 내리막이므로 이따가 올때는 빡세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신난다.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라 어색하지만 바람이 시원하고 경치도 너무 좋다. 어느 구간은 밀밭이, 어느 구간은 옥수수밭이 펼쳐진다. 그리고 한쪽은 바다가, 한쪽은 들이 펼쳐진다. 경치가 기가 막히다. 자꾸자꾸 자전거를 멈춰서 사진을 찍는다. 자전거는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려면 더 힘들다. 그래도 이놈의 사진 욕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시간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자전거 가게 직원 말로는 그리니치까지는 왕복 1시간이면 된다고 했다. 구글맵도 편도 25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편도 1시간이 걸렸다. 물론 내가 사진을 찍고 느리게 달린 점도 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도 있어서 그다지 녹녹치 않은 길이다. 힘들지만 멋진 길을 달리고 달려서 거의 1시간 만에 그리니치 파크 입구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 나는 지쳐서 자전거에서 내리는데 다리 힘이 풀려서 풀썩 넘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괜챦나고 묻는데 그저 나는 부끄러울 뿐이다. 괜챦다고 하고 일어났다. 자전거를 거치대에 묶어두고 지도를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한바퀴를 다 돌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전체를 다 돌려면 1시간 반. 내 기준으로는 2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버스를 타야 한다. 돌아갈 시간을 고려한다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20분 정도다. 그냥 근처에서 제일 바다가 잘 보이는 곳까지 산책 삼아 걸어가기로 했다. 거기도 자전거로 갈 수 있지만 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여기는 비포장인데다가 사람들도 뒤섞여 걷는다. 나에게는 무리다. 트레일을 따라 조금 걸어나가니까 경치가 멋지다. 이 길을 끝까지 돌면 더 좋을 것 같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더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교차한다. 인생은 참, 묘한 것이로구나. 누가 그랬지, 아쉬움이 남으면 다시 오게 된다고. 지금의 아쉬움은 언젠가 와서 채울 수 있기를 바래본다.




마음을 접고 다시 나와서 자전거를 타고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아까 오면서 사진을 찍지 못한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느긋하게 가다보니까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막판에는 안되겠다 싶어서 무슨 사이클 선수처럼 열나게 패달을 밟았다. 겨우겨우 가게에 와서 자전거를 반납하고 계산을 했다. 총 46달러가 들었다. 

서둘러서 버스 타기로 한 곳에 가서 기다리니까 이번에는 아주 작은 셔틀버스같은 것이 온다. 정말 이 시외노선은 버스 종류가 다양하다. 버스기사는 내 이름을 묻고는 타라고 한다. 버스를 타고 나니까 어디까지 가냐고 한번 더 확인한다.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린다. 이제 숙소까지 무사히 갈 수 있다. 이 섬에서 참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구나 싶다. 일단 환승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면서 엄청나게 졸았다. 그래도 역시 신기하게 내릴 때쯤 되니까 잠이 깬다. 

무사히 환승터미널에 와서 근처 마트에서 작은 티 박스를 샀다. 주인 아주머니가 어제 준 만두에 대한 답례다. 이제는 매우 익숙한 1번 버스를 타고 숙소에 왔다. 우선 좀 씻고 잠시 숨을 돌린 후 내 저녁도 데우고 티 박스도 주려고 올라가니까 마침 주인 아주머니랑 마주쳤다. 내가 티 박스를 주니까 아주 좋아하면서 같이 마시잔다. 그러면서 오늘 어디 갔다 왔냐고 묻는다. 오늘 버스를 타고 그리니치 파크에 가서 자전거 타고 왔다니까 놀라워한다. 내일은 뭐하냐고 물어서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릴랙스 할 거라니까 잘되었단다. 내일은 이 섬의 국경일인데 커다란 퍼레이드가 펼쳐진단다. 사람들이 다 의자를 가지고 나와서 앉아서 구경하는 큰 행사가 있단다. 굉장히 오래된 행사라고 자랑스럽게 말한다. 

만약 내가 오늘 그리니치에 갔다오지 않고 내일 가기로 맘먹었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것 같다. 결국 아침에 잠시 시간을 착각해서 그리니치에 가기로 했으나 덕분에 뜻밖의 경험을 많이 한 것 같다. 게다가 내일 퍼레이드도 볼 수 있다. 결국 여행은 매일 매일 모험인 것 같다. 흥분도 경험하고 아쉬움도 경험하는 모험이다. 이러니 내가 여행을 사랑할 수 밖에... 매일매일이 새롭다. 과연 내일은 어떤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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