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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Oct 01. 2024

혁명광장에 서다

쿠바 여행기 3일

2023.11.28.화요일

많이 피곤했나보다. 기절하듯 꿀잠을 자고 일어나니 상쾌하다. 느긋하게 밖으로 나와 구시가지 쪽으로 향했다. 어제 걸었던 말레꼰 해변 방향이 아니라 시내 쪽 골목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숙소 인근에서 우리나라 편의점 정도 수준의 가게를 발견했다. 이곳 쿠바는 대부분의 가게들이 아주 적은 물건 몇 개만 구비하고 있는데 이 가게에는 아주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런 가게가 숙소 인근에 있다는 것은 완전 행운이다. 나도 맥주와 간식을 사서 얼른 숙소 냉장고에 갖다 두었다.



다시 길을 나섰다. 어떤 집은 아주 예쁘게 잘 가꾸어져 있지만 어떤 건물은 거의 쓰러져가고 있다. 아바나는 쿠바의 수도이지만 구시가지인 올드 아바나에는 거의 폐허 수준의 건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폐허같은 건물도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겉만 보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참,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이 아주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쿠바는 지금도 물품 배급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 줄인 것 같다. 다른 도시에서도 이렇게 줄을 서 있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쿠바가 자본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건 일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시가지의 식당가로 나와서 아점으로 간단히 타코를 먹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맛있다. 가격은 약 12달러. 역시 비싸다. 이 정도면 우리나라의 관광지 물가다. 교통비와 식비가 내 예상보다 비싸서 좀 당황스럽다. 내가 여행 예산을 너무 적게 잡았나보다. 뭐, 앞으로 저렴한 길거리 음식 사먹고 대중교통 이용하면서 다니면 되겠지. 규모가 큰 식당에서 주는 영수증에는 쿠바페소, 달러, 유로, 캐나다달러 등이 쭈욱 제시된다. 쿠바는 얼마전까지 내국인용 쿱과 외국인용 쿡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화폐 개혁을 해서 쿠바페소로 일원화시켰다.



구시가지의 유명한 장소들을 둘러 보았다. 먼저 혁명 박물관부터 볼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공사 중이라고 문을 닫았다. 쿠바의 혁명에 관련된 여러가지 전시물이 있는 박물관이라고 들었는데 아쉽다. 혁명 박물관의 본관 옆에 있는 전쟁 전시물만 밖에서 한바퀴 둘러보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대성당. 규모는 작지만 예쁜 성당이다. 구시가지에서 꽤 유명한 장소라서 그런지 성당 앞 광장에는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성당 내부도 들어가 볼 수 있었는데 곳곳에서 현지인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조용히 한바퀴 돌아보고 나왔다. 유럽과 캐나다에서 본 대규모의 성당과 비교한다면 아주 작고 화려하지 않은 성당이다. 하지만 왠지 정갈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성당에서 나와서는 오비스포 거리를 구경할 생각이었으나 일단 숙소로 향했다. 왜냐하면 나의 예상보다 훨씬 햇볕이 따가워서 도저히 더 이상 돌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다. 우와, 정말 햇살이 해도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강렬하다. 적도에 가까운 곳이라서 그런가보다. 숙소로 와서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앞으로 돌아다닐 때 오전 일찍 나갔다가 해가 제일 뜨거울 때는 이렇게 숙소에 와서 쉬거나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좀 누그러지고 나서 돌아다녀야겠다.

잠시 쉬고 나오니까 한결 기분이 상쾌하다. 상쾌한 기분으로 오늘의 하이라이트 올드카투어를 하기 위해 센트럴 파크 앞으로 갔다. 센트럴 파크 인근에는 올드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거기서 적당한 올드카를 골라 투어 가격과 시간을 협상해야 한다. 내가 참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놈의 협상이다.

시간에 따라 가격과 코스가 다른데  대체로 1시간(30달러), 2시간(50달러) 한단다. 1시간 짜리는 시내만 도는 것이고 2시간 짜리는 바다 건너편 관광지들까지 도는 것이다. 대부분 센트럴 파크에서 출발해서 다시 센트럴 파크로 돌아온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봐도 대략 비슷하다.



