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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Dec 22. 2023

그린게이블스의 앤

2023.08.16.수요일

오늘은 드디어 이 섬에 온 목적인 앤의 마을에 간다. 어제 밤에 페이지를 통해 버스를 예약했다. 그런데 버스 요금이 시내 버스 요금과 같은 2달러다. 그냥 모든 버스는 다 2달러로 통일시키기로 했나 보다. 하루에 다섯대만 운행되는데 지난번 공항에서 올 때 버스를 환승한 곳(쉘터라고 부름)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일찍 일어나 버스 시간에 맞춰 나가 숙소 앞에서 1번 버스를 타고 환승하는 곳으로 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버스 티켓을 보여주며 여기가 맞는지 물었다. 맞단다. 자기들도 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고 보니까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서 버스를 기다린다. 확실히 여기가 맞나보다. 그런데 시간이 되니까 웬 스쿨버스가 온다. 그러더니 사람들이 우루루 그 버스를 탄다. 그 버스가 앤의 마을인 캐번디시까지 가는 버스란다. 버스기사에게 휴대폰의 표를 보이니까 타란다. 아마도 이 노선은 생긴지 얼마 안되었거나 비정기적으로 운영하는가보다. 


후일담: 저 버스는 비정기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내가 블로그에 앤의 섬 교통편에 대해 올린 글을 보고서 어떤 분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가려고 하는데 버스편을 찾을 수 없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다시 버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정말 저 버스 노선이 없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없어졌다기 보다는 앤의 마을인 캐번디시까지 운행하지 않고 그 전 마을에서 회차해서 다운타운(샬럿타운)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저 버스는 여름에 한시적으로 운행되는 것 같다. 갈 때와 올 때의 버스가 서로 달랐다. 아무래도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버스로 임시 운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갈 때는 스쿨버스, 올 때는 관광버스)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가니까 목적지인 그린게이블스 헤스티지 플레이즈(그린게이블스 역사유적박물관)에 도착했다. 나의 예상과 달리 한적한 국도변에 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 마을이 있으리라 상상했는데 그렇지 않다. 집들이 멀찍이 드문드문 몇 채가 있을 뿐이다. 나는 앤의 집을 구경하고 나서 마을 구경도 하려고 했는데 뭔가 좀 예상과 다른 상황에 당황했다. 

일단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서 입장료를 내고 지도를 받아 들었다. 바로 입구에 '그린게이블스의 앤'의 저자인 몽고메리의 생애에 대한 안내가 되어 있길래 꼼꼼하게 읽으면서 한바퀴 돌았다. 영어와 불어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영어 설명이 대충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되었다. 혹시 내가 맞게 이해한건가 싶어서 파파고의 이미지 번역으로 확인해보니까 거의 맞다.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여전히 영어 원어민의 리스닝은 어렵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닥치는대로 글자로 된 것은 전부 읽었단다. 역시 대가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가 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린게이블스의 앤'이 그녀의 첫 소설이라는 점이다. 첫 소설이 대박을 친 것이다. 처음에는 이 소설을 어느 출판사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단다. 수차례 거절당하다가 겨우겨우 출판을 했는데 그것이 히트를 친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해리포터'도 처음에는 모든 출판사들이 거절했다고 들었다. 대작은 처음에는 출판사들의 외면을 받다가 어려움을 딛고 출판되어 갑자기 명성을 얻게 되는 것 같다. 사실 그 책을 출판하기로 한 출판사에서도 그것이 이렇게 대박 터지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결국 명작 혹은 대작은 그 작품이 훌륭하기 때문인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읽고 인기가 있어서 명작 혹은 대작이 된 것일까? 뭔가 좀 어리석은 질문인 것 같지만 의구심이 든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순환적 질문인 것 같다. 정답은 없다.

