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여행기 4일
2023.11.29.수요일
오늘은 아바나를 떠나 시엔푸에고스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채크아웃을 하고 숙소에 짐을 맡겼다. 오전에는 아바나 시내 구경을 좀더 하고 오후에 시외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갈 것이다. 숙소에서 버스 터미널까지는 차로 약 10분 거리다. 걸어서 가면 50분 정도 걸린다. 숙소 주인에게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택시를 부탁하려 했는데 20달러를 불러서 포기했다. 거리에 나가서 택시나 코코(오토바이택시)를 직접 흥정해봐야겠다.
중심 거리로 나와서 택시와 코코를 흥정해 보았는데 택시는 역시 20달러를 부른다. 하지만 잘하면 15달러까지 깎을 수 있을 것 같다. 코코는 처음에는 15달러를 불렀지만 10달러까지 흥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가격만 대충 조사하고 시내 구경에 나섰다.
어제는 구시가지 북쪽을 돌았고 오늘은 구시가지 남쪽을 돌 것이다. 예쁜 거리들을 지나 올드타운광장으로 갔다. 재밌는 조형물들, 사방의 예쁜 건물들,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진 명랑한 광장이다. 주변에는 펍들이 많이 있어서 맥주 한 잔 하기 딱 좋아보인다. 늦은 시간에 와서 놀기 좋을 것 같다.
혁명 박물관은 오늘도 공사 중이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에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아바나로 돌아오는데 그때는 공사가 끝나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올드 아바나에는 혁명 박물관 외에도 곳곳에 전쟁 박물관, 지역사 박물관 등 다양한 형태의 박물관들이 있다. 다만 대부분 소규모라서 볼거리가 별로 없다는 평이 많다. 대신 골목골목 예쁜 건물들이 있어서 산책하는 재미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캐러비안의 해적같은 동상이 있어서 사진을 찍었다. 여러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가까이 갔는데 갑자기 동상이 움직여서 깜짝 놀랐다. 어머나, 깜짝이야. 사람이 분장을 한 것이다. 세계 유명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분장쇼이다. 여기서 이런 것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쿠바도 여행자들에게 개방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돈벌이 수단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 이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서양 관광객들이 유쾌하게 웃으면서 팁을 모자에 넣어주었다.
이런 저런 구경을 하면서 성 프란시스카 광장까지 갔다. 광장 옆에는 성 프란시스카 성당이 있다. 겉모습으로 보면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고 정갈한 성당이다. 성당에 들어가 보려 했는데 입구를 막고 무언가 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 슬쩍 밖에서 보고 아쉬움을 달랬다.
성당 입구 옆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수염을 만지고 발을 밟고 있다. 뭔가 싶어서 검색해보니까 '파리의 무심한 사람'(혹은 도시의 광인)이라는 동상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쿠바로 이민 온 어떤 실존인물이란다. 그는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났는데 이후에 정신이상이 되었단다. 정신이상이 되었지만 그는 매우 근사한 신사였단다. 그런데 이 동상의 수염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반대편 손을 만지고, 왼발로 발을 밟으면 행운이 온단다. 뭔가 좀 앞뒤가 안맞고 이상한 이야기다. 어쨌든 닳고 닳은 수염과 발을 보건대 서양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인가보다.
어제 그냥 지나쳤던 오비스포 거리로 갔다. 여기는 거리의 예술가들, 상점의 그림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거리 중간에 있는 작은 시장도 구경했다. 손으로 만든 여러가지 물건들을 파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귀국하기 직전에 와서 기념품을 몇 개 살 생각으로 오늘은 구경만 했다.
오비스포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길거리 음식도 사먹었다. 잼이 들어있는 페스츄리 간식(약 300원)과 길거리 피자(약 900원)를 맛보았다. 맛은 그냥 그렇다. 페스츄리가 너무 잘 부서져서 먹기에 불편했다. 그리고 피자는 토핑이 너무 없다. 그냥 토마토소스와 치즈 맛으로 먹었다. 그래도 길거리 음식 사먹는 것 자체가 재미다.