그런데 나의 조건은 좀 유별나다. 시내를 돌고 마지막 종착지를 모로 요새(바다 건너편)에서 끝내는 것이다. 나는 1시간 코스(30달러)로 돌고 종착지만 모로 요새로 해달라고 했다. 대부분 안된다고 거절했다. 그런데 어떤 중계인(일명 삐끼)이 처음에는 안된다고 하다가 내가 그냥 가려고 하니까 잠시 기다려 보란다. 그리고 어떤 기사에게 뭐라뭐라 하더니 저 기사가 그렇게 해주겠단다. 잘은 모르겠지만 소개받은 차량 운전자가 신참인 것 같았다. 어쨌든 노을 시간에 맞추기 위해 오후 4시에 만나기로 했다.

근처의 국회의사당, 예술회관 등을 구경하다가 시간 맞추어 약속 장소로 갔다. 내가 탈 차는 핑크다.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은 아니지만 그래도 드디어 쿠바에서 올드카를 탄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센트럴 파크를 출발해서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차이나타운, 혁명광장, 아바나대학, 말레꼰 해변을 지나서 모로 요새까지 가는 코스다. 아까 구경하고 온 국회의사당 앞을 다시 지나간다. 더운데 괜히 걸어갔다 왔네. 햇볕은 강렬하지만 차가 달리니까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좋다. 시내를 지나 차이나타운을 지나간다. 이 머나먼 곳까지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거리 곳곳에는 낡았으나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있고 다양한 색깔의 차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도로에는, 아니 대부분 나라의 도로에는 흰 색, 검은 색, 회색의 차들이 많고 간간히 튀는 색깔의 차들이 보였은데 여기는 오히려 검정이나 흰 색 차가 드물다. 빨강, 파랑, 초록 등 다양한 색깔의 차들이 시내를 누비고 있다.



올드카 투어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 내가 기대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혁명광장이다. 여기서는 쿠바 혁명의 주역인 체 게바라, 까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조형물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광장 앞에는 쿠바의 국민 영웅 호세 마르티의 동상도 볼 수 있다. 사실 호세 마르티 동상 바로 앞까지 걸어가볼 생각이었는데 어마무시하게 넓은 광장(아마도 축구장 3개를 합친 면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널목을 보고 그만 포기했다. 그래도 마르티 동상 맞은편에 있는 게바라와 시에푸에고스 조형물 앞까지 걸어가서 사진을 실컷 찍을 수는 있었다.

체 게바라, 까밀로 시에푸에고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의 주역들이다. 이들이 혁명에 성공했을때 이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쿠바 혁명은 이후 카스트로의 독재, 미국의 봉쇄정책 등으로 인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된 것 같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들과 결탁한 부패한 정권에 맞서 싸워 기어이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보이는 제국주의의 침탈보다 더 무서운 자본주의의 침탈 앞에서 쿠바의 혁명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드넓은 광장의 한쪽에 관광버스, 올드카들이 주차하는 공간이 있다. 오늘은 그나마 사람이 많은 편이 아니란다. 사람이 많이 올 때는 이 주차장이 가득 찬다고 한다. 어쨌든 올드카 투어의 필수 코스라서 그런지 많은 올드카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듯하다.



혁명광장에서 다시 출발해서 국립 병원, 아바나 대학 등 구시가지의 곳곳을 지나갔다. 아바나 대학 앞에서는 잠깐 사진을 찍을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나서 신시가지의 옆을 지나서 말레꼰 해변으로 향했다. 오픈카라서 시원한 바닷바람이 춥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게 갑자기 도로 중간에 잠시 차를 세운다. 보니까 매우 거대한 조형물이 있는데 이것은 예상치 못하게 침몰한 군함의 희생자를 기리는 것이었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군함은 미국 군함이었다. 이 군함의 침몰을 핑계로 미국은 당시 쿠바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과 전쟁을 선포하고 마침내 쿠바를 점령했다고 한다. 제국주의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쿠바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소인 것이다. 몹시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후 올드카는 말레꼰 해변을 달려 어제 내가 산책한 길을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시내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P턴을 하여 차는 지하 터널로 들어간다. 바다를 건너 모로 요새 쪽으로 가는 것이다. 윽. 매연을 피할 수 없다. 오픈카를 타고 터널이라니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터널을 빠져나와 터널 게이트를 지나는데 길가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맞은 편을 보니까 역시 버스 정류장이 있다. 아싸! 찾았다. 이따가 나는 이쪽으로 걸어와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갈 수 있다. 만약 버스 정류장을 발견하지 못하면 울며 겨자먹기로 모로 요새에서 또다시 거액을 내고 택시를 탈 각오를 했는데 다행이다.