어쨌든 그녀는 그 후로 다양한 앤 시리즈를 내놓았단다. 이렇게 작가로는 성공했으나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이 정신질환을 앓아서 힘들어 했단다. 역시 모든 것이 다 좋을 수는 없나 보다. 그녀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흥미로운 것이 있으면 스크랩을 했고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아해서 사진도 많이 스크랩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도 스크랩북에 메모했단다. 그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니까 어쩐지 정감이 간다. 사실 나는 어릴 적 애니메이션으로 본 '빨강머리 앤'과 얼마 전에 넷플릭스로 본 영화 '앤' 때문에 단지 '그린게이블스의 앤'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는 뒷전이었는데 이 기회에 자세히 알게 되었고 작가로서의 삶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앤의 집으로 가 보았다. 물론 가상의 인물이므로 실제로 살았던 집은 아니다. 소설이 인기를 얻으니까 이 마을에서 작가의 박물관을 지으면서 구현해 놓은 집이다. 그런데 마침 앤의 집 입구에 단체 관광객이 드글드글하다. 아무래도 그들로 집이 꽉 찼을 것 같아서 산책을 먼저 하기로 했다. 두 곳의 산책로가 있는데 우선 짧은 길부터 걸었다. 가볍게 숲길을 걸어 한바퀴 돌고 오니까 앤의 집에 이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앤의 집에 들어가서 거실과 주방부터 매튜의 방까지 1층을 먼저 보았다.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써서 당시의 옷, 먹거리 등을 잘 재현해두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르고 좁은 계단까지 실제 당시의 집 구조를 신경써서 복원한 것 같다. 2층의 첫번째 방은 앤의 방이다. 특별히 창가에 등을 밝혀두었다. 앤과 다이애나가 서로 창가의 불빛으로 신호를 주고 받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손님방, 마릴라의 방 등이 있다. 중간에 물레와 재봉틀도 재현해두었다. 앤의 집은 생각보다 작았다. 실제로 그때는 집들이 큼직하지는 않았나보다. 하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그게 상상력의 힘이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에서 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서 공간을 들여다보니 여러 장면들이 떠올라서 재밌게 구경했다.




앤의 집을 나와 나머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앤의 박물관에는 두 개의 산책로가 있는데 하나는 숲을 산책하는 짧은 구간이고 또 하나는 큰 길을 건너 갈 수 있는 긴 구간이다. 이번에는 긴 구간을 걸어보았다. 그 길은 몽고메리가 실제로 살았던 집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아니, 명확히 말하면 집이 아니라 집터가 있는 곳까지 길이 이어진다. 숲을 벗어나 큰 길을 건너면 몽고메리 공원이 나온다. 거기에 그녀의 조각상도 있는데 책을 읽다가 말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공원을 지나 산책로를 조금 걸어가니까 작은 서점이 나온다. 그 서점에서 입장료를 받는데 서점 옆 공원이 몽고메리의 집터다. 집도 아닌 집터를 입장료까지 내고 구경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 숲길을 걸으면서 앤이 절친 다이앤을 만나러 가는 장면을 상상하니까 어쩐지 내가 앤의 한 장면 속을 걷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책로를 매일 걸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점심은 이 근처에 평점이 높은 식당에 가기로 마음 먹고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이 녹녹치 않다. 차가 쌩쌩 달리는 국도인데 반대편 쪽에만 인도가 있다. 건널목이 따로 없어서 길을 건너려고 한참 기다렸다가 차가 없을 때 겨우 건너 갔다.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니까 여러 식당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 나온다. 그 가운데에 식당이 있다. 이번에도 또 한참 기다렸다가 겨우겨우 길을 건넜다. 여기는 정말 도보 여행자에게 불친절한 곳이다. 아무래도 이쪽 동네는 다들 차량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도보로 움직이는 사람을 위한 배려는 없는 것 같다. 걸어오는 도중에 산책하는 동네사람을 겨우 한 명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섬의 대중교통 홈페이지에서는 환경을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하던데 그러려면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여곡절 끝에 목표했던 식당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화이트 와인까지 곁들여서 그럴듯하게 먹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이다. 다음 버스는 내가 예약한 오후 5시 49분 버스다. 일정을 당겨서 나가고 싶어도 그 사이에 버스가 없다. 그렇다면 4시간 정도를 여기서 놀아야 한다. 나는 여기에 앤의 마을이 있는 줄 알고 마을 구경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근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 다들 멀찍이 집들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닷가쪽으로 가서 바닷길 산책이나 해야겠다. 해변쪽이 그렇게 아름답다는데 한번 가봐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까 왔던 그 도로를 다시 건너서 가야한다. 식당 근처에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이 있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 자전거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다시 와야한다. 게다가 이 찻길 옆에 좁다란 자전거길을 달릴 자신이 없다. 그냥 내 두발로 다니련다. 