길거리 음식도 사먹고 작은 시장도 구경하면서 메인스트리트 방향으로 향했다. 나의 목적지는 바로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인 '라 플로리타'. 아바나 여행의 마무리로 특별히 선택한 장소다. 이곳은 들어갈 때 문지기(?)가 물어본다. "너 카드 있니?" 카드 외에는 받지 않는단다. 들어가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있고 한쪽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헤밍웨이 조각상이 한쪽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각상과 함께 사진을 찍고 건배도 한다. 나도 헤밍웨이가 자주 마셨다는 다이끼리(6.25달러)를 시켜서 한 잔했다. 칵테일은 내 스타일의 술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헤밍웨이 스타일로 마셔야지.
여기 오기 전에 헤밍웨이의 소설을 한번 더 읽어보고 와야지 생각했는데 실천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집에 가면 '노인과 바다'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이곳의 바다를 보니까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헤밍웨이는 쿠바인들이 사랑하는, 유일한 미국인이 아닐까 싶다. 카스트로도 헤밍웨이를 인정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쿠바의 자연 환경과 쿠바인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반한 헤밍웨이는 20년간 쿠바에서 살면서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좋아한 바다낚시, 쿠바의 아름다운 바다, 쿠바인의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이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자 헤밍웨이는 이 상을 쿠바인에게 바쳐야 한다고 했단다.
헤밍웨이를 바라보고 흥겨운 음악을 들으면서 다이끼리 한 잔을 하고 나니까 아바나를 떠나기 싫어졌다. 하지만 괜찮아. 나는 도시들을 몇 군데 돌고 마지막에 아바나에 다시 올 것이다. 그때까지 잘 있으렴.
헤밍웨이와의 만남을 즐기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이제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야 한다. 술집 앞에 있는 코코(오토바이택시)를 흥정해보았다. 여기서 출발하여 숙소에 가서 짐을 픽업하여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조건으로 10달러로 협상을 했다. 처음에는 절대 안된다고 하더니 그냥 가려고 하니까 OK를 한다. 나의 협상 기술이 점점 늘고 있다. 그대로 코코를 타고 숙소에 들러 가방을 받았다. 그동안 숙소에 드나들 때마다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 호세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 호세가 열심히 일해서 자신의 숙소를 갖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시외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비아술 사무실을 찾아갔다. 비아술 사무실에서는 나의 예약종이를 보더니 건너편 짐 부치는 곳으로 가서 짐을 부치란다. 내 뒤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스웨덴 아저씨에게도 같은 말을 한다. 사무실에서 나와 건너편 짐 부치는 곳으로 가니까 짐의 무게를 재고는 버스표와 짐확인종이를 준다. 버스시간이 많이 남아서 대합실에서 기다리는데 스웨덴 아저씨가 와서 내 옆에 앉는다. 그는 쿠바에서 한달 정도 여행 중이란다. 우와, 멋지다.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배낭이 너무 무거워 다시 매기 싫어서 스웨덴 아저씨에게 맡기고 화장실을 찾아나섰다.