드디어 모로 요새에 내렸다. 올드카 기사는 내가 시내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면서 너무 늦지 않은 시간이라면 택시가 있을 거라고 말해준다. 그래.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내가 요구한 코스대로 돌아주어서 고맙다. 내 생각에는 이 기사는 신참이 맞는 거 같다. 좀 수줍어 하면서 서툰 영어로 각각의 장소에 대해 말해 주었다. 뺀지르한 사람보다는 낫다.



이곳 모로 요새는 말레꼰에서 바다 건너편에 보이는 역사 유적지인데 일몰을 보기 좋은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한국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일몰 장면이 나와서 더 유명해졌을 것이다. 일단 해가 질 때까지 시간 여유가 있으므로 모로 요새를 구경해 보았다. 입장료는 200쿠바페소(대략 1달러)인데 가격에 비해 볼거리가 너무 없다는 평이 많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안 들어가보면 후회할 것 같고, 또 일몰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들어갔다.

긴 터널을 지나 들어가면 요새가 나온다. 요새 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다. 작은 성 내부에는 전시실이 있고 외곽으로는 대포와 등대가 있다. 전시실에는 이곳까지 온 유럽인들의 범선 모형, 그때 당시의 물건 들이 전시되어 있다. 쭈욱 둘러보면 이 모로 요새가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해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텍스트들을 다 읽은 것은 아니다. 그림을 통해 대략 이해한 것이다.




전시실에서 나와 요새의 외곽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대포들이 설치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이다. 여기가 아바나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이라서 수비를 위해 많은 대포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드넓은 바다를 향하고 있는 녹슨 대포를 보니까 씁쓸한 기분이 든다. 바다, 하늘, 구름... 자연은 그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인간이 만든 성곽과 대포는 외롭고 쓸쓸하게 한쪽에 서 있을 뿐이다. 참으로 덧없다.

여러 방향으로 설치된 대포들을 돌아보는데 갑자기 등대가 나타났다. 요새 한쪽에 등대? 여기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인데 이렇게 등대가 있으면 위치가 드러나서 위험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자고로 등대라 하면 수많은 배들에게 이정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대포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고 등대는 배를 구해줄 수 있다. 서로 상반되는 역할을 하는 것들이 한 공간에 있다. 거참 묘하다.



그리고 또 하나 묘한 일. 아까 들어올 때 사람들이 분주히 테이블들을 설치하는 것을 보았다. 나가면서 보니까 테이블들이 거의 다 설치되고 사람들이 이번에는 각 테이블에 식기류를 놓고 있다. 무슨 연회같은 것이 이루어지나보다. 마침 내가 긴 터널을 향해 나가는데 연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서양 사람들 한 무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는 역사 유적지인데 연회가 열린다? 거참 신기한 일이다. 슬쩍 모르는 척하고 합류할껄 그랬나?

요새 밖으로 나와서 일몰을 감상했다.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끼어서 해넘이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일몰의 방향도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도심 쪽으로 졌다. 오래된 성곽 너머로 지는 해를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래도 해지는 말레꼰을 건너편에서 보았으므로 그것에 만족해야지.



일몰 감상 후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아까 올드카에서 내린 곳에 택시들이 몇 대 기다리고 있다. 가격을 물어보니까 10달러를 부른다. 택시를 뒤로 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가니까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아까 보았던 터널 게이트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이다. 여기를 지나는 버스는 모두 시내로 들어가니까 뭐든지 먼저 오는 것을 타면 될 것 같다. 10 여분 기다리니까 버스가 온다. 버스비는 1쿠바페소. 잔돈을 미리 준비해두어서 1쿠바페소를 내고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에서는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으므로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니까 바로 근처 광장에 버스가 선다. 어제 산책했던 그 길이다. 여기가 인근으로 가는 버스들이 교차하는 곳인가보다. 버스들이 많이 서 있다. 만약 다음에 모로 요새에 또 간다면, 혹은 인근의 관광지로 간다면 여기서 버스를 타면 될 것 같다. 어두워졌지만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그다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도시의 야경은 조명빨이다. 슬슬 야경을 구경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2만보를 넘게 걸었다. 오늘도 기절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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