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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Jan 25. 2024

엉킨 실뭉치

2023.08.27.일요일

아침부터 마음이 심란하다. 내가 일본 고등학생 친구 H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린 학생이 친구를 잘 사귈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더니 한국에 있는 친구 한 명이 지금 일본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타박을 준다. 지금 일본은 오염수를 기어이 방류했고 이것은 지구에 되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이다. 점진적으로 발생할 환경 문제도 심각하지만 당장 한국은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일본 학생 걱정을 하니까 친구가 나에게 국제적 오지랖이라고 뭐라고 한다. 


변명할 말이 없다. 여기 오면서부터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부분이 건드려진다. 지금 한국은 미친 정권이 민주주의를 수십년 전으로 후퇴시키고 있다. 정의가 사라지고 검찰 독재 국가가 되어 가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영어공부 타령이나 하고 있다. 함께 고생하던 동료들은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데 나는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게다가 나는 여기서 일본 학생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 휴우... 이럴 때가 아니지 싶다가도 그렇다고 여기서 내가 일본 학생들과 아예 교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궁색한 변명이다. 뭔가 풀 수 없는 실뭉치를 하나 가슴에 안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은 이리저리 심란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할 일을 안할 수는 없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다음 주 아마존 프리젠테이션부터 준비한다. 이런 저런 사진을 선택하고 스토리라인을 잡아 보았다. 이걸 영어로 어떻게 설명할지,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본다. 동시에 빨래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린다. 일요일 오전은 빨래와 발표 준비로 다 지나갔다. 


오후에는 도서관으로 출동했다. 문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동안 배운 문법 설명 중에서 어려운 것들을 골라서 예문을 한번씩 써보았다. 이제 2달이 되어 공부한 부분이 제법 많다. 1달만 더 공부하면 이 책을 끝낸다. 그때쯤이면 레벨 up이 가능할까? 시험은 여전히 자신이 없다. 문법은 공부를 하고 예문을 읽으면 이해가 되지만 모든 범위가 뒤섞여서 문제로 제시되면 어느 것을 적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문법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나서 지난번에 읽었던 시집을 찾아서 한 편 읽었다. 이번 시는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의 시다.


There is a pleasure in the pathless woods -from childe Harold`s Pilgrimage.

길없는 숲에는 기쁨이 있다. -차일드 해롤드의 순례로부터


There is a pleasure in the pathless woods, 길없는 숲에는 기쁨이 있다,

There is a rapture on the lonely shore, 외로운 기슭에는 황홀이 있다,

There is society where none intrudes,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

By the deep sea, and music in its roar: 깊은 바다와 포효하는 음악 옆에서:

I love not Man the less, but Nature more,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더 사랑한다

From these our interviews, in which I steal 내가 훔친 인터뷰 중에서

From all I may be, or have been before, 있거나 이전에 있던 모든 것들 중에서

To mingle with the Universe, and feel 우주와 어울리고, 느끼기 위해

What I can ne`er express, yet cannot all conceal. 내가 표현할 수 없는 것, 그러나 모두 감출 수도 없는 것.


이 시는 연작시인가본데 이번에도 역시 내용이 어렵다. 구글에서 원문 제목으로 검색하니까 영어로 된 해설이 있다. 구글 번역기에 의존해서 좀 살펴보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지만 고독의 욕구도 있는데 이 시는 그런 마음을 담고 있단다. 다른 부분은 어찌어찌 은유적 표현으로 이해가 되는데 '내가 훔친 인터뷰'가 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엿보았다는 의미일까? 이렇게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다. 'I love not Man the less, but Nature more, 나는 사람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문득, 이게 지금 내 마음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다. 나는 지금 우리나라를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좀 억지인가? 하지만 이렇게 영시를 읽고 쓰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뭔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 아니, 마음이 차분해진다기보다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를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랜빌 스트리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제를 잠깐 구경했다. 여름이라 여기저기서 행사가 많은데 오늘은 다운타운의 중심거리에서 작은 축제를 한다. 노래 공연하는 곳도 있고 작은 가게들도 있다. 여기저기 음식 파는 곳도 있고 아이들의 체험활동할 수 있는 곳도 있다. 흥겨운 거리도 구경하고 음악도 잠시 감상했다. 



집에 오니까 새로운 학생이 이사를 왔다. 그녀는 인도계 캐나다사람이다. 영어를 겁나 잘한다. 마침 미국친구랑, 이 캐나다친구랑, 내가 저녁 시간이 겹쳐서 식탁에 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는데 이들의 대화 내용이 영어 리스닝 테스트같다. 잘되었다. 아주 좋은 연습상대들이다. 서로 어디 출신인지, 지금 뭐 공부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라 그럭저럭 알아들었다. 미국친구는 메이크업을 배우고 있고 캐나다친구는 에니메이션을 배우고 있단다. 둘은 같은 컬리지(전문대학?)에 다닌단다. 하지만 전공이 달라서 캠퍼스가 다르다. 밴쿠버는 언어 외에도 다양한 교육의 도시로구나. 하지만 이들의 빠른 영어로 인해 못알아 들은 내용이 많다. 앞으로 이들과 살아가면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오늘은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영어 듣기 실습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여전히 엉킨 실뭉치는 무겁지만 언젠가는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인생이란 기대로 시작했다가 실망 혹은 절망을 거쳐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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