화장실에서의 작은 에피소드! 터미널의 화장실 입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이용료 5쿠파페소를 내란다. 그런데 나에게는 잔돈이 3쿠바페소뿐이라서 보여주니까 안된단다. 가지고 있는 지폐 중 가장 작은 단위가 500쿠파페소라서 그걸 제시했더니 거슬러주려고 돈을 센다. 아이고... 일단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부터 들어갔다. 예상대로 엉덩이를 걸칠 곳도 없고 휴지도 없다. 물도 내려가지 않는다. 힘겹게 볼일을 보고 나와서 양동이의 물을 바가지로 퍼서 붓고 나왔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지폐를 세고 있다. 그러다가 나에게 한뭉텅이를 준다. 딱 봐도 거스름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어쩌지 싶어서 서 있으려니까, 내가 화장실 위치를 몰라 헤맬 때 알려준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자기네 나라말로 막 뭐라고 뭐라고 한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아저씨가 아주머니를 혼내는 것 같았다. 결국 아주머니는 나에게 500쿠파페소는 돌려주고 나의 3쿠파페소를 받아갔다. 여행을 다닐 때면 항상 물을 사거나 간식을 사서 잔돈을 늘 만들면서 다녀야 하는데 그 부분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겨우겨우 대합실로 돌아와보니까 스웨덴 아저씨가 어떤 동양인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동양인 아가씨는 한국 여행자였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사람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에게 한국말로 배낭을 낯선 사람에게 맡기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자기가 바로 여기 오기 직전 멕시코에서 지금의 나처럼 작은 배낭을 옆 사람에게 부탁하고 화장실에 갔다가 바로 배낭을 잃어버렸단다. 거기에 노트북과 비상금 등이 있었단다. 허걱. 나도 이 배낭에 노트북이 있다. 물론 이 스웨덴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배낭을 맡기면 안되는 것이었다.
아! 순간 깨달았다. 나는 그 사이에 배낭여행의 습관들을 다 잊어버렸구나. 생각해보니까 아까 화장실건도 그렇고 배낭건도 그렇고 나의 자세가 아직 배낭여행족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맞다. 배낭여행자는 자신의 배낭은 언제가 자기가 책임진다.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배낭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니다. 안되겠다. 남은 여행을 무사히 마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스웨덴 아저씨와 한국 아가씨와 함께 수다를 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드디어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버스는 우리나라의 시외버스와 비슷하다. 여러 도시를 경유해서 간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니까 해가 진다. 노을이 멋진데 사진을 찍을만한 각도가 나오지 않는다. 버스는 잠시 휴게소에 정차했다가 다시 출발했다. 스웨덴 아저씨가 먼저 내리면서 여행 잘 하라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다음은 한국 아가씨가 내렸다. 그녀는 2일 후에 버스를 타고 시엔푸에고스를 지나간단다. 나도 2일 후에 시엔푸에고스를 떠나 트리나다드로 간다. 잘하면 버스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 서로 여행 잘하라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밤 9시쯤 버스는 시엔푸에고스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니까 택시 기사들이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택시로는 5분, 걸어가면 약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택시를 타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비쌀 것 같다. 비싸면 그냥 걸어가야지. 내 다리는 튼튼하니까. 다만, 내 트렁크도 튼튼했으면 좋겠는데 바퀴가 잘 버텨줄지 모르겠다.
어쨌든 기사들에게 숙소 주소를 보여주니까 10달러를 부른다. 말도 안되게 비싸다. 코코가 있으면 그것을 타면 좋겠는데 하필이면 지금 주변에 코코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갑을 탈탈 털어서 500쿠바페소(약 2.5달러)를 보여주며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고 했더니 안된단다.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끌고 걸어가려고 인도로 나서니까 어떤 택시 기사가 나를 부른다. 마음 약한 기사가 결국 태워다주었다. 사실 어거지로 깎아서 500쿠바페소에 왔지만 이건 좀 무리한 흥정이었다. 걸을만한 거리니까 나중에 버스 타러 올 때는 걸어서 와야겠다.
숙소에 도착해서 채크인을 했다. 방은 아바나의 숙소보다는 작다. 그래도 나 혼자 쓰기에는 충분하다. 시원하게 씻고 나서 근처 가게에서 맥주를 사와서 한잔 마시니까 천국이 따로 없다. 느리지만 인터넷도 되어서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안부도 전했다. 쿠바에서 시외버스 타는 거 어렵지 않네 뭐. 이렇게 쿠바에서의 첫 번째 이동을 무사히 마쳤다.