길을 겨우겨우 건너서 근처의 관광 안내소로 갔다. 가서 이 근처에 볼만한 것을 물어보니까 아까 내가 본 것들이 전부다. 그다지 도움될만한 내용이 없어서 그냥 지도만 받아서 나왔다. 바닷가쪽으로 난 길로 10여분 걸어가니까 바다가 나온다. 뷰가 멋지다. 근처에 캐번디시 메인 비치가 있어서 거기부터 가봤다. 중간에 멋진 호수가 있다. 안내문을 읽어보니까 바다의 일부였다가 모래가 쌓여서 호수가 되었고 차츰 담수화가 진행되어 지금은 담수호가 되었단다. 다양한 생태계를 자랑한단다. 이걸 내가 다 읽어냈냐고? 그럴리가 없다. 너무 어려운 단어들이 많다. 구글이 번역해주었다. 

메인 비치는 사람들이 가족단위로 많이 즐기고 있었다. 비치타올이 있다면 저기서 낮잠 자면 좋을 것 같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좀 춥다. 여기 사람들은 신난다고 수영을 즐기고 있지만 나에게는 늦여름, 초가을 날씨로 느껴진다. 



다시 돌아나와서 반대쪽 길을 걸어갔다. 뷰가 좋다는 포인트까지 갔다 오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다. 여기는 자전거길이 잘 닦여져 있다. 아까 내가 걸었던 그 길만 위험하고 나머지는 이렇게 길이 잘 되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전거를 빌리는 것이 나을 뻔했다. 누가 이런 상황인줄 알았나? 

바다를 옆에 끼고 하염없이 걷다보니 문득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에서 앤이 마차를 타고 처음으로 그린게이블스에 오던 장면이 떠올랐다. 꽃나무 터널이 나오기 전에 마차가 이렇게 바다를 끼고 절벽 위쪽의 길을 달렸던 장면이 있다. 그때의 그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다. 다만 지금은 찻길과 자전거길로 잘 닦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고 보면 애니메이션이 그냥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현장을 와서 보고 그림으로 표현한 것 같다.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인데 참 잘 만든 것 같다. 내가 목표로 했던 뷰 포인트는 걸오오면서 보았던 그 모습과 비슷하다. 여기도 작은 해변이 있어서 일가족이 떼를 지어 놀고 있다. 한참 앉아서 바다 멍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오랫동안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는 것 같다. 다시 그린게이블스 박물관으로 와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약간 늦게 와서 살짝 불안했지만 결국 오긴 왔다. 그런데 이번 버스는 아까 그 버스가 아니다. 이번에는 관광버스다. 정말 이 노선은 임시 노선인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엄청나게 졸았다. 그래도 내릴 곳에서는 신기하게 잠이 깬다. 환승 정류장에는 음식점과 옷가게 등이 있다. 거기서 먹거리를 좀 사가지고 다시 1번 버스를 타고 숙소로 왔다. 


숙소에 들어서는데 안주인과 마주쳤다. 오늘 행복했냐고 묻는다. 아주 즐거웠다고 하니까 좀 있다가 자기가 중국식 만두를 주겠단다. 씻고 나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안주인이 와서 올라가자고 한다. 2층에 가니까 거실에 탁자에 만두가 놓여있다. 생긴 것은 우리나라 만두와 똑같은데 속에 들어간 것은 다르다. 샐러리와 치킨이 들어간 것이 있고 양배추가 들어간 것이 있다. 중국식 간장과 식초에 찍어 멋었다. 

만두를 먹으면서 서로 서투른 영어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에 정착하게 된 이야기, 여행에 대한 이야기, 캐나다의 높은 세금 이야기, 은퇴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영어의 수준이 비슷하니까 오히려 대화하기가 편하다. 서로 쉬운 단어로도 한참을 이야기했다. 만두가 너무 많아서 다 먹지 못하니까 방의 냉장고에 두었다가 내일 아침에 올라와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란다. 아까 사온 먹거리까지 해서 먹을 게 넘친다. 여기를 떠날 때까지 먹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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